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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작법2

梅君子 2006. 4. 12. 14:14

제  목 : 7장/ 시간 이어가기, 바꾸기 -2-  


                 (2) 소설의 시간과 그 안에서 서술된 내용의 시간

지금까지 우리가 확인한 것들은 주로 시간의 서술방법이었다. 이제 관심의 촛점을 바꾸어, 시간의 구조에 대해서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편의 소설 속에서는 언제나 각각 다른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법이다. 그 길이 와 맞먹는 소설의 실제 시간이 하나요, 또 하나는 그 안에서 서술된 내용의 시간이다. 우선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한다. 최인훈의 단편소설 <무서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 맨 처음 소설이 시작되는 장면으로서, 어느 여름날  오후  시민회관 앞에서의 짧은 순간이다. 염치없이 노닥거리던 여름해가 바야흐로 뉘엿거리기 시작할 무렵이다.  시민회관에서 광화문 지하도 쪽으로 걸어가던 구영웅씨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어떤 사람을 보고 쭈뼛해졌다. 그 순간 구영웅씨는 얼른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 그리고 여전히 걸어갔다. 그러나 구영웅씨는  이번에는  뒤에서 그를 따라갔다. 분명히 그 사람이었다. 별다를 것 없는 셔츠 차림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구영웅씨는, 저 옛날 분명히 죽은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의 선생님이 버젓이 살아서 나타났을 때의 제자들의 심정을 알만했다.

                                             (최인훈, <무서움>)

둘째, 이 소설의 중심내용으로서, 십 년 전 군대생활 동안의 이야기다. 위의 맨 첫장면 인용문과 아래 끝장면 인용문을 제외한 나머지  소설  전체가 이 부분을 차지한다.

셋째, 이 소설의 끝장면으로서, 다시 맨 첫장면으로부터 이어지는  여름날 오후 시민회관 앞에서의 짧은 순간이다. 십 년 후의 광화문으로 구 중위의 마음은 다시 돌아왔다. 구영웅 씨는  별다를 것 없는 셔츠 차림의 뒷모습-황대위를 따라가다 흑,놀라면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에 잡히면 구영웅 중위는 꼼짝없이 현행범이었다. 황대위가 <휙>돌아다보기 전에 구영웅씨는 군중속으로 <싹> 숨어버렸다. 구영웅중위는 무서웠다.

                                             (최인훈, <무서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이 차지한 시간은 <여름해가 바야흐로  뉘엿거리기 시작할 무렵> 어느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게 이 소설이 처음  시작 돼서 끝날  ㎖까지 걸린 시간의 전부다. 사랑과 미움과 삶과 죽음과  인생이 무엇인지를 담아야 할 소설치고는 그 벌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이런  시간을 우리는 <소설의 시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언제나 소설  속의현재다. 그러나, 그 소설의 시간이 그토록 짧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무려 십 년이나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따지고보면, 소설의 현재적 시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 십 년 동안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  중에서도 군대생활 삼 년 도안에 걸친 집중적인 내용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그것은 단 몇십 분도 안 되는 짤막한 소설의 시간에 비해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이런 시간을 또한 우리는 그안에서 <서술된 시간>이라고 한다. 소설의  시간이 언제나 현재적 시간인 데 비해 이 서술된 시간은 과거 또는 미래일 수 있다.

(3) 소설은 상황의 시간이다.

그 소설의 시간과 서술된 내용의 시간은 서로 같은 경우도 있고, 각각  다른 경우도 있다. 태어나서 죽을  ㎖까지, 주인공의 영웅적 일생을 그린 옛날 이야기는 대부분 그 두개의 시간이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행복한 집에서 태어나, 위기와 극복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행복한 삶을  되찾으면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의 시간이 곧 주인공의 생애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소설의 시간은 주인공의 일생이 아니라, 그의 생애 가운데  특별한  어떤 상황이다. 그것은 상황적 시간이고, 모든 현대소설은 그 제한된 상황의  시간을 갖는다.

겨울, 천구백칠십년대 초 굉장한 충격으로 상륙한 오일 파동에다 어떤  피치 못할 사연까지 덤으로 붙어 느닷없이 앞당겨진 장장 두달여의 이 양양하고 칠칠한 겨울방학-그리고 형의 칩거(蟄居)였다. (전상국, <침묵의 눈>) 이 시간은 겨울방학 두달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시대적인 상황으로 압축된 시간이기도 하다. <침묵의 눈>은 철저히 그 상황적 시간속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운흥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지난해 봄  내가 짧게나마 환음사에 머물고 있던 때였다. 당시 나는 출판사에서 의뢰받은 경제학 관계 책 하나를 번역하고자 한 두달 작적으로 폐사(廢寺)나  다름없는 환음사의 절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최학, <山行>) 같은 두 달이지만, 윗글의 계절이 겨울이던 것에 비해  여기서는  봄이고, 문명의 도시였던 것에 비해 여기서는 자연의 산 속이고, 그 상황이  시대적 이던 것에 비해 여기서는 다분히 개인적이라 할수 있다. <산행>의  영원한 시간은 바로 이런 개인적 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것은 어제와 다름없이 잘되었다. 부엌 선반의 시계는 다섯시 반을 가리키고 밥은 한참 뜸이 들어가는 중이고 노릇노릇 구워진 생선에서는  비늘타는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오정희, <저녁의 게임>)

이런 상황은 평범하다. 누구네 집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상의 부엌,  모든 것이 어제와 다름없는 나날의 오후 다섯시 반. 이런 평범한 일상도  소설의 상황일 수 있다. <저녁의 게임>은 그 일상 속에 도사린 평범을  파헤쳐보는 무서움이 깃들어 있다.


(4) 소설의 시간과 소설의 길이

현대소설은 그래서 소설의 시간 그 자체가 상황이고, 그 상황이 곧 소설의 장치이기도 하다. 그 장치 안에서 시간은 과거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다시 소설의 현재적 시간 속으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들고남을  반복하면서 소설은 진행된다. 일반적으로, 소설의 시간은 그 안에서 서술된 내용의 시간보다 길지 않다. 그것은 그 안에서 다루어질 무한한 시간이 아니라, 제한된 장치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장치가 처음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를 소설의 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길이는 다시 과거로 되돌아간 부분과 소설적 현재의 부분으로 구분된다. 그 과거와 현재가 들고남을 반복하면서, 소설은 진행되는  것이다. 어떤 것은 현재 시간의 길이보다 과거 시간의 길이가 더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고, 또 거의 비슷한 것도 있고, 그렇듯이 소설의 길이과  시간은 다양하다.

(가) 서술된 시간이 소설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예

앞서 최인훈의 <무서움>은 소설의 시간이 할애한 길이보다 그안에서  서술된 과거 시간의 길이가 훨씬 길다. 짤막한 현재-긴 과거-짤막한  현재,  이소설의 장치는 이렇다. 이때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시간을 건너뛰는 표현방법이 요구된다. <무서움>은 그 부분에서 한  줄을  띠어 단락을 구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한 줄 띠고, 다음과 같이 현재의 광화문에서 문득 군대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군에 근부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병참부대 소속으로 정비중대라는 것이 있다. (최인훈, <무서움>)

그런가 하면 또 과거에서 대시 현재로 되돌아올 때도 그는 한 줄을  띤다. 그리고는 정확히 시간과 장소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십 년 후의 광화문으로 구 중위의 마음은 다시 돌아왔다.
                                                (최인훈, <무서움>)

십 년 후의 광화문이란 소설적 현재에서 다시 자기가 서 있는  곳을  말한다. 이 장면은 처음에 일단 제시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데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 소비한 십 년 전의 이야기가 너무 길었기  ㎖문에 다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나)서술된 시간이 현재 사건의 원인을 제공해주는 예전상국의 <침묵의 눈>은 현재 시간의 길이가 그 안에서 다루어진 과거  시간의 길이보다 길다. 따라서 소설의 중심 내용이 현재적 시간 속에서  이루어짐은 당연하다. 과거가 이야기의 초점이 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과거와 현재가 <무서움>에서처럼 선형(線形)의 연결일  수도  없다. 소설의 현재적 시간은 오직 <겨울, 천구백칠십년대 초> <두 달여의 이 양양 하고 칠칠한 겨울방학>동안의 특수 상황 속에 제한된다. 형은 가을부터 날뛰었다-그러나 형은 겨울방학이 선고되기 며칠  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형은 돌아왔다-형은 일 주일을 내리 잠만 잤다-형이 그 긴 잠에서  ㎖어난 것은 내가 대문 밖 쓰레기통에서 백치(白痴)를 발견한  시간과 거의  ㎖를 같이했다.

                                              (전상국, <침묵의 눈>)

여기서도 물론 서술된 과거의 시간이 없는 건 아니다. 무려  예닐곱  살적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여기서는 그 소설된 과거가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이 아니라는 거뿐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  사건의  원인제공을 한다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도 과거는 필요하다. 그 과거때문에 현재 이야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방법이 여기서는 특이하다. <무서움>에서처럼, 행간을 띠거나, 단락을 바꾸지도 않고, 그렇다고 시간과 장소를 따로 표시한 것도 아니다.  현재의 상황과 동일한 시간 속에 불쑥 과거를 끼워넣고 있다. 형의 그새끼는 이처럼 느닷없이 쓰레기통에서도 나왔다.  호중아,  불이야 불, 형이 흔들어 깨웠다. 엄마가 살고 있던 바깥채가 불붙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무서워서 울었다. 그 ㎖ 형이 미친 듯 울고 있는 내 귀에다 속삭였다. 저 불, 그새끼가 싸지른 거야! 그새끼를 형이 처음 입에 올린 것이  그때였다. 내가 대여섯 살, 형이 예닐곱 살쯤 돼서였을 것이다.

                                              (전상국, <침묵의 눈>)

<느닷없이 쓰레기통에서도 나왔다>까지의 첫 문장은 이 소설의 현재적  상황이다. 그러나, 그 바로 다음 문장인 <호중아, 불이야 불>에서부터 끝까지는 형의 예닐곱 살적 어린 시절의 일이다. 이처럼 현재와 과거가 단락의 구분도 없이 동시상황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과거가 역사적  과거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 과거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다만, 현재적 상황에서 <그새끼>를 해명하기 위해 필요한 원인적 사건일 뿐이다.

(다)서술된 시간이 곧 소설의 시간인 예

최학의 <산행>은 소설의 길이와, 그 안에서 다루어진 내용의 길이가 같다. 여기서는 그러니까 과거로 되돌아간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말이 된다. 소설의 시간인 지난해 봄부터 가을까지, 환음사.서울.운흥산에서 벌어진 일들이 모두 소설의 현재적 시간이 되는 것이다.

지난해 봄, 환음사에서, 농사꾼 양씨와 주정뱅이 하씨를 만나 가을에 함께운흥산의 호랑이를 잡으러 가기로 약속한다-서울로 돌아와 여름 내내  호랑이 잡을 생각만 한다-가을이 왔다. 다시 양씨와 하씨를 만나 함께 운흥산으로 호랑이를 잡으러 갔다.

                                        (최학, <산행>)

이 소설이 할애한 시간은 이것이 전부다. 결국 호랑이를  잡지도  못하고, 호랑이의 환상을 보는 것만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나는데, 그래도 이만한  스토리가 형성되기까지는 그 현재적 시간 속에서나마 무수한 날들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되돌아간 시간,  다시 빠져나온 시간도 없거니와, 다음과 같은 현재적 시간의 진행이  있을  뿐이다.

우리일행은 새벽에 산을 탔다-아침 안개가 산봉우리를  가리고  계곡까지 채웠다-한낮이 되면서 산중의 안개는 씻은 듯이 벗겨졌다-야영은 삼선암 아래에서 했다-달이 뜨고 있었다-이튿날은 황개골까지 나아갔다-벌써  나흘이 지났어.

