심경순례기

통영 미래사 - 산에 절이 있으매, 평화를 찾아 그곳에 가노라 11

梅君子 2012. 3. 5. 09:40

 

 

 통영 미래사 - 산에 절이 있으매, 평화를 찾아 그곳에 가노라 11  

 

 

 

                                                                                         장 소 : 경남 통영시 미륵도

                                                                                                                   경남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 915

 

                                                                                      일 시 : 2012년 2월  21일

 

                                                     

 

 

통영에서의 하룻밤 유숙은 달콤했다.

 

우리는 중앙시장에서 손질해 온 감성돔을 어제 저녁에 회로 먹고,

 

아침에는 매운탕을 끓였는데 그 고소한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일품이었다.

 

통영은 바다가 깨끗해서 그런지 수산물도 맛갈스럽게 싱싱하다.

 

아무튼 그렇게 살생을 하고도 뻔뻔스럽게 효봉대종사의 숨결이 어린 미륵도의 미래사를 참배하러 나선다.

 

효봉스님은 미륵도의 용화사와 미래사에서 많이 안거하셨다.

 

그당시 시봉하는 이야기가 승려이자 효봉의 제자였던 고은의 글에 많이 나온다.

 

미래사는 송광사의 주지이셨던 구산대종사가 토굴수도하던 자리가 그 시발점이라 한다.

 

구산九山은 미래사에 스승이신 효봉스님과 석두스님의 사리탑을 조성했다.

 

그러므로 구산은 석두스님의 법손인 것이다.

 

미래사는 미룩불이 도래하시는 곳이라는 뜻이다.

 

 

 

 

 

-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본 한려수도 -

 

- 미륵산은 통영의 보배가 틀림 없다 -

 

- 미륵도의 어느 해안길 -

 

- 한가함 -

 

- 정靜 -

 

 

 

미래사 안내

 

이곳은 미륵도 라는 섬이다, 미륵의섬에 미륵 부처님이 오실 절이라는 뜻에서 미래사(彌來寺)

미래사는 근세의 큰 스승이셨던 효본대종사(曉峰大宗師)를 모시기 위해 서기 1954년 (갑오년)에 전 승보사찰 방장 구산종사 께서 두어 칸의 토굴을 지었으니 미래사의 시작이다.

효봉스님 이라는 큰 그늘에는 항시 늘푸른 수행자 , 삶의길을 묻는 산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제자로는 구산, 일각, 법흥, 보성, 원명, 박완일, 고은 등 헤아릴 수 없음이요, 당시 출가한 이로는 수산, 구암, 법정스님 등이셨다.

면면이 이어져온 미래사를 오늘의 모습으로 중창 하신분은 서기 1996년 입적하신 자항당(慈航堂), 종욱화상 이셨다. 하나의 도량을 일군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귀한 일인가. 30여년동안 네동을 짓고 헐었으며 다시 오늘의 모습 8동을 지었다

특히 아(亞)자형의 범종루는 보기드문 형태의 수작으로 곱힌다.

미륵용을 흘러내린 양 줄기에는 효봉암 구산대사가 있다. 현재는 스님의 수행처로 참배는 할수가 없다

작은 사찰이라도 오늘에 있을 수  있는것은 한 두 분의 강고한 원력에 많은 분들의 동참으로써 지금에 이른다.

하나하나 쌍여진 정성이 하도 지극하여서 성스럽기 까지한다. 이어서 가꾸고 발전하는것이 후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세상의 모든일에 부딧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슬픔없이 티끌없이 안온한것 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네』

 

---  미래사 안내판에서  ---

 

미래사 주소 : 경남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 915     전화번호 : 055-645-5324

 


 

 

 

- 아마도 효봉암 가는 길인가 보다 -

 

- 입구에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

 

 

 

드디어 미륵도의 미래사에 도착했다.

 

미래사는 한국불교의 핵심을 이루던 선맥의 법통이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곳이다.

 

특히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효봉스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전국을 순례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효봉의 '절구통 정신'은 항상 필자를 각성시켜 주었다.

 

조계종 초대종정을 지내신 효봉스님의 문하에서는 구산스님, 시인 고은, 법정스님 등의 맑은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그 향기는 오늘날에도 한국 정신문화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지니, 효봉의 정신은 지금도 청정하게 계승된다 하겠다.

 

효봉스님의 스승이셨던 석두스님 부터 법맥이 차례로 사리탑으로 보존되고 있는 곳이 미래사이니, 조계종의 성지라 할만한 참배의 장소인 것이다.