                                        (최학, <산행>)

이렇게 보면, 소설은 마치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시간의 연속인 것  같기도 하다.

(라)환각적으로 서술된 시간의 예

오정희의 <저녁의 게임>은 흡사 시침(時針) 속의 분침(分針)처럼, 분침 속의 초침처럼, 아주 미세한 시간의 흐름을포착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소설의 상황은 원래 <모든 것이 어제와 다름없는>고여 있는 일상의  시간이 었다. 이렇듯 고여 있는 듯한 시간 속에서도 미세한 시간의 흐름이나마  그것들은 정확히 표시되고 있다.

부엌 선반의 시계는 다섯시 반-여섯시가 되어가고  있었다-아마  희망음악 시간이었다 보았다-십 분쯤 듣다가 스위치를 눌러 끄고-가을해는 짧아 저무는가 싶으면 이내 어둠이 몰려온다-불을 켤까요? (오정희, <저녁의 게임>) 두어 시간에 불과한 짧은 동안이고, 그 안에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는  것같지 않지만, 그러나 그 시간은 심각했으며, 또한 정확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미세한 시간 속에서나마 시간은 다시 십 년 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데, 여기서 그것은 환각적으로 처리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그애가 휘파람소리로 나를 찾아오던 것이 십 년 전의 일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랜 꿈속의 일인가. 늦은 밤 들판을 가로질로 오는 휘파람소리에 문을 열고 낙면 그애는 마른 꽃냄새를 풍기며 서 있었다.

                                    (오정의, <저녁의 게임>)

<저녁의 게임>의 현재적 시간은 아버지와 딸이 벌이는 밤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서술된 시간은 십년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것은 그 자리에는 없는 아내의 시간이고, 아들의 시간이기도 하다. 아버지한테는 아내이고 아들이기도 한 그 시간이 딸한테는 동시에 어머니이고, 오빠이기도 한데,  그 가족관계의 시간이 여기서는 침묵으로 일관되면서, 다만 아버지와 딸이  환각적으로 공유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시간은 소설이 굴러가는 바퀴의 궤적이며, 또한 소설의 인과적 구성원리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어떤 스토리도  진행될 수 없으며, 그것은 붙박이 정물화거나 아니면 환등기의 화면이 되고 말  것이다.



--제 8장: 소도구와 복선, 또는 삽화

소설이 사건의 연속체라는 말을 자주 썼지만, 사건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소도구와 복선과 삽화라는 것이 있다. 이것들이 서로 어울려 사건을  만들기도 하고, 사건과 사건을 엮어내기도 하고, 의미를 형성하기도 한다. 사실 사건은 소설의 뿌리와 줄기라고 할 만큼 중요하긴 하다.  그러나  그 사건은 알고보면 다시 많은 소도구들로 이루어졌다. 소도구는 사건에  비하면 아주 작은 단위여서, 소설의 가지나 잎사귀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한편 그것은 사건의 세포조직과도 같은 것이어서, 사실 소설 전체가 수 없이 많은 소도구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한 소설 속의 사건은 언제나 단선(單線)이 아니다. 설령 그 것이 쇠사슬이나 목걸이처럼 어떤 연결고리를 가진 선형(線形)이라  하더라도, 그 원래의 스토리 라인에다가 또 하나의 스토리 라인이 철길처럼  평행선을 긋기도 하고, 새끼줄처럼 꼬이기도 하고, 매듭처럼 얽히기도  하면서, 소설은 형성된다. 그 원래의 스토리 라인 외에, 겹치거나 꼬이거나  평행을 이루는 다른 스토리 라인을 우리는 복선(伏線)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또한 삽화는 글자 그대로 중간에 끼워 넣는  이야기다.  끼워넣는 이야기니까, 짧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를 갖고 있다. 짤막한 이야기가 긴 이야기 사이사이에 끼어들면서 그것들은 부분과 전체를 통합하고, 장차 큰 주제를 암시하고, 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소도구와 복선과 삽화는 어쨌든 소설의 중심 사건은 못 되거니와 중심  스토리 라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없이 소설은 진행될 수  없는데, 그만큼 이들 보조 역할은 중요하다. 소도구 없이 사건은  설명될  수 없거니와, 복선 없는 스토리 라인은 무의미한 사건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소도구와 복선과 삽화는 모두 스토리 진행에 관계된 것들이지만,  또한 의미 형성에 관계된 것들이기도 하다.


(1) 소도구

  1. 소도구의 특징은 이런 것이다.


첫째, 소도구에 대한 설명이 곧 사건 전개다. 그러니까, 이 ㎖ 소도구는 사건의 중심 소재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단편<短刀의 집>은 주로  도둑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래서 그런지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개의  도난사건을 설명한다. 그 여러개의 도난사건을 설명하자면 또 여러개의  잃어버린 물건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들이 소도구다. 이번 겨울, 자세히는 설이 되기 직전에 우리 마을에서는 모두 세 건의  도난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병천, 단도의 집)

도둑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 세 건의 도난사항을 각각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제일 먼저 당하기도 했지만 가장 큰 도난품은 역시 이봉이 아저씨네  황소였다.
2)그 일이 있은 지 닷새도 못 되어 이번에는 남진이네가 닭을  도난당하였다. 네 마리 전부였다.
3)마을에서 세번째 도난을 당한 게 바로 우리집이었다. 그런데 도난품치고는 좀 묘한 것이었다. ....도난품은 찹쌀 한 말분의 가래떡이었다....그 새벽에 우리 식구들은 간밤 어느 때 우리 집 암소가 없어진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 세 건의 도난사건을 설명하는 동안 소설은 벌써  꽤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이 ㎖ <황소>와 <닭>과 <가래떡>과 <암소>는 이  소설의  소도구다. 물론 그것들 모두가 다 이 소설의 중심 소재는 아니다. 그 아운데 장차 <황소>에 대한 이야기로 압축될 것이다. 그래도 닭과 가래떡과 암소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다. 황소 이야기라고 황소에 대해서만 내내 빙빙 돌 수는 없다. 황소를 이야기하자면 황소 아닌 것들을 더 많이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그것이 서술의 방법이요, 소설의 재미다. <단도의 집>은  궁극적으로  힘의 지배를 문제로 삼고 있는 소설이다. 힘의 지배를 문제삼는다면서, 도둑  이야기를 들먹거리는 것 자체가 또한 서술의 방법이요, 소설의 재미다.

둘째, 소도구의 수량은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 알맞게 조정되어야 한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면 좋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이 열거하다보면 자칫 지루해질 위험이 있다. <단도의 집>은  세 건의 도난사고에서 일단 설명을 멈췄다. 그리고 장면을 바꾸어 다시 교실에 서 가능한 도난사건을 열거라고 있다. 필요하다면, 이처럼 장면을 바꾸거나 사건의 성격을 달리해가면서 소도구를 활용하는 것도 좋다. 흥부가 박을 아홉 통이나 탄 것도 소도구를 잘 사용한 좋은 예다. 반드시  아홉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필요에 따라서는 세 통만 타고 곧 끝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잔칫집에선가 돈을 많이 주고 신이 나면 열한 통이라도 탈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아홉통인 것은 아마 흥부가 갖고 싶은 물건을 다 갖게 하려고 그랬던지, 아니면 자기한테 할애된 시간을 다 채워야 했기  때문인지,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셋째, 소설 속의 소도구들은 각각 별개의 사물인 것 같지만, 그러나  비슷한 이미지를 갖는 것들이어야 한다. 황소와 닭과 가래떡은 각각 별개의  것이지만, 크게는 농촌에서 가능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농촌에서는 아주 중요한 것들이다.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충분한 사건이 될만한 것들이다. 그러나 장면이 바뀌거나,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바뀌면 그때는 소도구의 성격도 바뀌어야 한다. 이야기가 두 갑이를 중심으로 마을에서 벌어질 때는 황소와 닭과 가래떡과 같이 먹고 사는 문제에 해당하는 것들이었지만, 그 다음 인숙이와 또식이 같은 어린  아이들 세계로 옮아올 때는 소도구도 바뀌었다. <성적> <단무지> <기성회비>,

그것들은 아이들 세계에서 가능한 것이고, 또한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성적과 기성회비는 그들의 실존에 관계된  일이지만,  단무지 또한 자라는 아이들의 군것질로  ㎖놓을 수 없는 물건이다.

<단도의 집>은 궁극적으로 힘의 지배를 문제삼고 있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엉뚱하게 도둑 이야기만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의미있는 사건이 뒤바뀌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황소를  잃어버린 사건이 생기자 두갑이가 누명을 쓰게 되고, 기성회비를 잃어버린 사건이 생기자 또식이가 누명을 쓰게 된다. 그것은 사태의 역전이다. 사태가  역전되면서 어떤 의미가 형성된다. 우리집 황소를 잃어버렸을 때는 아버지의 힘에 의해 두갑이 도둑이 되었지만, 두갑이 딸인 인숙이 기성회비를  잃어버렸을 때는 인숙의 힘에 의해 내가 도둑이 된다. 그것은 누가  도둑이고,  도둑이 아니고가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도, 두갑이도, 그리고 인숙이도, 나도,  도둑은 누구나 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힘이 있고 없음의  문제일  뿐이다.

힘이 없으면 좀도둑도 큰 도둑이 될 수 있지만, 힘이 있으면 큰 도둑도  전혀 도둑이 아닐 수 있다. 이 엄청난 세상 이야기를 그 자잘한 소도구에  얽힌 이야기들로 해결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2.그런 소도구의 기능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소도구는 경우에 따라 이야기의 중심현장이 될 수도 있다.
전주에 온 그는 구(舊)자가 붙은 지명이 너무 많아서 약간  어리뻥해졌다. 구미원 탑 사거리나 구 형무소, 구세무서, 구전북일보, 구한국은행, 구케이 비에스, 구엠비시 같은 것들은 그가 전주에 오기 이전에 이미 기억 속의 고유명사로 자리를 잡은 것들이었다. 그가 직장을 잡아 온 이후에 생긴  이름도 꽤 많은 편이었다. 구역, 구시청, 구대학병원 등등이 이제 막 기억 속으로 자리를 넘겨주려는 그런 이름들이었다. (중략) 그러나 새롭고  오래되고가 문제되지 않는, 예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몇 건물이나 명물이  도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어 산천이 변해도 요지부동일 것 같은 두터운 시간의 층이 버티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다. 경기전이니 풍남문 같은 조선식 건물이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물론, 고색창연한 전동성당이며 중앙 성당의, 햇살에 오래 익은 피부 같은 벽돌색의 도시 분위기를 안정되게  잡아주고 있었다. (중략) 그 가운데 그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다른  지역에 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거창한 객사 건물이었다.

                                (우한용, 客舍에 누가 머무는가)

윗글에는굉장히 많은 관공서나 유적들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들이  모두 이 글의 소도구는 아니다. 그것들은 장차 이 소설의 소도구가 될  <객사>를 끌어내기 위한 말의 순서에 불과하다. 이 소설은 원래 전주의 후한 손님 접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야기는 전주와 부산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큰 줄기와, 또 전주 안에서만 벌어지는 작은 가지들로 이루어지는데, 그 것들이 모두 객사를 중심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객사는 이 글의 중요한 소도구다. 객사 앞에서만 그들은 만난다. 따라서 이 소설의 모든 사건은 객사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다. 그것은 옛날의 손님을 맞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오늘의 손님을 맞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객사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만나기도 한다. 소도구는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고, 그것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기도 하여 화자가 그것을  설명하기도 하니까, 소도구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요소일 뿐이다.