 

옷깃을 여미고 또다시 참배하는 마음이 아프다.

 

매번 찾아 올 때마다 마음 가득 의욕을 안고 떠나 갔지만,

 

다시 돌아오는 마음 속에는 빈 껍데기만 있기 때문이다.

 

허망하지만, 원래 인생이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있으랴! 

 

......

 

채운들 무엇하랴!

 

 

 

 

- 석두스님, 효봉스님, 구산스님, 종욱스님의 사리탑이 안치된 부도전 -

 

 

미래사 부도전

 

부도전에는 석두 보택(石頭寶澤, 1882~1954), 효봉 학눌(曉峰學訥, 1888~1966), 구산 수련선사(九山秀蓮禪師, 1910~1983) 등 고승들의 부도와 탑비, 미래사 중창주인 자항당(慈航堂) 종욱 화상(宗旭和尙)의 부도가 세워져 있습니다.

 


 

 

 

- 석두스님의 사리탑 -

 

 

 

석두 보택(石頭寶澤) 선사 이야기


올해 탄신 120주년을 맞이하는 효봉(曉峰,1888~1966)스님은 일제 강점기 판사직을 던지고 도인(道人)을 찾아 나섰다가 금강산 법기암에 스승을 만난다. “호랑이 눈에는 호랑이만 보인다”고 했다. 시대를 풍미하며 수행의 기준을 몸소 보이며 불법을 널리 편 효봉스님이 가능했던 것은 은사 석두보택(石頭寶澤, 1882~1954)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석두스님 제자인 석정(石鼎)스님의 생생한 증언으로 선지식의 삶을 복원했다.

“번뇌 망상 끊어지면 생사도 끊어지는 것이다”

 

효봉.향봉.석정 스님 등 ‘한국불교 동량’ 길러

참선 수행과 검소한 생활로 후학들에게 귀감 돼

 


<사진설명>석두스님은 효봉스님 은사로 한국불교 중흥의 토대를 마련한 선지식이다. 사진제공=석정스님

 

“화상은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1909년 동안거 해제 전날 해인사. 친일 주지 이회광(李晦光,1862~1933)이 법문을 했다. “삼세제불(三世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와 금일(今日) 시회대중(時會大衆)이 모두 산승(山僧)의 입에서 나왔다.”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 그리고 오늘 법회에 참석한 대중이 ‘이회광’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회광은 친일 성향의 불교연구회와 원종종무원을 만들어 종정으로 추대될 만큼 당시엔 ‘실력자’였다. 20대 초반의 석두스님은 ‘오만한 법문’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화상(和尙)은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이회광은 아무 말도 못했다. 스님은 “범부에게 법문을 들을 수 없다”면서 법당 밖으로 나왔다.

 

“개구리도 소중한 생명” 천도

○…금강산 보운암으로 온 어느 날 밤. 경내에 있는 연못의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었다. 얼마나 요란하게 울던지 스님은 “공부를 제대로 하기 어렵겠다. 날이 새면 이곳을 떠나 조용한 도량에 가서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동 틀 무렵 까마귀 떼가 연못에 있는 개구리를 모두 죽였다. 광경을 목격한 스님은 “나의 부질없는 한 생각으로 많은 살생을 저질렀구나”라며 보운암을 떠나지 않았다. 그 뒤로 스님은 개구리 영가를 천도하기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고행 정진했다. 하루 한 끼를 송죽(松粥)과 된장으로 공양을 대신했다. 송죽은 솔잎 그대로 찧어 만든 것으로 제자 가운데 몇몇은 견디지 못하고 떠날 정도로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된장으로 간장 손수 만들어

○…일제 강점기 사찰 토지를 소작 붙였던 대처승들은 절에 머물지 않고 마을에 사는 경우가 많았다. 법회나 불공이 있을 때만 절에 왔다. ‘명자(名字) 주지’였다. 금강산 보운암 역시 마찬가지. 평소 검소한 생활을 했던 스님은 비록 주지가 없었지만 사중 물건을 헤프게 사용하지 않았다. 불 밝히는 석유도 한 병 두병 사다 썼다. 그 마저 예불 모실 때와 해진 뒤 물건 찾을 경우에만 사용했다. 말린 된장에 팔팔 끓인 소금물을 채를 통해 부어 누르스름하게 우러나게 하여 간장을 만들어 썼다.

 

“속이지 않으니 용서해 준다”

○…상좌 종남(宗南)이 스님을 시봉할 때였다. 옛날에는 방에서 부엌을 내다보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창문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손님이 찾아와 공양을 차려야 했다. 준비가 잘 되는지 스님은 창문으로 부엌을 보았다. 그런데 종남이 침을 ‘탁’ 뱉은 뒤 행주로 밥상을 닦는 것을 목격했다. 손님이 돌아간 뒤 상좌를 불렀다. “너는 상을 어떻게 닦았느냐.” “제가 하도 급해 침으로 닦았습니다.” 스님은 야단치지 않고 이렇게 타일렀다. “네가 잘못은 했지만, 속이지 않으니 용서해 준다.”

 

“금강산 미륵불 글씨= 쌀600섬”

○…금강산 구룡폭포 옆에는 길이 19m, 폭 3.6m나 되는 거대한 글씨 彌勒佛(미륵불)이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석두스님이 김규진에게 글씨를 부탁한 것이다. 한 글자에 100원씩 모두 300원을 지불하기로 했다. 당시 쌀 한 섬이 50전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쌀 600섬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이다.

1년 뒤 완성됐다는 연락을 받고 만났는데 ‘海岡 金圭鎭 書’(해강 김규진 서)는 글씨가 추가되어 있었다. “저는 이것을 안 가져가겠습니다.” 스님이 난색을 표하자, 해강은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에 내 이름 석 자를 새기는 것이 원(願)이니, 300원을 받지 않을 테니 새겨 주십시오.” 글씨를 새길 무렵 금강산에 비가 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명산에 구멍을 뚫으니 하늘이 노해 가물다”면서 공사 중지를 요구했다. 스님은 “회향하고 나면 비가 올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은근히 걱정 했다고 한다. 회향 전날 밤 많은 비가 내려 돌가루까지 깔끔하게 씻겨 나갔고, 환희심이 난 주민들이 회향 당일 찰밥과 떡을 마련해 찾아왔다.

 

효심 깊은 상좌들

○…석두스님은 상좌인 효봉스님과 불과 6살 차이였다. 외모로 보면 효봉스님이 더욱 나이 들어 보였다고 한다. 객(客)이 찾아와 인사를 할 때면 석두스님보다 먼저 효봉스님에게 “큰스님께 인사드립니다”라며 절을 했다는 것이다. 석두스님과 효봉스님은 그저 미소만 보였다. 상좌들은 은사스님을 깍듯하게 모셨다. 효봉스님은 송광사 주지 임석진 스님에게 부탁해 은사를 큰절로 모셔왔으며, 말년에는 통영 미래사에서 극진하게 간병했다. 상좌인 계봉스님은 대변을 맛보아 차도를 살필 만큼 효심이 깊었다.

 

참선.도솔발원. 준제기도

○…스님은 후학들에게 참선 정진을 강조했다. “다른 복을 짓는다 해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너희들은 참선을 해라.” 또한 보조국사의 가르침을 모범으로 삼아 정진했다. 때문에 돈오돈수(頓悟頓修) 보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입장을 가졌다.

은사 백하(白荷)스님과 해인사 제산(霽山)스님의 영향을 받아 스님은 도솔발원(兜率發願)을 참선과 병행했다. 금강산 상운암 뒤에 마애미륵불상을 모셨으며, 세존봉 중턱에는 도솔암도 지었다.

또한 준제기도(准提祈禱)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았다. <준제경>에 나오는 ‘좋은 향’을 구하려고 중국과 러시아도 다녀왔다. 결국 그 향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향’임을 깨닫고 돌아왔다. 일곱 차례의 100일 준제기도를 통해 수마를 항복 받은 스님은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에 들었다.


스님이 즐겼던 게송

 

<사진설명>불화장(佛畵匠)인 석정스님이 직접 그린 석두스님 진영.

석두스님은 평소 법문을 하거나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줄 때 ‘달마조사송(達磨祖師頌)을 많이 인용했다. “번뇌 망상 끊어지면 생사도 끊어진다”는 내용을 담은 이 게송은 스님이 전하고 싶은 가르침이다.

財色不忘莫聞道(재색불망막문도)

貢高自是體參禪(공고자시체참선)

煩惱斷盡生死斷(번뇌단진생사단)

更無別法與人傳(갱무별법여인전)


재물과 색을 저버리지 못하거든 도를 묻지 말고 / 내 잘난 생각 갖고는 참선을 하지 말라 / 번뇌 망상 끊어지면 생사도 끊어지는 것이니 / 이밖에 다른 법은 일러줄 것이 없다.