둘째, 소도구는 주제를 형성해주기도 한다.
단편 <美製 고양이>는 외제 병에 걸린 아내 때문에 갈등을 겪는 어느 부부의 이야기인데, 그래서 그런지 그 안에 등장하는 것들은 모두 미제  고양이와 미제 커피 같은 외제품들이다. 고양이를 너무 애지중지한 나머지 남편과 불화가 생겼고, 그 고양이 때문에 아내는 동네 여자와 싸우기도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건 그 자체이기도 하고, 또 그것이 곧 주제를  형성해주기도 한다.

우리 집 고양이가 그게 미국 고양이거든요. 그래서 아무 씨나  받고  싶지않아서 자꾸 따라다니며 치근덕거리는 그 고양이를...

                                        (조건상, 美製 고양이)

아내는 결국 그 미제 병 때문에 파멸을 초래한다.

셋째, 추상적인 것도 소도구가 될 수 있다.

<이 다음에 우리는 누구의 기슴에 따뜻한 별빛으로 남을 수 있으랴>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슨 소설이다. 여러가지 회상을 통해  어머니의 모습은 하나의 이미지로 형성되는데, 이 경우는 소도구가 눈에 보이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마음이나 그리움과 같은 추상명사라는 점이 특징이다.

어머니는 평소에 말씀하시곤 했다.
"내가 죽거든 반드시 화장을 하거라."
"왜요?"
"땅에 묻혀 썩을 일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한용환,이 다음에 우리는 누구의 가슴에 따뜻한 별빛으로 남을 수 있으랴) 이것은 어머니의 결벽성을 대화로서 설명해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머니는 불결한 걸 참느니 차라리 가혹한 가난을 견디기를  기꺼이  택하시는  분이다.> 이 말을 증명하는데, 소도구로 화장(火葬)이 요구되었다. 그렇다고 이 화장에 대한 이야기가 전체 소설의 중심 스토리 라인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결벽성만을 설명해내는 부분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다. 이 점에서 소도구라는 말이다. 그러자 어머니의 결벽성은 곧 자식과 나의 불결함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그 불결함을 설명하기  위한  소도구로 <술>과 <외박>, 그리고 <게으름> <더러운 몸>이 등장하는데,  그것들  모두추상명사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소설은 <어머니>라는  대전제가 소설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다른 중심 스토리 라인이 필요없다. 다만, 여러 개의 추상명사들이 동원되어 그것들이 내포하는 어떤 이미지로 하여금 어머니의 이미지를 구축하게 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A.어머니는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셨다.
저 눈부신 들판과 아름다운 여인이 내 것 혹은 나의 아내가 아닌 들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런것들이 이렇게 있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족하고  고마울 뿐. 내가 살아 있고, 그래서 내 눈과 가슴으로 저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일만으로도 충분하고 충분할 뿐.

B.어머니는 나를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주셨다.
죽는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란 말이냐. 어머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나 자신도 의식하지 않은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맞는 세계, 어머니가 수락하는 체험을 나라고 감당해서  안 될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C.어머니는 하늘의 <별>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들판길을 거닐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서서는 하늘로 고개를 돌렸는데, 나는 거기서 한 아름다운 별빛을 본 것이었다.  (중략) 나는 별빛을 올려다보고 선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요컨대 나는 더이상 어머니의 행방을 수소문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내 가슴속에 이렇게 살아 계시듯, 아 다음 우리는 또 누구의 가슴에 따뜻한 별빛으로 남을 수 있으랴.

돌아가신 어머니가 하늘의 별이 되기까지, 그것이 이 소설의 전부인데, 그 럼에도 불구하고 별이 이 소설의 중심 스토리 라인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별은 여기서 불쑥 뛰쳐 나왔다. 그리고도 그것이 어머니의 완성된 이미지를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은 본래의 별이 가졌던 숭고한 이미지 때문이다.  소도구의 위력이 이만하다.




제  목 : 8장/ 소도구와 복선, 또는 삽화 -2-      

(2) 복선 깔기


<단도의 집>은 도둑에 얽힌 이야기지만, 이밖에도 <칼>에  대한  이야기를 한 자락 더 깔고 있다.
들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놓고 나는 잠시 주머니 속에 숨겨둔 칼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내가  무엇보다도 아끼는 물건이었다. 한 손 안에 꼭  들어오는 칼은 충성스러운 부하처럼 내가 단추를 누르기만 해도 섬뜩하고도  위협적인 자세로 칼날이 펼쳐지며 내 위엄을 대신하곤 하였다.

                                        (이병천, 단도의 집)

이 칼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도둑 이야기보다 먼저 나온다. 그리고 이  소설을 끝낼 때도 칼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러니까 결국 이 소설은 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칼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 나는 셈인데,  그래도 이 소설을 칼에 대한 이야기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둑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도둑에 관한 이야기를 뭐라곤가 길게 이어가면서 그래도 칼에 다한 설명을 이 소설은 놓치지 않는데,  이런 이야기 자락을 원래의 스토리 라인에 대한 복선이라고 한다.

1.복선은 주제를 암시한다.

본래의 스토리 라인이 단순한 사건의 연속이라면, 복선은  그  사이사이에 끼어들거나,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루면서 사건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주제를 형성하기도 한다.

단도(短刀) 또는 깨끼칼. 우리는 인숙이네 아버지를 그렇게 불렀다.  스스 로 5.16출신이라고 밝히는 그는 칼을 다루는 솜씨가 놀라웠다. 그렇다고 그가 무슨 망나니 칼춤에 대단한 솜씨를 가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 뼘 길이가 채 못 되는 조그만 손칼 하나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복선은 중간에 끼워 넣은 예다. 중간에 끼워 넣었더라도, 그것은  삽화가 아니다. 삽화는 짧지만, 그것대로 하나의 독립된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윗글은 자체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앞뒤로 이어지는 중심스토리 라인 사이에 끼어듦으로써 그 상징적인 의미를 더할 뿐이다. 두갑이는 칼을 품었다. 두갑이뿐 아니라, 또식이도 칼을 품은 것은 이미 인용했었다. 두갑이나 또식이 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가슴에 칼을 품는다.  이 때 칼은 진짜 금속성의 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징적 도구일 뿐이다.  그것은 욕망의 칼이기도 하고, 복수의 칼이기도 하고, 원한의  칼이기도  하고, 자기 방어의 칼이기도 하다.

2.복선은 여러 차례 끼어들기를 반복하면서 하나의 의미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중심 스토리 라인과 만날 때 상징적이다.

그런데 단도 그는 이상하게도 칼이 없을 때면 맥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누구에게 칼을 빌려주지도 않았지만 장난삼아 칼을 빼앗끼라도 하면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해버리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여러 차례나  지켜보았다.  그의 과거에 대한 그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인지 아니면 정반대로 그  칼은 그에게 도구 이상의 무엇, 예를 들면 꺼내어 들고 다닌다는  토끼의  간따위일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농담하기도 하였다.

이 때칼은 힘의 상징이다. 진짜 힘이 아니라, 힘 없는 사람이 자신을 보호받을 수 있다고 믿는 보호막으로서의 힘이다. 인간에게 진짜 힘이라고는 아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없으니까, 권력이나 폭력의 힘을 빌려  힘  있는 척해 보이려고 한다. 칼이 그 힘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준다. <단도의  집>은 원래 힘의 지배를 다룬 소설이다. 도둑의 이야기로 그 주제를 형성해나가는 데, 복선인 칼은 이야기 중간중간에 삽입된다. 그리하여 원 줄거리가  내포하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충해준다.

또식이 너 이놈, 이번에는 몇등 혔지? 일등을 기집아헌티 넘겨주고도 그게 사내자식들이여? 내가 늬 불알을 발러버릴란다. 그러면서 단도가  주머니에서 손칼을 빼고 있을 때면 나는 수치보다 적개심이 끓어오르곤 하였다.  씨이발, 인숙이 그 기집아는 나보다 두 살이나 더 많응게 그치! 그때마다  나는 칼을 갖고 싶었다. 언제든지 기회만 오면 단도 것보다 날카롭고 멋진 것으로 간직하리라고 작정하기도 했다.

하나의 소설은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스토리 라인을 갖는다. 이 때 중심  스토리 라인 외에다른 스토리 라인은 모두 복선이다. 중심 스토리 라인은 또 그 안에 두 개 이상 여러개의 소도구를 갖는다. 그리고 그 소도구들 사이사이에 복선이 끼어든다. <단도의 집>에서 칼은 하나의 스토리 라인으로 연결된 연속체가 아니라, 군데군데 끼어든 이미지 조각들이다. 소도구인 <암소> 사건이 끝났을 때 한 번 끼어들었고, 또 <기성회비>도난사건이 생겼을  떄도그것은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칼로 이 소설을 끝맺는 것이다.

이제 이 칼을 어쩌할 것인가. 나는 오래 망설이면서 걷다가 드디어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칼은 아무래도 내게 소용되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있는 힘껏 그 칼을,눈밭 멀리 던져버렸다. 섭섭함보다 가슴에 가득 피어 오르는 따뜻함으로 내게는 당장의 겨울 저녁바람이 조금도 차갑지  않았다. 언젠가는 틀림없이 인숙이네 아버지도 그 단도를 버릴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힘의 지배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작가의 믿음이다. 처음부터  이 소설이 힘의 지배를 문제삼고 있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미 지적한 바 있었다. 그 가운데 도둑 이야기는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라러니컬한  상황을 사건으로 보여준 것뿐이다. 상황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작가의 믿음을  주장하기는 어렵다. 마침내 <칼>이 그 믿음을 말해준 것이다. 복선의  기능이란바로 이런 것이다.

3.복선은 감정의 상태를 대신해주기도 한다.

우리가 함께 기억하는 소설 가운데 복선을 사용한 예로 <메밀 꽃 필 무렵>을 들 수 있다. 허생원의 인생역정과 대조되는 나귀의 생애가 바로  그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충분히 검토된 바  있지만 서술상의 편의를 위해 다시 한 번 그 맥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A.허생원이 충주집을사이에 두고 동이한테 애정의 갈등을  일으킨다.  그결과 허생원이 동이를 한 대 때리지만 동이가 맞서지 않음으로써 그 관계가 악화되지는 않는다.

B.동이가 나귀의 발작에 대한 소식을 허생원한테  전해옴으로써  허생원의 갈등이 인간적 친화감으로 발전한다.

C.허생원이 나귀의 피폐한 모습과 대조되면서 나귀와  허생원이  동일시된다.

D.나귀의 발작이 암샘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동시에 그것은 허생원의 충주집에 대한 본능적 욕구의 표현이라는 점으로 일치된다.

E.그 본능적 욕구가 메밀꽃 핀 바에 단 한 번의 과거체험으로 구체화된다.

F.동이가 그 체험의 결실임이 밝혀지고, 나귀새끼로 비유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나귀의 동물적 본능이 어떻게  인간의  행위와 연결될 수 있는가이며, 그것이 어떻게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는가이다. 충주집에 대해서 암샘을 했다거나 새끼를 얻은 것은 나귀가 아니라  허생원이었다. 그러나 허생원이 아이를 낳았다고 말하지 않고 나귀한테  비유를 한 것은 확실히 복선의 효과를 노린 작가의 의도였다. 이효석의 이런 점은 그동안 <동물적 성본능의 옹호>라는 시각에서 매우 만만한 비판적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메밀꽃 필 무렵>의 경우 그런 비판은 너무 선입견에 압도된 편견이다. 이 소설의 이중적 구도가 그 점을 해명해준다. 태초부터 한 생명의 탄생이란 매우 신비스런 일 "지만 그것이 웬만큼 필연적인 조건을 구비하지 않는 한 그것은 통속적인 이야기로 타락할 위험성이 없지 않다. <허생원이 이십 년 전에 우연히 어떤 처녀와 단 한번의 인연을  맺었는데 그게 그만 결실을 거두었던 모양이더라 오늘 어떤 청년을 만났는데 그게 그만 그의 씨앗이더라>는 정도의 스토리로는 우리는 전혀신비로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평범한 내용으로부터 신비로움을 창조해내기  위해서 작가는 처음부터 완벽한 구조적 배려에 힘썼다. <여름>날 <달밤>과  <바람>과 <메밀꽃> 등이 그런 배려 중의 하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허생원의 <못나고 뒤틀린 반생>이다. 이런 인물이 갖는 인간적인 면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늙고 피폐한 육신과 함께 못나고 뒤트린  반생으로 살아온 허생원의 생이란 너무 무가치하게 여겨진다. 그것은 나귀 또는 하찮은 짐승만큼이나 값이 없을 수도 있다. 한 마리의 짐승이 죽어  없어져도 그만인 것처럼 허생원은 그냥 죽어갈 수도 있었다. 이런 하찮은  존재로 하여금 젊음을 지향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동질한 점에 이 작품의  건강성이 살아 있다. 충주댁에 대한 애정적 욕구, 젊은 총각에 대한 애정적 질투, 나귀로 비유된 애욕의 표현, 그리고 성서방댁 처녀에 대한 체험으로서의 구체성, 나아가서는 동이로 이어지는 결실, 이것들은 모두 허생원의 늙음과  대비되는 젊음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늙고 하찮은 존재로 설정된  허생원의 애욕은 바로 그런 자신의 존재를 극복하고자하는 생명에의 의지였다. <메밀 꽃 필 무렵>은 구조를 단순히 사랑과 혈육의 해후라는 운명의 신비로운  트릭이라고만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복선  때문이기도 하다.

(3) 삽화

소도구나 복선과는 약간 성격이 다르지만, 중심 스토리 안에 끼워 넣는 이야기 형식으로 삽화라는 것이 있다. 삽화는 짧지만, 그 자체기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상징적이거나 우화적인 기능을 갖는다. 그 때문에 소도구가 일회성 소모품이기 쉬운 데 비하여 삽화는 단 한번 등장하고도 항구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작품전체의 주제를 암시하고 Ð나 우화적인 상징성이 강하다. 이런 점에서 삽화는 모든 소설에 다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 만 적절히 사용된다.

첫째, 삽화는 소설의 중심 이야기와는 이질적이면서도 결국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단도의 집>에서는 딱 한차례만 삽화를 끼워 넣고 있다. 아마도 실수였을 테니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말아라.  옛날에  알렉산더라고 하는 임금이 해적을 사로잡아 벌주려고 했더란다. 왜 그대는 도적질을 일삼아 바다를 어지럽히는가? 이 호통은 해적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오히려 대꾸했다고 한다. 당신은 왜 내게만 도적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당신과  나의 차이는 힘이 있고 없음뿐인 줄 모르시오? 당신은 분명 큰 도적임에는 틀림없지만 군대와 무기의 힘으로 그것을 감추고 나는 힘이 모자라 당신의 포로가 되었을 뿐입니다. 즉 나는 작은 배를 타고 남의 물건들을 훔쳐 해적으로 불리고 있는 데 비하여 당신은 큰 함대와 군대를 이끌고 약탈을 하니 대왕이라 불리는 것이오. 이렇게 말하지.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란다.

      (이병천, 단도의 집)

이것은 인숙이 기성회비를 도난당한 사건에서 내가 완전히 도둑으로  몰리고난 뒤에 곧바로 끼워 넣은 삽화다. 그리고 그 훨씬 전에 인숙이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한테 이미 황소도둑으로 몰려 있었다. 그것들은 둘  다  사실이 아니고 억울하게 누명을 둘러쓴 데 불과한 것인데, 이처럼 힘이 있고  없음에 따라 도둑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를  설명하는데 위 삽화가 적절한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어떤 사실을 사실대로  그냥 화자가 설명해주기만 하면 그것은 논리다. 그러나 소설은  논리가  아니다. 논리가 아닌 글을 논리적으로 해명해줘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  삽화는 필요하다. 우화나 상징의 효과는 원래 우회적인 논리다. 그 우회적인  논리를 택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작중인물을 통해서 행동으로 표현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단도의 집>에서는 인숙이가 바로 그 행위의 당사자인데,  인숙이 아닌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우화를 말하게 한 것도  여기서는  엉뚱하다.삽화는 이처럼 제삼의 인물한테서 이야기 될 수도 있고, 그만큼 원래  이야기와는 성격도 판이하게 다르다. 이 소설의 삽화는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다. 그것은 황소나 닭이나 가래떡이나 성적이나 단무지나 기성회비와  같은 소도구들로 이어지던 시골 이야기와는 딴판이다. 그래도 그 두  개의  서로다른 이야기는 동질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그것은 오로지 도둑  이야기가 갖는 상징성  ㎖문이다. 삽화는 이처럼 동질성 속의 이질적인 이야기여야 하며, 그 이질성 속에서도 동질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어떤 삽화는 간단한 일회성의 소도구 같지만, 작중인물의 성격을 형성해주기도 한다. 다음은 단편 <황혼의 집>의 한 장면이다.

"나도...어떤 때는 엄마를 죽여버리고 싶단다. 가끔 그래. 어느  ㏄가 나느엄마를 죽이고 말 거야."

그늘 속에서 빛나는 경주의 두 눈알은 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나는 경주가 제 엄마를 죽일 수 있다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애는 능히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아이였다.

                                    (윤흥길, 황혼의 집)

이런 글은 작중인물의 잔인한 성격을 설명하는 대목인데, 만일 이 글이 여기까지만 설명하다가 그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버렸다면,그것은  화자의 관찰과 판단을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없어서 아주 무의미한 말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삽화가 그런  염려를 말끔히 씻어준다.

언젠가는 그애는 생쥐를 사로잡아서 등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적이 있었다. 그때 생쥐는 불덩어가 되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입을 쩍 벌리면 금방 죽고 말았지만, 경주는 눈을 부릅뜨고 살려고 몸부림치는 짧은 순간을 지켜보다가 이렇게 고함질렀었다. <겨우 한 걸음밖에 못 갔어!  난  적어도 다섯 걸음은 갈 줄 알았는데.>

이런 삽화는 한번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막 인물을  등장시키던  판이니까 너무 많은 삽화로 하던 이야기를 제자리걸음시킬 필요까지는 없지만,그래도 두 개쯤은  꼭 필요하다.

뿐만아니었다. 산 채로 참새의 털을 뜯기도 했다. 경주는  발가숭이가  된 참새의 한쪽 날개와 두 다리를 뚝뚝 부러뜨려 놓아주고서는, 바보같이 도망칠 줄도 모른다고 발을 구르며 화를 냈었다.

이때 삽화를 열거하는 방법으로는 <언젠가는...> <뿐만아니라....>를 사용 한 것도 참조할 사항이다. 그것은 강조의 화법이다. 물론 그 아이가 어머니를 죽이지는 않는다. 다만, 어머니를 죽일 수 있을만큼 그 아이가 표독하다

는 걸 이처럼 예화로써 제시하는데, 그것은 일회적이지만 작중인물의  성격형성을 위해 필요하다.

셋째, 어떤 삽화는 짧지만 소설의 중심 스토리 라인을 능가한다.  <새들은 兵營에서 죽지 않다>가 그 예인데, 부대 안에서 벌어지는 긴  이야기와  그안에 삽입되는 짤막한 이야기가 교차하는데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부

대 안에서 이 하사가 사고를 쳤다. 감옥에 보내지 않는 대신 그는 장기  복무자가 되었다. 감옥에 가는 것이다, 장기 복무자가되는 것이나, 그  어느 것도 그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부대 안에서의 이야기가 다 끝나갈  무렵, 이 소설은 딱 한차례 삽화를 끼워 넣는다.

내가 모포 속에 몸을 눕히고나서도 한참만에야 이 하사는 돌아왔다.  그리고는 소리죽여 오래 울었다. 나는 그 울음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리는 꿈속에서 그들을 만났다. 입대를 해. 그러면 그 조직에서 발을 뺀 걸로 인정해주지. 아니면  감옥엘 가든가. 그들은 몇번이고 되풀이해 말했다. 이것도 자네 아버지를 보아서 베푸는 특혜야. 자, 입대를 할 텐가, 감옥엘 갈 텐가. 이하사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꿈 속에서 나는 울지 않았다.

                                  (고원정, 새들은 兵營에서 죽지 않다)

이것은 그가 입대하기 전에 있었던 군대 밖의 사회상이다. 데모대에  가담했다가, 감옥에 보내지 않는 대신 입대할 수밖에 없었던 화자의  입장이다. 전체 군대생활에 비해 군대밖의 이 삽화는 아주 짧은 편이다. 그러나, 이 삽화가 제시됨으로써, 이 소설은 군대 안의 이야기가  아니라, 군대 밖의 이야기가 더 중요한 문제로 바뀌어버렸다. 삽화의  효과는  이런 것이다.



제  목 : 9장/ 표현과 문장                        

(1) 소설 문장의 기본 입장


소설 문장은, 우선 그것을 문법에 맞게 써야 한다는 점과, 그러면서도 한 편 그 문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두 가지 상반된 논리 때문에 어려움이 생긴다.

나는 한 번도 서부에 가본 적이  없다. 서부는커녕 요즘 그 흔해빠졌다는 외국 나들이조차 한 번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가슴속에는 아련한 향수 처럼 서부의 그 뻘건 황토 계곡과 들소들이 떼를 지어 달리는 광활한 들판과, 그위로 커튼처럼 드리워져 내리는 붉디붉은 노을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김영현, 내 마음의 서부)

이 글은 문법적으로 정확하다. 그런가 하면 그 논리 앞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흔적도 역력하다. 서부에 가본 적이 없다면서, 그는 마치 가본 것처럼 그것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더구나 그 생생함이란 것도 다분히 주관적이다.  <아련한 향수>이나 <커튼처럼 드리워져>가 그 예다.  그것들은 서부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순전히 작가에게 드리워진 개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문장은  문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서, 그 논리 앞에 비교적 자유로운 글이다. 소설 문장은 온통 이런 자유로움 투성이다. 자유로움이란, 문법의 규칙에 대한 일종의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 벗어남이 이유있는 벗어남일 때,  그 글은 맛과 개성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이유없이 벗어날 때, 그것은 버릇없고 알지 못할 글이 되고 말  것은 뻔한 이치다.

소설 문장은 맛나고도 개성있게 써야 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문법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 자유로움의 폭을 크게 누린 문장이다. 문법의 문제뿐이 아니다. 소설 문장은 그 서술형태마저 어떤 논리의 틀을  갖춰야 한다. 막연한 감상의 나열이 아니다.  듣고 대답하는 과정이 그 안에 있어야 하며, 향하여가는 진술의 방향이 명확해야 한다.  다만,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상상이며, 논리 그 자체가 아니라 정서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내가 늙은 것인가. 비 내리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었다. 소년시절의 일이다. 고향의 할머니는 언제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여름방학에 들었던 말을 그는 또 겨울방학에 들었다. 작년에 한 말을 내년에도 또 듣게 만드는 사람 그것이 노인이라고 그는 그때 일기에 적었었다. 그러나 그 후 더 자랐을 때 그는 그 생각을 버렸다. 늙은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사람이라면  젊은이는 아무것도 들려줄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그러므로 그것은 누구의 잘못 도 아니다라고. 그렇다면, 그때의 생각이 아직 유효다면 나는 늙지 않았다. 되풀이한다는 것은 늙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한수산, 날개와 사슬)

이런 진술은 비교적 논리가정연하다. 얼핏 보기에 철학적인 글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글을 논리적인 글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형식논리에도 불구하고, 진술의 내용이 주관적이고도 정서적이기 때문이다. 소설  문장이란 그런 것이다. 논리적인 것 같으면서도 비논리적이고, 또한 비논리적인 것같으면서도 논리적인 바로 그 논리와 상상의 거리를 소설 문장은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요구가 지나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올 수도 있다.