행 장

백하스님 문하로 출가

주지 마다하고 ‘정진’

석두스님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 9월4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임치권(林致權)과 모친 김해김씨 슬하의 5남매 가운데 2남이었다. 속명은 상하(尙夏). 어려서 성품이 급하고 고집이 강했지만 총명함과 인자함을 겸했다. 병법을 배워 장군이 되고자 했지만 출가 원력을 세웠다. 16세였다. 안변 석왕사 백하스님은 “장차 선지식이 될 것”이라면서 보택(寶澤)을 법명으로 내리고 출가를 허락했다. 스승에게 범패를 익힌 지 3년 만에 명천 쌍계사 주지로 발탁됐지만 사임하고 선원에 들어가 정진했다.

준제진언을 방편으로 수행에 몰두한 결과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등 오음마(五陰魔)의 항복을 받았다. 25세 겨울에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산스님을 모시고 정진하던 중 지혜의 눈이 열려 “圓覺道場(원각도량)이 何處(하처)요. 現今生死(현금생사)가 卽是(즉시)”라고 했다. 석주스님 은사인 남전(南泉)스님이 이를 나무에 새겨 해인사 장경각 주련으로 걸었다. 이듬해 12월에는 무자화두를 타파하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47세 되던 해 효봉스님에게 전법하고 전국을 다녔다. 송광사 삼일암에 주석하며 부도암에 선원을 개설했다. 순창 순평암에 머물다 해방을 맞이했다. 71세 되던 해에 몸이 불편하여 미륵도 미래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1954년 4월25일 오후 8시30분 열반에 들었다. 세수 73세, 법납 57세. 석두스님은 참선을 권하고 <미륵상생경> <유마사행론> <보조수심결>을 자주 말씀했다. 제자로 효봉학눌(曉鳳學訥).향봉학눌(香峰香訥).화봉유엽(華峰柳葉).계봉무아(溪峰無我).해봉석정(海峰石鼎).석봉인선(石峰仁善).은봉원광(隱峰圓光) 스님이 있다. ibulgyo.com <펌>

 

참고 : 한국 불교의 선맥은 석가→마하 가섭(1대)→보리 달마(28대·동토 초조)→33대(동토 6祖) 혜능→38대 임제→57대 태고 보우→63대 청허 휴정으로 이어진다. 조선 불교의 중흥조인 서산대사 청허 휴정(淸虛 休靜·1520~1604)의 법맥은 사명, 편양, 소요, 정관 등으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편양을 제외한 나머지 문파는 대부분 대가 끊겼고, 편양 언기(鞭羊 彦機·1581~1644)의 문손만 크게 번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편양의 법은 풍담→월담→환성 등으로 이어졌고, 환성 지안(喚醒 志安·1664~1729) 이후 10대가 지나서 77대 석두 보택(石頭 寶澤·1882~1954)이 법을 이어 금강산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 효봉스님의 사리탑 -

 

 

효봉 학눌(曉峰學訥) 스님 이야기


“그대들은 밥도둑이 아닌가… 어찌하여 방일한가”

판사로 사형선고후 생사문제 ‘관심’

촛농 모아 촛불 밝힐 정도로 ‘검소’

 

 

~ 인자한 모습의 효봉스님 ~


판사라는 ‘화려한 직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출가한 효봉학눌(曉峰學訥, 1888~1966)스님. 스님은 생사문제 해결을 위해 오직 참선수행에 몰두하며, 후학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다. <효봉법어집>과 비문 등의 자료를 참고하여 효봉스님의 수행일화를 정리했다.

 

○…“사람이 사람을 벌 할 수 있는가. 범부인 내가 어떻게 같은 사람을 벌할 수 있단 말인가.” 1923년 평양복심법원 판사로 근무하던 스님은 직책상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해야만 했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고뇌를 거듭한 결과 아무리 세속에서 출세가 보장된다고 해도, ‘생명의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다. 부인과 세 자녀도 있었지만 사표를 던진 스님은 3년간 엿판 하나 메고 팔도강산을 방랑하는 고행(苦行)에 나섰다.

 

○…엿장수로 나선 스님은 엿판과 옷 두벌이 전 재산이었다. 남루했지만 판사로 있으면서 사람을 ‘단죄(斷罪)’할 때보다는 편했다. 뒤따라오는 아이들에게 공짜로 엿을 나눠주어 밑천이 떨어져 솔잎과 물에 불린 콩으로 배를 채운 적도 있었다. 울산 방어진 바닷가에서는 돌 줍기에 정신을 빼앗겨 밀물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다가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했다.