퇴폐 이발소에서 일하는 여자 면도사의 5.2퍼센트가 매독에 걸려 있으며 16.9퍼센트가 임질이나 비임균성 요도염 감염자라는/열차 6호 객차에서 20대 청년  1명이 총기 2자루를 들고 공포를 쏘며 승객 80여명을 상대하는/2백여 만 명의  매춘부 중 12-16세의 미겅년자가 약 80만명에 달하며/반정부 테러 행위로 최소한  37 명의 사망자와 수십명의 부상자가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는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전경들이 왜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느냐며/매춘부의 상당수가 그들의 부모에 의해 인신매매되고 있다고/과도로 자신을 위협하며 행패를 부리는 것에/격분하여 냉장고 위에 있던 망치로 동생의 머리를 때려 숨지게 했다는....(/선은 필자가 임의로 그은 것임) (박상우, 나는 이제 인간의 빙하기로 간다)

문장이 길어서 이만 줄이지만, 사실은 인용한 것의 두 배나  가야 이 문장은 끝이 난다. 이 글은 하나의 문장이지만, 성병과 테러 행위 등의 내용을 담은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문장을 동시에 섞어쓰고 있다. 이런 문장은 사실  논리적으로 어긋난 문장이다. 그러나 이런 소설을  엉터리라고 비난할 독자는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작가의 명백한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문장이고, 그래소 그것은신문기사의 홍수처럼 밀려드는 사건을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는데, 소설 문장에서 때때로 이런 논리의 의도적인 파괴는 필요하다.


(2) 소설 문장의 몇가지 조건

문법적인 글은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로움에 대해서는 가르칠 수 없다. 글의 자유로움을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은  곧 그 맛과 개성까지를 가르칠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가 오래오래 갈고 닦아야 할 창조적 행위요 사명에 해당된다. 그 나머지는 서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다음은 학생들의 습작 노트를 통해서, 우리가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된  문장의 예를 가려 뽑은 예문이다. 그 잘못을 거울삼아 문제점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형용사 또는 부사의 기능을 너무 믿지 말 것이다. 그것은 글을 아름답게  쓰고 싶어하는 초보자들이 자칫 저지르기 쉬운 실수다.

하늘은 옅은 회색 구름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아래 흉칙하게 구멍 뚫린  산들이 어깨를 마주하고 있다. 집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잎이 다 떨어져 형체만 남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빨갛고 파란 지붕을 가진 집들이 듬성듬성 무리지어 보일 것이다.   (습작노트)

이 글은 형용사와 부사를 잘못 사용하거나 함부로 남용하여 글이  산만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때문에 오히려 실감이 훨씬 덜해진 경우의 예다. 첫  문장에서, <옅은 회색 구름>과 <가득 차  있다>가 안 어울린다. 옅은 회색 구름일테면 둥둥 떠 다니는 게 좋겠고, 가득 차 있다면 차라리 먹구름이고 싶다.  먹구름은 가까운 것으로, 윗글에서는 이미  <회색>구름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옅은>이 필요없게 된 셈이다. 필요없는 형용사의 중복 사용은 피하는 게  좋다.

둘째 문장에서, <흉칙하게> 구멍 뚫린 산과 <어깨를 마주한> 모습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파헤쳐진 산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니까, <마주한>모습을 바꿔주는 게 좋다. 셋째 문장에서, <잎이 다 떨어져  형체만 남은 나무들>과 그것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모습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이 문장에서는 <전혀>나  <다>와 같은 부사의 쓰임새를 더 주목해야 한다. 그것들은 마치 집이 보이지 않는 상태나, 잎이 떨어진 정도를 아주 완벽하게표현해주는 말일 것 같지만, 오히려 불필요한 규제를 하는 셈이  되니까 빼는 게 좋다. 마지막 문장의 <듬성듬성>과 <무리지어>도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부사어의 사용인지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2>수식어 또는 비유의 언어를 활용할 것이다. 형용사와 부사는 어쨌든 아껴  쓰는 것이 좋다. 가능한 다 빼버리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고도 꼭 빼지 못할 경우가 있거든 그때 그 말을 직유법이나 은유법과 같은 비유의 언어로 대치시켜보라. 아니면 또다른 언어로 그 말을 수식해보는 것도 좋다. 그것도 문장의 맛과개성을 돋우는 하나의 방법이다. 사전에 수록된  형용사나 부사는 문법적 언어 또는 일상적 언어일 뿐이다. 문학적 언어가 아니다. 그 말을 다시 비유의 언어로 대치시켰을 때, 그리고 또다른 언어로 꾸며주었을 때, 그것이 바로 작가의 언어,  문학적 언어가 되는 것이다.

불면 날아가게 생긴 메조밥에 동치미뿐인  저녁상을 물리고나니 솔잎처럼 끝이 선 갯바람 소리에 실려서 달이 찾아들었다.

                                (이문구, 매월당 김시습)

그녀의 허벅에 내비치는 푸른 정맥들이 그려내는 불길한지도에 남자는 잠시 멈칫하며 하던 동장을 멈출는지도 모른다....손바닥에까지 배어나오는 격렬한 동물적인 갈증에서 해방되려는 것처럼 남자는 그녀의 살갗이 모공 밑에 무한히  얇은 겹으로 첩첩이 쌓여 있을 껍질을 벗겨내고 또 벗겨내려는 것처럼....

                                (최윤,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이쯤 되면 소설의 문장은 이제 일반적인 문법적인 문장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문법에 어긋난 것도 아니면서, 그것 자체가 온통 자유로움  투성이 다. 작가의 감정, 작가의 개성이 실린 이른바 작가 고유의 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조해일의 <매일 죽는 사람들>은 이런 문장의 묘미가 작품 전체의 특징을 이루는 좋은 예다. 가령, <날근 구두>가 하나 여기 있다고 하자. 그는 그 <낡음>에 대한 특유의 비유와 수식으로 구두 주인의 찌든 삶을 제시하려고까지 드는데, 이건 의인법에 가깝다.

-3년 동안이나 그의 체중을 견디어내준 검정색 구두
-이제 더 이상 참아낼 힘이 없다는 듯이 피곤하고 악에 받친 표정
-일찍이 초식동물의 가죽이었던 부드러움과 제화공의 숙련된 솜씨가 빚어낸  한때의 윤택
-사람의 발에 신겨진다는 것이 이제는 조금도 영광스러울 것이 없다는 듯,  <제발 이젠 좀 놓아주었으면>하는 지친 노예와도 같은 표정

이밖에도 함께 참조해볼만한 수식은 많다. <굶주린 아내>와 <음산한  거리>까지 도 그는 한마디 형용사나 부사로 처리해버리지  않는다. 모두를 그 말에 값하는 또다른 비유와 수식으로 바꾸어가면서 그 주제에 접근해 가는 것이다.

-아내는 그러나 구청의 민원담당계원과도 같은 성의없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내의 낡고 빛바랜 플라스틱 제품 같은 입술이열리면서....
-자동차 부속품 상점들이 찌든 어깨를 맞붚이고 있는 세기극장 건너편 길, 한낮 에도 해체된 부분품으로써만 오글쪼글 모여 있는 곳
-물론 일시적이러곤 해도, 극성스러운 속도와 그 속도가 가지는 폭력을 잠시 보 류당하고 있는 곳

심지어 그는 각각 다른 인물을 제시하는 방법에서까지 작가 특유의 수식어를 고안하여 쓰고 있다.

-다섯 아이의 아버지이고 한 여자의 남편이며 한 쌍의 늙은 부부에게는 아들인, 그래서 그들에게만은 소중하기 짝이 없을 김씨가....

-어린 두 동생의 형이며 한 과부에게는 아들인 박씨가....
-한때는 두 아이의 아버지였으며 한 여자의 남편이었으나 지금은 그 여자가  그 어깨에서 짐을 덜어주기 위하여 두 아이를 데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홀아비가 된, 따라서 그들 가운데서는 가장 짐이 가벼운 이씨가....

                                (이상, 조해일, 매일죽는 사람들)

소설문장은 어차피 작가가 만들어 쓰는 법이다.  사전에 실린 말들을 골라 쓰되 그것들을 새롭게 조립하여 쓰는 것이요, 남들이 만들어낸 문장을 참조하되  그것들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가는 것이다. 그 조립하고 피해가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비유법과 수식어의 활용이다.

3>서술어도 같은 말을 두 번 이상 반복하여 사용하지 말 것이다. 아무리 귀에 달콤한 말이라도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들으면 싫증이 나는 법이다.  하물며 재미와 호기심을 제일로 삼는 문학에서랴. 말의 변용, 그러니까 언어의  다양한 구사는 재미의 생명이요, 문학의 사명이다. 판소리는 노래한다.

열다섯에 얻은 서방 첫날밤 잠자리에 급상한에 죽고, 열여섯에 얻은 서방  당창 병에 튀고, 열일곱에 얻은 서방 용천병에  펴고, 열여덟에 얻는 서방 벼락 맞아 식고, 열아홉에 얻은 서방 천하의  대적으로 포청에서 떨어지고, 스무살에 얻은 서방 비상 먹고 돌아가니, 서방에 퇴가 나고, 송장 치기 신물난다.

                                (판소리, 변강쇠 타령)

모두 여섯 서방이 죽었다. 그래도 여섯 번을 죽고,죽고...가 아니다. 그것은 다르면 다를수록 신이 난다. 죽고,튀고,펴고,식고,떨어지고,돌아가고,그래서  각각 여섯 번이 다르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을 죽게 한 사건까지도 여기서는  각각이다. 첫날밤 잠자리에, 급상한에, 당창병에, 용천병에,날벼락에,포청에,비상에 그리고 열다섯 나이부터 무려 스무 살까지 병명과 죽은 해가 모두 각각이다.  이거야말로 화술이요, 문장의 묘미다.

4>피동형보다는 능동형 문장이 훨씬 낫다. <보였다>가 아니라 <보았다>여야  하고, <잡혔다>가 아니라 <잡았다>여야 한다는  말이다. 소설은 이야기다. 화자가 이야기를 끌고 가야지, 끌려가서는 안 된다.

옛날 어느 고을에 청상과부가 살고  있었다. 논섬지기도 있고 밭뙈기도 있어서 그럭저럭 살았는데, 남정네가 생나무 쓰러지듯 저 세상을 먼저 가버렸던 것이다. 홀아비 바지 속에는 이가 서말이고 과부 치마를 들추면 엽전이 세 가마라고,  바깥양반 잃은 과부댁은 꽤 부자가 되었다. 차차 살림이 불어나서 떠꺼머리 총각머슴을 부리게 되었다. 살점이 튕겨져 나오는 머슴애가 처녀나 매한가지인  홀어미 집에 노상 묵게 되었으니, 무슨 요라리가 한 일어나면 요상하지, 추야장장  긴긴 어느날 밤에,머슴놈이 바닷가에 게 기어가듯 안방에 침입하였다. 바야흐로  검은 방 속에서 하늘 알고 땅이 알고 저 알고 나 아는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김진악, 감칠맛 나는 손가락)

원래 우리 전통적인 이야기 방법은 이런 것이었다. 화자와 사건이 엄밀하게  구분되어 있고, 그 사건을 화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들려주는 식의 전지적  방법이다. 그것은 다분히 능동형이다.