 

○…금강산 보운암에서 석두(石頭,1882~1954)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오로지 “생사의 고뇌에서 해탈하겠다”는 일념으로 수행정진에 몰두했다. 1927년 여름. 금강산 신계사 미륵암에서 안거에 들어갈때 스님은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반야의 인연이 엷은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 없습니다. 입방선(入放禪)도 경행(經行)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 정진하겠습니다.” 이후 스님은 한철 동안 미동도 없이 화두를 참구했다. 어느 날 공양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엉덩이 살이 헐어 진물이 흘렀다고 한다. ‘절구통 수좌’라는 별칭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1931년 스님은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깨닫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며 흙으로 입구를 봉했다. 하루 한 끼 공양을 들여보낼 창문 하나와 용변을 처리할 수 있는 구멍을 뚫었을 뿐이다. 방석 석장과 입은 옷 하나로 18개월의 ‘전투’를 거쳐 화두를 타파한 후 당시 심경을 시로 옮겼다. “海底燕巢鹿抱卵(해저연소녹포란) 火中蛛室魚煎茶(화중주실어전다) 此家消息誰能識(차가소식수능식) 白雲西飛月東走(백운서비월동주)” <효봉법어집>에 실린 우리말 풀이는 이렇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 타는 불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금강산에서 만공(滿空,1871~1946)스님을 만났다. 효봉스님이 “천하에 살인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는 누굽니까”라고 질문하자, 만공스님은 “오늘 처음으로 보겠구나”라고 답했다. 이에 효봉스님이 “화상의 머리를 갖고 싶습니다”라고 재차 묻자, 만공스님은 머리를 숙여 그 앞에 대니 효봉스님은 절하고 물러났다. 이번에는 만공스님이 물었다. “세존께서 대중을 거느리고 길을 가시다 어느 지점을 가리키면서 절터가 아주 좋다 하시니 제석천왕이 풀 한 포기를 거기 꽂아 놓고, ‘절을 다 세웠습니다’할 때, 세존께서 미소만 짓고 답하지 않으셨으니 그 뜻이 무엇인고”라고 했다. 이에 대해 효봉스님은 “일찍 듣자하니 화상께서는 절 짓기를 매우 좋아하신다더니 과연 그렇습니다”라고 답했고, 만공스님은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효봉스님은 1948년 12월21일 덕숭산 정혜사에서 열린 만공선사 대상법요(大祥法要)에 참석해 법문을 했다. 스님은 “10년 전에 이 산에 왔을 때는 그 사람만 보고 산은 보지 못했더니, 10년 후에 이 산에 오니 그 사람은 볼 수 없고 산만 보이는 구나”라고 법문했다. 이어 효봉스님은 “향을 사르고 꿇어 앉아 흐느껴 우니, 두 눈에서 젖지 않는 눈물이 비처럼 내린다”며 만공스님의 원적을 안타까워했다.

 

○…1946년 11월 가야총림 방장으로 추대된 효봉스님은 송광사를 떠나면서 “무엇 때문에 이 조계산을 떠나는가. 인천(人天)의 큰 복밭을 갈고자 해서라네”라고 했다. 효봉스님은 직접 쓴 <가야총림 방함록 서(序)>에서 “사자의 힘줄과 코끼리의 힘으로 판단하여 지체 없이 한칼로 두 동강을 내야 한다”며 수행자들의 정진을 당부했다. 우리말로 옮긴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맹하고 예리한 몸과 마음으로 지금까지의 비린내 나는 장삼과 기름기에 전 모자를 벗어 던지고, 천지를 덮는 기염을 방출(放出)하고 부처님과 조사를 뛰어넘는 위광(威光)을 발휘해야 할 것이니, 그래야만 그와 벗할 수 있고 또한 씨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활구(活句) 밑에서 깨달으면 영원히 잊지 않겠지만, 사구(死句) 밑에서 깨달으려 하면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 만약 불조(佛祖)와 더불어 스승이 되려면 모름지기 활구를 밝혀 가져야 할 것이다.”

 

○…정초가 되면 제자들이 인사를 드리려고 효봉스님을 찾아왔다. 그때마다 당부하는 말씀이 있었다. “어디에 있든지 정진 잘 하면, 내 곁에 있는 것이나 같은 것을, 뭐 하러 살림 중에 결제(結制)를 깨뜨리나, 나는 늘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있네.” 효봉스님의 생활은 검박했다. 흘러내린 촛농을 모아 심지를 박아 다시 불을 밝혔으며, “걸레도 너무 심하게 짜면 빨리 떨어진다”며 살살 짜라고 했을 정도였다.

 

○…1959년 7월15일(음력)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효봉스님은 수좌들의 용맹정진을 당부한 법어를 했다. “그대들은 밥도둑이 아닌가. 두 도둑이 집안의 보배를 훔쳐 가려고 하니 취모검(吹毛劍)으로 육문(六門)을 지키되 용감하기 적병을 대하듯 해야 한다. 적을 막지 못하면 저들로부터 내 자신이 피해를 입을 텐데 어찌하여 스스로 방일(放逸)한고. 졸음과 망상 두 마구니가 침입하지 않던가? 남의 시은(施恩)을 지고 그 은혜 갚겠는가? 그림의 떡이 능히 배부르게 하던가? 범부가 성인되려고 하는데 누가 막던가? 삼도(三途)의 괴로움이 그대의 집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닦지 않는가. … 신도들은 듣고 믿으라. 믿음(信)이 도(道)의 근원이요 공덕(功德)의 어머니 이니라. 그리고 비구니들에게 한마디 하겠는데, 무행승(無行僧)을 따르지 말라.”

 

○…효봉스님과 경봉(鏡峰)스님이 교환한 서신이 <삼소굴소식>에 실려 있다. 칠언절구의 시 형식으로 효봉스님이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로 주석할 무렵 보낸 서신이다. “人間一葉落公山(인간일엽낙공산) 色有內外正秋葉(색유내외정추엽) 這裡雖似有秘密(저리수사유비밀) 更奇一花落後葉(갱기일화락후엽)” <삼소굴소식>에 실린 한글풀이를 옮겼다. “인간의 한 잎이 팔공산에 떨어지니 / 빛깔에 안팎 있어 바로 가을잎이어라 / 그 가운데 무슨 비밀 있는 듯 하나 / 다시 한 송이 꽃 떨어진 잎에 붙이네” 송광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행장]

석두스님 은사로 출가 / 정화불사 ‘정신적 지주’

효봉스님은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석리에서 이병억(李炳億) 선생과 모친 김씨의 5형제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평양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1913년부터 1923년까지 경성지방법원과 함흥지방법원을 거쳐 평양복심법원에서 법관으로 일했다. 1923년 처음으로 사형 선고를 한 후 “내가 갈 길은 따로 있다”며 스승을 찾아 나섰다.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원명(元明)스님으로 다시 태어났다. 36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가해 ‘늦깎이’로 불렸지만, 오히려 남보다 더욱 정진했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은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어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 결과 스님은 1년6개월 만에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다. 45세 되던 해(1932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스님에게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효봉스님은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등의 선원에서 정진했으며, 1937년부터는 순천 송광사에 주석하며 납자들을 맞이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스님은 합천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통영 미래사에 주석했다. 종정(宗正)도 역임했다. 종단정화불사에 참여할 당시 스님은 “大厦將崩(대하장붕) 衆力扶持(중력부지)”라는 내용의 ‘불교정화불사 송(頌)’을 지어 격려했다. “큰 집이 무너지려 하니 / 여럿의 힘으로 붙들어라”는 뜻이다.

대구 동화사를 거쳐 밀양 표충사에서 머물던 스님은 1966년 10월 15일(음력 9월2일) 표충사 서래각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79세, 법랍 42세.

 

출처 : http://bubryun.com/board1/view.asp

 


 

 

 

- 구산스님의 사리탑 -

 

 

석사자(石獅子)를 다시 펴내면서

 

- 석사자 개정판 발문 -

 

 

 

옛 사람의 말씀에 도(道)가 사람을 멀리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道)를 멀리 한다고 했듯이 은사(恩師)스님께서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건만, 저희들은 은사스님 가신지 15년이 되었다고 이렇게 추모하고 있으니 이 어찌 된 일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광양 백운산 상백운암(上白雲庵)에 주석하고 계신다는 구산(九山) 스님을 한번 찾아뵙기 위해 마음에 새기고 있을 때 뜻밖에 꿈속에서 구산 스님을 친견하고 다음과 같은 법문(法門)을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보리자성본청정(菩提自性本淸淨)
만고지금무증감(萬古至今無增減)
불여중생호불이(佛與衆生毫不異)
시방군생역부연(十方群生亦復然)

보리의 마음바탕 본래로 청정하여
옛이나 지금이나 더하고 덜함 없네.
부처와 모든 중생 조금도 다름없어
온 누리 뭇 생명도 이 또한 그러하네.


이 몽중법문(夢中法門)을 듣던 순간 육조(六祖) 스님의 법문이 문득 떠올랐다.
보리자성이 본래청정[菩提自性 本來淸淨]하니 단용차심하면 직요성불[但用此心 直了成佛]이라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의 말씀이다.