허락한다면, 슬슬 잡담을 시작해볼까 한다.
잡담이라니? 붓을 한 번 휘둘렀다 하면 하늘을 흔들어 벼락을 일으키고 땅을 뒤집어 세상을 바꾸는 이가 열 손가락을 넘고, 그런 축에는 끼지 못할 망정 실록인 지 열전인지를, 하다못해 만담인지 야담인지를 펑펑 쏟아내어 하루아침에 문명을 날리고 팔짜를 고치는 이가 수두룩한 마당에, 기껏 원고지 천 매나 될까말까  한글 나부랭이 하나 끄적거리면서, 잡담이라니?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나, 천만의 말씀. 잡담이란 게 무엇인가. 사전에는 물론 쓸떼없이 늘어놓는 이야기라고 풀이 되어 있다. 잡담은 그러므로, 이를테면 먼지나 똥 같은 것이다.

                                (김석희, 섬에는 옹달샘)

이렇게 시작되는 화법도 사건에 끌려들어갈 위험성은 적다. 앞의 글처럼 과거의 사건을 지금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장차 무슨 일인가를 벌이겠다는 말인데,  그래도 화자가 사건 속에 파묻히지 않고  그것을 만들어갈 수 있는 전지적 화법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사건과 화자 사이에 아직도 객관적인 거리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피동형 문장은 이처럼 화자와 사건과의 거리가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면서부터 생긴 현상이다.

여름집은 아직 남아 있을까? 버스를 내리자. 수없이 되풀이해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 생각은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서울에 와서 친척집을 돌던  며칠 간에도 줄곧 머릿속을 맴돌아 나를 조바심에싸이게 했다. 나는 불안을 떨쳐버리려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변두리 길인데도 자동차는 연이어 눈앞을  스쳐가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는 꽤 높은 건물이 시야를 가로막고 줄지어 서 있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네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선, 붉은 별둘 교회와 회색 성당건물은 첨탑 높이로 교세를 겨루려는 듯 당당해 보였다. 둘레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여기가 정말 그 들판이 있던 자리인가. 그 집은 남아 있을까? 불안이 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잘 다둑여두었던 설움도  치받쳐 올라오려 했다.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보았다. 매연으로 가려져 부우옇게 탈색된 하늘이 내 온몸을 내리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전과 달라  보여 여름집을 향한 내 기대는 허사가 될 것 같았다.                         (학생의 습작노트)

각 문장의 끝말들을 주목해주기 바란다. <남아 있을까?> <생각이 떠올랐다> <조바심에 싸이게 했다> 심지어는 <둘러보았다>마저 <둘러보기 시작했다>이다. 그뿐이 아니다. <눈앞을 스쳐가고 있었다> <답답하게 했다> <당당해 보였다> <치받쳐 올라오려 했다> <매연으로 가려져> <탈색된 하늘> <하늘이 내 온몸을 내리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달라보여> <허사가 될 것 같았다>등과 같이,  

윗글은 실로 피동형이 아닌 문장이 없을 지경이다. 피동형 문장의 특징은 인물의 행동을 약화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장면을 정지시켜버리고 마는 약점까지  갖고 있다. 소설이 사건과 행위를 골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런 피동형 문장의 특징은 큰 결점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느냐 하면, 화자가 사건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이미 만들어진 사건 속으로 그 화자가 다소곳이 들어간다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작가가 이야기 앞에 훨씬 적극적으로 대들지 못하고, 소극적인 대처만을 노렸다는 말이다. 일단 능동형으로 고쳐놓고 볼 일이다.

여름집은 남아 있을까?
버스에서 내리자, 나는 다시 그  생각을 떠올렸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서울에 와서 친척집을 전전하던 그 며칠도, 나는 줄곧 그 생각뿐이었다....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요구대로 고친다면  아마 이런 식의 문장이 가능할 것이다. 피동형 문장은 글의 중간에서 군데군데  필요할 경우에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것 자체가 소설 전체의 톤을 이룬다거나 스토리를 끌고 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곤란하다. 처음부터 능동형 문장에 길을 들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5>끝말의 시제를 현재형 어미로 할 것이냐, 과거형 어미로 할 것이냐를 놓고  고심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도 무턱대고 고민할 문제가 아니라, 일단  화법을 먼저 정하라고 권하고 싶다. 과거형 문장은  주로 설명을 할 때 주로 쓰이고, 현재형 문장은 묘사를 할 때 많이 사용된다는 것이 흔히 지금까지의  경험이 얻어낸 상식이다. 따라서 설명을 위주로 할 것인가, 묘사를 위주로 할  것인가를 먼저 정하고 나면, 문장의 시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소설 문장의 시제는 과거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의 기본 화법은 설명이기 때문이다. 묘사만으로는 아무래도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나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자면, 설명과 묘사를 적절히 섞어 쓰는 것이 보통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설명은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안개가 걷힌다.
이상하게도 이곳 안개에는 씁쓰레한 산채즙 냄새가 풍겨온다. 밤새 숲을 지나오면서 산의 정기를 헹구어낸 때문일 것이다. 절 뒤의 가파른 매봉 위로 해가 막 솟고 있다.  (홍성원, 산)

이 소설의 시작은 완전한 묘사다. 이런 현재형 문장으로 어떻게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는데, 이 소설은 그런 우려를 잘 이겨낸 대표적인  예다.

문수사의 쇠북소리가 들려온다. 흡사 잠깬 산이 기지개를 켜는 듯한 둔중한  베이스 음색이다. 지금 시각에 울리는 쇠북은 예불을 알리는 북소리가 아니다.  어쩌면 엊그제 입적한 일비(一非)스님의 열반종  소리인지도 모른다. 무식한 일비스님은 제 나이도 잘 몰랐다. 물을 때마다 대답이 달라서 작년에는 여든 셋이 되었다가도 금년에는 일흔 둘이 되기도 한다. 스님의 수척한 시신은 매봉아래 너럭 바위에서 산을 오르던 등산객이 발견했다. 여염에서의 습관대로 등산객은 스님의 주검을 산 아래 지서에 신고했다. 지서의 순경이 시신을 살피고는 본서로 연락해서 형사 한 명을 데려왔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님의 뒷머리에 타박상 비슷한 큰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홍성원, 산)

원래 이 장면은 설명으로 처리할 내용이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아니라, 엊그제 이미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문에 중간쯤  <등산객이 발견했다>부터 과거형 문장을 써야 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때 과거형은 설명문을 전제로한 시제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묘사의 연장일  뿐이다. 그러니까 문장의 기본 정신으로 보면 묘사형인 것이다. 과거형은 원래  단순과 대과거 두 가지가 있는데, 소설 문장으로서의 단순과거는 이처럼 현재형 어미와 같은 기능으로 쓰이는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과거형  문장을 설명이라고 말하지 않는 거나 같은 이치다.

꽃다지가 만발해 밭두렁이 노랬다. 산기슭 상수리 숲에서는 꿩의 바람꽃이 드문 드문 하얗게 피었다. 햇귀가 산자락에까지  뻗치자 골짜기의 얼음이 녹아흘렀고 그렇게도 극성스럽던 새떼의 지저귐도 한결 수굿해졌다.  

                                (김문수, 서울이 좋다지만)

설명문이나 묘사문이나 소설 문장의 기본 시제는 이처럼 단순과거형이다.

6>간접화법과 직접화법을 알맞게 섞어 쓰거나 구별하여 쓰는 것도 문장을  다양하개 구사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어느 때 대화문을 설정하고, 또 어느 때  화자가 직접 나서서 설명을 해야 되는지를 묻는 학생이 있었다. 문장론과 약간  동떨어진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럴 때 나는 소설 일반론을 재론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은 이야기다.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자연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인물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화자가 모든 설명을 떠맡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인물이 등장하고나면 모든 것을 그들  스스로에게 맡겨야 한다. 화자가 잠깐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그들한테만 맡겨둘 수는 없다. 하나의 사건이 마무리되면 다음 사건이 또 필요하다. 인물이 바뀌고 사건이 바뀌는 순간의 바로 그 역할을 다시 화자가  떠맡는 것이다. 화자의 설명과 작중인물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반복된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분다.
오늘따라 널찬은 더 휘청거리고 다리는 중풍들린 사람처럼 후들후들 떨린다. 아침 나절에 젊은 인부가 탄짐을 진 채 물로 풍덩 떨어진 사고가 발생한 뒤부터 그도가 훨씬 더한 것이다.

"영감도 그렇게 엉기다간 떨어지기겠다."
"이러지 말고 비켜나요."
"빨리 가. 일하다 말고 왜 이러는 거야?"

탄짐 진 인부들이 12톤 배의 통삼에 걸친 한 뼘 남짓한 널판 위에서 소리를  질러댄다.    (이동희, 실향 이후)

화자와 작중인물들이 이쯤 그 역할을 분담해가면서 사이좋게 지내온 것이  지금 까지의 전통적인 소설이다.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이란 그 작중인물에 대한 화자의 개입 정도를 가름한 데서 생긴 문장법을 말한다. 그 화자의 개입정도에 따라  문장은 설명문이 되기도 하고 또는 연극의 대사처럼 완전한 행위로 남기도 하는 것이다. 그 두가지를 아예 합쳐버리면 이렇게 된다.

뚱뚱한 사나이는 R의 정면에 앉으며 R이그동안 더 여위었다고 말했고,  그러나 전혀 늙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R은 그 뚱뚱한 남자에게 그동안 몸이 많이 는  걸보니 형세가 좋아진 것 같다고 했고, R의 이 말이 뚱뚱한 사나이는 가죽잠바  차람의 사나이 쪽을 돌아보며 와르르  웃었다. 가죽잠바의 남자도 웃었다. 뚱뚱한 사나이는 한바탕 웃기를 마치고나서 R이 떠난 지가 벌써 칠년이나 팔년 쯤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R은  오 년 반이라고 정정했다. 그리고 뚱뚱한 사나이는 R의 아내와 아이들은 잘 있느냐고 물었고, R의 아내가 R이 없는 오 년 반을 기다렸으니 이제 잘해주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하일지, 경마장 가는 길)

화자의 역할과 작중인물의 역할을 합쳤다고는 하지만, 이 경우는 알고 보면 화자쪽에서 자기 몫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작중인물의 몫까지를 아주 독점해버린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런 횡포는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특히 소설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소설이 화자의 기능을 강화ㅎ 수 있다는 사실은 소설 그것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 대신 작중인물의 몫이 강화되면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희곡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7>끝으로, 문장은 반드시 그 나름의 호흡과 어조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말을 강조해두고 싶다. 호흡은 속도와 관련된 말이다.  그것은 느릴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어서 작품의 성격에 따라 각각 달라질 수도 있는데, 흔히 느린  문장보다 는 빠른 문장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지루하지 않게 잘 읽혀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니까, 너무 빠른 문장만을 노리지 말고 상황에 따라 편하게 읽히도록 조절하면 된다. 어조란 흔히 톤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말의 느낌 또는 특징적인 감정을 염두에 둔 말이다. 문장은 살아있는 감정의 결정체여야 한다.  그나마 아주 특징적인 감정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주제를 특징짓는 일이기도 하다. 문장이 주제와 직결된다는 말은 그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폐일언하고 구시대의 인물이었다. 시대가 바뀌면 인물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그 푼수로 지금까지 조합장을 해왔으면 되었지 더 바란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뒤이어 등당한 인물은 상남리에 사는 박도길. 도대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는 위인이었다. 시대의 흐름은커녕 눈앞에 닥치는 일조차 돌아가는 판속을 제대로 감지할 줄 모르는 이따위 인물은....