이런 숙세의 지중한 법연(法緣)으로 인해 어렵게 스님을 찾아가 친견하고 시자(侍者)가 되었으며 또 스님의 뜻에 따라 이렇게 선문(禪門)에 머물고 있으니 이 어찌 다행스럽지 않으랴!

하지만 아직껏 은사 스님의 막중한 은혜에 보답치 못한 부끄럼과 아쉬움이 남아 있으니 이 또한 누구를 탓하며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돌이켜보면 스님께서는 평생 동안 오직 수행정진에만 전력하면서도 가람수호와 포교전법에도 쉴 날이 없었으니 이는 복혜를 쌍수[福慧雙修]함이요, 또 한편으로는 불조(佛祖)의 유훈에 어긋남이 없이 여법한 수행가풍(修行家風)을 몸소 실천하면서도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정신으로 온 누리가 불국정토(佛國淨土)가 되기를 염원하였으니 이는 지혜와 자비를 쌍용[智悲雙用]함이 아니겠는가!

 

1969년 여름 안거 결제를 맞이하여 스님께서는 효봉(曉峰) 노스님의 유촉을 받들어 승보종찰 송광사(僧寶宗刹 松廣寺)에 조계총림(曹溪叢林)을 개설하고 초대 방장화상(方丈和尙)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불조의 혜명[佛祖慧命]을 계승하고 인천의 사표[人天師表]가 될 수 있는 현전승보(現前僧寶)의 양성을 위한 원력으로 조계선풍(曹溪禪風)을 널리 선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1973년 봄, 미국 가주 카멜 근교에 한국 최초의 사원인 삼보사(三寶寺)가 건립되자 그 회향법회에 참석하신 후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 미 전역을 순방하고 귀국하는 길에 미국인 코쟁이 상좌 현조(昡照)를 데리고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송광사에 불일국제선원(佛日國際禪院)을 개원하게 되었다.

이는 800여 년 전 중국 금나라 천자(天子)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를 찾아와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수행한 후 3일 만에 득도(得道)하고서 제9세 국사가 된 것이 불일국제선원의 효시라 할 수 있으며, 그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 오늘날 송광사의 불일국제선원이 아닐까 생각된다.

 

연못을 파고 나면 자연히 고기가 모여들 듯 미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영국, 독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구미 각국과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 대만, 태국, 미얀마 등 동남아에서도 많은 남녀 젊은이들이 운집하여 시방당(十方堂)을 이루니 송광사 국제선원의 명성은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수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오고 또 외국 승려들의 부모 형제나 친지들이 송광사를 방문하여 방장스님의 법문을 청해 듣는 기회가 자연히 많아졌다.

그런가 하면 수년 간 총림 선원에서 수행 정진하다가 귀국길에 방장스님의 고구 정녕한 심지법문(心地法門)과 수시설법(隨時說法)을 다시 듣고 싶어서 자기네들이 스스로 스님의 법문을 모으고 번역하여 출간한 것이 영문판 ″NINE MOUNTAINS(九山)″이란 책이며, 이것을 다시 정리하여 간행한 것이 이 ″석사자(石獅子)″ 법어집이다.

 

 

그러니 이 석사자 법문은 외국인 제자들과 내방객들을 위하여 스님께서 생전에 손수 원고를 쓰고 노파심절로 자비심을 베푸신 수시설법이며 스님의 첫 저술이라는데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동안 이 석사자는 여러 차례 판을 거듭하면서 널리 유포되었으며 네거리의 돌사자답게 길을 잃고 헤매는 수많은 나그네들에게 올바른 길잡이가 되었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이제 다시 판형을 달리하여 새롭게 재출간하게 되었으니, 이 ″석사자(石獅子)″가 온 누리에 더 힘찬 사자후를 하게 되리라 염원하면서 그간 수고해 준 불일출판사 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원컨대 이 석사자 법어집을 보고 듣고 읽는 이마다 다 함께 자기의 본래면목인 보리자성(菩提自性)을 깨닫고 호호탕탕한 인생정로(人生正路)에 소요자재하고 수류득묘(隨流得妙)하여 삼보(三寶)의 은혜에 보답하고 한량없는 보살행화(菩薩行化)로써 뭇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면 이 어찌 즐겁고 기쁘지 않겠는가!

 

하늘 높고 바다 넓어 연화계(蓮華界) 펼쳐지니
꽃은 피고 새가 울어 적광토(寂光土) 이 아닌가!
산궁수진(山窮水盡) 회광처(廻光處)에 뚜렷한 보리자성
기식갈다(飢食渴茶) 곤즉면(困卽眠)이 이뭣꼬 도량일세.


불기 2543년(1999년) 기묘년 봄

미국 하와이 臥佛山下 金剛窟中 安居時

迷佐 玄虎 焚香 九拜 合掌

출처 : http://bubryun.com/board1/view.asp

 

*구산선사(九山禪師) 오도송(悟道頌)

 

深入普賢毛孔裡(심입보현모공리)보현의 모공(毛孔)속에 깊이들어가

捉敗文殊大地閑(착패문수대지한)문수를 붙잡으니 대지가 한가롭구나.

冬至陽生松自綠(동지양생송자록)동지날에 소나무가 스스로 프르르니

石人駕鶴過靑山(석인가학과청산)돌사람이 학을 타고 청산을 지나가네.

  


*구산선사(九山禪師) 열반송(涅槃頌)

 

滿山霜葉二月花(만산상엽이월화)가을 서리내린 낙엽이 봄꽃보다 붉남니

物物頭頭大機彰(물물두두대기창)두두 만물의 큰 기틀이 모두 뚜럿하도다.

生也空兮死也空(생야공혜사야공)삶도 공(空) 이요 죽음도 공(空)이러니

能仁三昧微笑逝(능인삼매미소서)부처님의 해인삼매 속에 미소 짓고 가노라.

 


 

이 석사자 초판본을 필자는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생전에 인사 드렸던 미소실의 구산스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

 

 

- 종욱스님은 단하에 사리탑을 안치하고 있었다 -

 

- 초가의 부처님이 더욱 신성해 보인다 -

 

- 사찰림으로 조성된 편백숲은 수령이 70년은 되었다 한다 -

 

- 미래사 입구는 일주문이나 천왕문도 없이 매우 간결해 보이나, 그래도 단정한 모습이 일품이다 -

 

- 입구의 나한들 -

 

- 언제보아도 대웅전은 차분한 마음을 일으켜 준다 -

 

- 정말 단정한 절이다 -

 

- 종무소 쪽에서 바라본 대웅전 -

 

- 무슨 샘이라고 씌여 있었는데 -

 

- 깨끗한 모습의 문고리 -

 

- 황매실 취산구하 -

 

- 갈증 -

 

- 무념 -

 

- 적멸 -

 

- 자비 -

 

- 싱그러움 -

 

-  스님의 독경이 매우 낭랑한 가운데 동자보살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 -

 

 

-

-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봉안한 삼층석탑인 적광탑(1990년 조성) -

 

- 이 도솔영당에 법맥을 이어온 선사들의 진영이 보존되어 있다 -

 

- 초조 달마스님에게서 법을 인가받는 혜가스님의 처절한 구도求道의 모습이 그려진 도솔영당 외벽화 -

 

- 심우도의 일부 -

 

- 일제 때 조성된 편백림 -

 

- 하늘을 가린 싱그러움 -

 

- 마삭줄과의 동거 -

 

- 봄의 기운 -

 

- 뜨락 -

 

- 아주 빼어난 십자형 누각인 범종각 -

 

- 와담 -

 

- 최고만족의 미소 -

 

 

- 미래사를 나오는 마음이 가뿐하다 -

 

- 바보불이시여, 안녕! -

 

- 코끼리도 안녕! -

 

- 자항교 너머에 부도전이 있다 -

 

- 깨달음을 주시는 선사님들도, 안녕히 계시시오! -

 

 

 

 

 

  

 

법손法孫

 

 

흐르는 물처럼 바다에 이르르러면

 

얼마나 많은 고행길을 가야 하는가

 

바다에 이르기 전에 증발하는 수증기처럼

 

한달음에 하늘로 오르는 묘책은 필요없구나

 

 

- 小鄕   權大雄 ( infol@daum.net )

 

 

 


 

 

 

 

 

 

- 2012년  3월 5일 -

 

 

 

프로필 이미지

 

 

 

小鄕  權大雄 쓰다

 

 

 ++++++++++++++++++++++++++++++++++++++++++++++++++

 

 

관련 글은 아래 링크된 블로그에 더 있습니다.

http://blog.daum.net/valeriano

 

 

++++++++++++++++++++++++++++++++++++++++++++++++++

배경음악은 ; 데이 트립 - Loving U

++++++++++++++++++++++++++++++++++++++++++++++++++

 

 

 

<모든 사진과 글은 저작권이 있는 자료이오니, 무단 사용시 그 출처를 꼭 명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