                                          (이삼교, 돌멩이와 까마귀)

이런 문장은 도전적이다. 언어의 선택이 그러하고, 그 세상을  향한 관찰이 그러하고, 맺고 끊는 의지가 그러하다. 이런 문장으로는 가히 세상 이야기를 할 만 하다. 다시 이런 문장으로 달콤한 사랑 이야기를 한다거나, 인간 존재의  의미를 추구한다고 가정해보라. 쇠망치로 유리그릇을 다루듯, 그건 맞지 않는 일이다.

햇빛에 눈이 부셨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실감하기 위하여 얼마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는 방금 시체 해부실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된 것 같았다. 눈알을 굴려보았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  여전한 외관을 견지하고 있는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러나 분명, 무엇인가  달라졌다. 그녀의 안에서, 또는 밖에서.   (윤정선, 춤추는 시바)

이런 문장은 사변적이다. 정제된 언어가 그러하고, 그 안으로 파고드는  생각이 그러하다. 같은 논리로, 이런 문장이  추구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소설에는 하나의 문장이 있어야 한다. 그 소설에 적합한 톤을 가지고, 그것을 처음부터 끝가지 유지시켜달라는 말이다. 그것이 또 한 일관성 있게 주제를 표현하는 길이다.





제  목 : 10장/ 소설의 끝                        

--10장 소설의 끝 - 작가가 결정해야 할 일

(1) 다시 만화를 보며


이글을 처음 시작할 대 나는 소설의 가장 압축된 형태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4단짜리 짤막한 신문 만화를 게재한 적이 있다. 그림 대신 다시 그 내용을 요약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1)무장 경찰 두 사람과 어린아이 하나가 대학교 정문 앞에 대치하고 서 있다. 아이가 경찰을 향해 외친다. "경찰은 각성하라"

2)"뭐냐?"경찰이 외치면서 아이를 붙잡으려고  달려든다. 아이가 쫓기어 달아난다.

3)아이는 국민학교 안으로 달려들어간다. 쫓기면서 경찰한테 말한다.  "정치적인 뜻은 없어요"

4)이번에 그들은 다시 국민학교 정문 앞에 대치하고 있다. 경찰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고, 아이는 천진스럽게 서서 말한다. "국민학교 앞도 지켜주세요"

이 그림은 짧지만 그 안에 두 개의 사건이 겹쳐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처음에 하나의 사건을 터뜨리고, 그 위에 다시 또하나의 사건을 겹치는 일은  소설의 발단과 전개에 해당되지만, 마지막 그것들을 다시 하나의 이야기로  통일시키 는 일은 결말에 해당한다. 윗 그림에서, 두 개의 사건이란, 하나는 경찰이  학교앞에 대치하고 섰는 것으로 암시되는 대학생 시위문제이고, 또 하나는 최근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어린이 유괴사건이나 성폭행 등에 얽힌 어린이  보호문제이다.

이때 두 개의 사건이 하나의 이야기로 압축되는 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 1단과 2단은 경찰과 어린아이가 주고받는 대화지만, 그것은 누가 보아도  대학생들의 시위와 관련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직접 대학생들을 등장시키지  않고도 그 점을 암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장 경찰의 구호와, 서로 쫓고 쫓기는 낯익은 풍경들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면 속에 대학생 대신 어린아이를 대치시킴으로서, 웬일일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상황이 바뀌는 것은 제 3단 부터다.

3단에서 장면은 국민학교로 바뀌고 아이는 정치적인 뜻이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정치적인 뜻이 있다는 말의 역설적인 표현이다. 제발 좀 정치 잘하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마지막 4단에서 그 이유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어린이 보호문제다. 대학생 시위문제에다가 어린이 보호문제를 겹쳐 최근 정치 부재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 그림으로 직접 설명된 부분이다. 다시 그 내용을 작가의 의도에 따라 짚어본다면 아마 이런 말일 것이다. 최근 학생 시위를 막는 경찰들이 너무 과잉 진압을 하는 것 같다. 경찰들이 너무 대학교 쪽으로만 쏠리다보니, 사회 곳곳에 허술한 구멍들이 뚫리고 있다.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어린이 유괴사건이나  성폭행도 그 중의 하나다. 어린이는 어른들로부터 보호되어야 마땅하다. 경찰들이 너무 한군데로만 쏠리지 말고, 부디 어린이를 보호하도록 힘써주기 바란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그림으로 직접 설명되지 않은 채 다만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되어있을 뿐이다. 소설을 이와 같이 언어로 드러내어 말하기와 암시하여 말하기로 구별하여 쓸 줄 아는 일은 중요하다.  요컨데, 내용과 형식의 두 측면을 일컫는 말이다.


(2) 급전(急轉)과 반전

이 글은 소설의 끝내기 순서를 알아보는 자리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설은 내용의 완결과 형식의 완결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일단 벌어진 사건은 매듭지어져야 하며, 동시에 그 의미가 형성되야 한다는 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 하여 다시 윗그림의 제1단과 4단이 각각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단에서, 경찰과 어린아이, 그들은 서로 보호하고 보호받어야 할  상보적인 관계다. 그런데 왠지 그 상보적인 관계가 여기서는 깨져 있는 것 같다.  경찰이 뭔가를 잘못하고, 그 잘못 때문에 아이가 뭔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양이다.

둘째, 1단에서 경찰이 잘못한 점은 그들이  지키지 않아도 될 대학교 정문만을 지키고 섰는 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자 4단에서는 경찰들을 국민학교 정문쪽으로 이동시켰다. 그것은 이 소설이 대학생 시위보다는 국민학교 어린이  문제를 훨씬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입증한다.

셋째, 1단에서 아이가 화를 내고 경찰이 냉담하더니, 4단에서는 경찰이 화를 내고 아이가 담담하다. 서로 화를 낸다는 것은 갈등이고, 갈등은 곧 충돌을 의밀하는데, 그것은 두 인물들끼리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모른 데서부터 생긴 현상이 다. 아이는 아이대로 경찰이 왜 거기 서 있는 줄을 모르고, 경찰은 경찰대로  아이가 왜 항의하는 줄을 모른다. 아이가 모르는 그 어른들 세계와, 어른들이 외면해온 그 아이들 고충, 그것이 곧 작가가 진단한 우리 사회의 문제이고, 또한  소설이다.

넷째, 그래서 제 1단 <경찰은 각성하라>는 문제의 출발점이지만, 4단에서 <국민 학교 앞도 지켜주세요>는 깨달음의 결말이다. 1단의 그것이 아이의  무지(無知), 4단의 그것은 경찰의 깨달음이다. 어린아이의 무지가 마침내 어른들의 무지를 일깨워준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사항은 각각 1단에서 4단까지 단락을 달리하는 동안, 서로  상반된 관계를 이루게 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감히 <詩學>의 정의를 빌리자면,  그것은 급전(急轉)과 발견(發見)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1장). 비극의  결말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 두 가지 형태를 제시한 바 있다. 급전이란, 극(劇)이 엉뚱하게도 처음과는 반대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에서 불행으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그 결말은 언제나 시작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춘원의 <무정>은 행복하게 끝난ㄴ다. 이형식은 외롭고 가난한 시골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노력한 끝에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한편 그는 암울한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밝은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새 시대의 일꾼이 되었다. 이형식뿐만이 아니다. 박영채는 개인의 몽매한 슬픔을 딛고 일어나 참사랑, 참인간을 자각하였고, 김선형은 평범한 사람이던 것이 나중에 아름다운 예술가로 꽃피웠다. <무정>은 이와 같이 작중인물들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다. <무정>이 고전소설의 형식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종종 비난을 받는 것도 바론 이 점 때문이다. 고전소설이나, <무정>이나, 결말이 행복하게 끝나는 까닭은 그 목적성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착해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주기 위하여, 일부러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그렇게 반반으로 나누어, 착한 사람한테만 행복을 주고, 악한 사람한테는 불행을 주는 대조법을 썼다.  그러나 <무정>은 개화와 민족 자력갱생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그것들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다 행복을 주었다. 이때 행복과 불행은 그래서  다분히 운명적이다. 행복도 불행도, 미리 정해놓고 그렇게 진행되도록 스토리를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3) 개연성과 필연성

이런 사태의 급전은 물론 <개연성 내지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여야 한다. 결말이 행복하냐, 불행하냐가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도록 사건이 내적 필연성을 가져야 한다. 행복으로 끝나겠거든 그것이 행복으로 끝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스토리가 그렇게 진행되어야  하며, 불행으로 끝나겠거든 또한 스토리가 그렇게 끝날 수 있도록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 고전소설이나 <무정>은 사실 이런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 우연히 남발되는 사건 전개도 그렇거니와, 예정된 행복한 결말이 너무  당위론적 이다. 그러나 이런 우연은 어디까지나 운명론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고전주의  문학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사실성을 요구하는 현대소설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김동인의 <감자>는 불행하게 끝난다. 복녀는 돈은 없지만, 원래 선비의  딸로서 착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돈 때문에 팔려서 시집을 갔고, 거지가 되었고, 매음을 했고, 도둑질을 했고, 그러다가 억울하게 왕서방의 낫에 찔려 죽었다. 모든 것이 돈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가 고전주의 작가라면, 이런 착한 인물을 죽이는 일 따위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둔 바 있다.(시학 13장) 1)유덕한 사람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변화함을 보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포도 애련도  환기하지 않고, 오직 도리에 어긋난 일로 느겨질 뿐이기 때문이다. 2)악한 자가 불행에서 행복으로 변이함을 보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비비극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정에 호소하지도 않고 애련과 공포를 환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그런 인물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오늘 날  작가들의 믿음이다. 돈은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고, 타락은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것이고, 그래서 인간은 애시당초 착하게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인데, 처음엔 착하더라도 환경에 따라 나중에 부도덕해지면 그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결정론이 지배하는 오늘날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은 옛날 아리스토텔레스대로 맞고, 오늘날 작가들의 믿음은 도 오늘날 작가들 나름대로 맞는다. 행복한 결말은 운명론적 세계관의 소산이고, 그것이 불행할 수도 있다는 것은 사회적 결정론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4)변화된 결말의 형태

소설의 결말을 행복하냐, 불행이냐로만 따지다보면 그 예가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소설은 그것이 행복인지, 불행인지도 모를 아주  모호한 결말이 더 많이 때문이다. 게오르규의 <25시>는 요한 모리츠의  어처구니없는 웃음으로 끝이 난다. 오랜 감옥생활에서 풀려난 그가 작렬하는 카메라의 플래시를 받으면서 흘리는 그 묘한 웃음이 행복한 웃음일까, 불행한 웃음일까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는 수잔나와 꼬마쪽을 쳐다모았다. 그러자 얼굴이 굳어지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 아무리 웃으라고 소리쳐도 그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웃기는커녕  여자들처럼 목을 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는 정말 끝장이 났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엄습해왔다.

"빨리 웃으라니까!" 장교가 요한 모리츠를 보며 악을 썼다.
"웃어! 그대로 웃고 있으라구!" (게오르규, 25시)

무려 13년에 걸친 감옥생활에 비하면, 그의 석방이란 행복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요한 모리츠한테 그것은 분명이 불행이다. 석방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석방이전의 세월이 너무 어처구니없기 때문이다. 이 행복도 불행도 아닌  어처구니없음이 바로 오늘날 소설이거니와, 그 어처구니없음에 대한 암시가 바로  소설의 결말인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그래서 행복 또는 불행으로 가는 종착역이  아니라, 그 전체를 암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소설의 결말은 그래서 행복도 불행도 아닐  수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인상적이어야 하고, 감동적이어야 하고, 가능한 한 그것들이 오래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

<오이디푸스>의 결말도 따지고 보면, 그것은 행복도 불행도 아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한 사람이 마침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것은 불행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때 그의 불행은 어떤 교훈적인 목적성을 갖고 있지않기 때문에, 그것을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로 단정지으려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그의 태도이다. 그때 그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황야로 떠난다. 그 인간적인 고뇌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감동 그 자체가 비극의 결말이다.

최인훈의 <광장>은 행복한 결말인가, 불행한  결말인가, 이렇게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구조적으로는 바다에서 시작하여 바다로 끝이 난다.  그러나 그 바다에, 처음에는 이명준이 있고,  나중에는 이명준이 없다. 같은 바다지만, 이명준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크다. 그 사이에 이명준의 삶 전체가 들어있는  것이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중립국으로 가는 석방 포로를 실은 인도 배 타고르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삼천 톤의 몸을 떨면서, 물건처럼 빼곡히 들어찬 동지나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 간다. 석방포로 이명준은, 오른편에 곧장 갑판으로 통한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  배뒤쪽 난간에 가서, 거기 기대어 선다.

                                (최인훈, <광장>의 첫장면)

이튿날.
타고르 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삼천 톤의 몸을 떨면서, 한 사람의 손남을 잃어버린 채 물체처럼 빼곡히 들어찬 남지나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 간다. 흰 바다새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마스트에도, 그 언저리 바다에도. 아마, 마카오에서, 다른 데로 가버린 모양이다.

                                (최인훈, <광장>의 마지막 장면)

시작의 바다는 살아서 숨쉬는 한 마리 거대한 물고기와 같다. 뭔가가 빼곡히 들어찬 훈김의 동지나 바다다. 그런가 하면, 마지막 바다는 상실의 바다다. 이명준과 흰 바다새들이 그림자를 감춘, 그것은 남자나 바다다. 이런 바다는  인상적이다. 그냥, 장면과 색깔로 아름답다는 말이 아니라, 주인공 이명준에 얽힌 비극적인 생애가 또다시 한차례 암시되기 때문이다.


(5) 클라이맥스라는 것

소설의 결말은 구조적인 결말과 내용적인 결말, 두 가지가 있다. 그 중의  어느 것 하나라도 완성되지 않으면 그것은 완전한 결말이 아니다. 주인공이 마침내 긴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것은 구조적인 결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소설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죽음이 무엇인가 깊은 의미를 던져주든지, 아니면 강렬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내용적인 결말이다. 그 내용은 말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동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외로운 여자가 있었다. 외로운 남자가 있었다. 이산가족찾기가 한창이었다.  찾아야 할 가족은 없었지만, 정말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으므로 그들은 매일 이산가족 찾기 현장에 나갔다. 그들은 우연히 거기서 알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므로 장차 결혼할 것을 약속하였다. 혼자일 때는 고달프고 의욕도 없던 것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부터는 활기가 넘쳤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열심히 일하였고, 여자는 남자의 밥상을 차려놓고 날마다 그를 기다렸다.

                                (학생의 습작노트에서)


이런 이야기를 진행하던 어떤 학생은 다음과 같이 그 결말을 맺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자가 죽는다. 공사판 현장에서 날품팔이를 하다가 실족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슬픔에 젖는다. 그리고는 한없이 남자를 동정한다. 삶에 대한 애착을 불어넣어준 것이, 사랑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이, 그만 그의 죽음을 주추긴 꼴이 되다니..... 여자는 남자의 시체를 끌어안는다.

이런 결말은 좋지 않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하던 것에 비해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지도 않거니와, 여자가 그토록 슬퍼하던 것에 비해 결말이 그다지 슬프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이쯤에서 작가는 훨씬 냉철해져야 한다. 분단이면 분단,  인생이면 인생, 작가는 그것에 대해 본질적이고도 원천적인 물음을 던져야한다. 작가는 막연한 통념에 빠져서는 안 된다.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런 것은  막연한 통념이다. 그것은 작가의 해석이 아니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런 통념에  빠져서 그만 결말을 안일하게 처리해버렸다. 처음  시작이 아무리 그럴듯한 이야기라도 결말 처리가 안일하면, 그 이야기는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정상적인 작가라면 이때 아마 슬퍼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경찰이 그 남자와의 관계를 캐묻는다.

단순한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분단된 상황에서 그 남자와 여자와의 만남은  어떤것인지, 또는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아주 냉철하게 따져주어야 한다. 여기서 분단된 상황을 들먹거리는 것은  이 글이 어차피 이산가족찾기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남의 계기를  이산가족 찾기에서 만들었다는 뜻은 이 소설이 적어도 역사적이고도 시대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시작을 개인의 연애감정이나 일상적인 세태소설로 끝맺는다는 것은  소설의 위축을 뜻하는 것이요, 그래서 무의미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문제를  던졌거든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의미의 확대요, 나아가서 소설의 결말이 된다. 여자는 자기가 남자의 시체를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좀더 냉정해야 한다. 남자의 시체를  누가 치우네 하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죽었으니까, 어차피 장례는 치르어지기 마련이다. 애당초 경찰이 물었던 것처럼, 이 여자와 남자와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혹은 인간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따라 이 남자의 시체는 여자가 가져갈 수도 있고, 가져가지  않을 수도 있다.

급전이란 말 속에 이미 그 의미가 내포되어 있듯이, 결말의 행동은 언제나 뜻밖이다. 그러나 그 의외성도 반드시 전체 구조 안에서 이어지는 연속선상의 반전이 아니면 안 된다. 오이디푸스가 문제의 범인을 확인하지 못한 채,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는다든가, 질병에 결려 죽는 식의 의외성은 구조적인  반전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범인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에 따라 그는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황야의 길을 떠난다. 이때 범인을 잡고보니  그가 바로 자기자신이라는 사실은 사태의 급전이다. 극은 여기서 끝날 것이라고  믿는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여기서 끝내서는 안 된다. 그것으로 미흡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의 감동은 전적으로 마지막 장면에 힘입는다. 피눈물을 흘리며 그가 고행의 길을 떠날 때, 마침내 독자들은 그한테서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이다. 학생이 쓴 윗글도 마찬가지다. 애써 만난 사람이 갑작스레 죽는 것을 그는 급전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는 언제나  불의의 사고일 뿐이다. 스토리의 연속선상이 아니다. 그 죽음이 사건의 연속선상에 놓이려면, 그로부터 문제가 야기되고, 사건이  전개되는 어떤 과정이 있어야 한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이디푸스>를 끝까지 끌고 나간  힘은 전적으로 공포와 애련의 감정이었다. 애련은 주인공이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는 감정이고, 공포는 우리와 유사한 주인공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는 감정이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사실 우리는 내내  오이디푸스에 대한 연민의 감정과 그로 인한 공포의 감정을 키워왔었다. 우리가 이미 오이디푸스의 고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범인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그리고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고조된 감정의 상태를 그동안  소설론에 서는 클라이맥스라고 일러왔다. 이제 그 고조된 감정을 후련하게 풀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소설은 끝이 난다. 그 끝은 오로지 작가의 태도 여하에 따라  결정될 일이다. 오이디푸스가 오만 방자하여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 들지 않는다면, 독자들은 실망하여 반감을 일으키게 될 것이고, 만일 겸손하여 자신의 죄를 깊이  반성한다면, 그때는 안심하고 그를 동정하여 기뻐할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방황은 그 점에서 인간적이었다. 그로부터 공포와 연민의 감정은 사라지고, 탁 트인  하늘처럼 독자들은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이다. 예컨데, 카타르시스의 상태이다.



(6)작가가 결정할 일

작가의 태도가 드러나 있지 않은 소설은 무의미하다. 그것이 곧 소설의 주제요, 감동이요, 결말이기 때문이다. 결말의 모습은 다양하다. 모든 소설의 결말이 <오이디푸스>처럼 클라이맥스와 카타르시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그렇듯이, 소설도 평범하게 진행되다가 다시 평범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작가의 태도는 이런 평범한 결말에서 필요하다.

염상섭의 <삼대>는 극적인 결말을  요구하는 소설이라기보다는, 가족과 이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다. 숙명적으로 얽혀든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안에 남을 속이거나  해칠만한 무슨 음모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손자가 모여 사는 한 집안의 갈등과, 서로 이념을 달리하는 친구들이 어울리는 1930년대 사회의 한 단면이다. 이런 경우도 작가의 태도는 필요하다.

<삼대>는 이와 같이 한 가정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의 문제와, 그 시대에 걸친 이념의 문제를 동시에 거론해왔기 때문에, 결말에서도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어떤 식으로든지 이루어져야 한다. 그 하나는 가권(家權)을  넘겨받는 일이다.

어쨌든 이 금고 열쇠를 맡아라. 어떤 놈이 무어라고 하든지 소용없다. 이  열쇠 하나를 네게 맡기려고 그렇게 급히 부른  것이다. 이것만 맡겨놓면 인제는 나도 마음놓고 눈을 감겠다. .....그 열괴 하나에 네 평생의 운명이 달렸고, 이  집안 가운이 달렸다. 너는 그 열쇠를 붙들고  사당을 지켜야 한다. 네게 맡기는 가는 것은 사당과 열쇠.....두 가지 뿐이다. 그 외에 유언이고 뭐고 다 쓸 데 없다.

                                        (염상섭, 삼대)

이 장면은 그동안 조씨 일가를 꾸려가던 조부가 마지막 임종을 하면서 그  손자 한테 일체의 가권을 이양하는 결말의 부분이다. 원래 이 집은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손자가 한 집안에 살면서, 그들의 각각 다른 전근대적 사고와 근대적  사고와 현대적 사고가 빚는 마찰을 다루었기 때문에, 그만큼 전근대적 봉건사회가 무너지면 누구한테 그 권한이 이양될지가  큰 관심거리였다. 할아버지가 아들한테 가권을 이양하지 않고 곧바로 손자한테 이양한 점은 그래서 당시대를 보는 이 작가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입증한다. 또 하나는 병화, 필순 등에 얽힌  당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석이 문제이다.

.....구차한 사람, 고생하는 사람은 그 구차, 그 고생만으로도 인생의 큰  노역이니까. 그 노역에 대한 당연한 보수를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도의 적 이념이 머리에 떠오르는 덕기는 필순이 모녀를 자기가 맡는 것이 당연한 의무나 책임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염상섭, 삼대)

조씨 일가의 가권뿐만이 아니라, 덕기는 당시 사회의 무산자운동에  대해서까지도 외면하지 않는 적극성을 보이는  것이다. <삼대>의 마지막 결말은 화합이다. 덕기를 둘러싼 그의 집안과 사회의 환경은 원래 그의 이념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그 상반된 이념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이 소설의 결말은 순전히 작가의 역사관, 사회관에 힘입는다.

백릉의 <태평천하>는 그런가 하면 배반의 결말이다. 손자 종학이 조부의 열망을 배반하였다. 그것은 <삼대>의 덕기가 조부의 열망을 고스란히 이어받으며 끝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놈의 만석꾼의 집 자식이, 세상 망쳐놀 사회주의 부랑당패에 참섭을 하여, 으응, 죽일 놈! 죽일 놈!> 연해  부르짖는 죽일 놈 소리가 차차로 사랑께로 멀리 사라집니다. 그러나 몹시 사나운 그 포효가 뒤에 쳐져 있는 가권들의  귀에는 어쩐지 암담한 여운이 스며들어, 가뜩이나 어둔 얼굴들을 면면상고, 말할  바를 잊고, 몸둘 곳을 둘러보게 합니다. 마치 장수의 주검을 만난 군졸들처럼....

                                   (채만식, 태평천하)

이때 작가의 태도는 역설적이기 조차 하다. 조부의 말 그대로라면, 조부의  생각이 옳고 손자의 생각이 그른 것 같지만, 작가의 태도에 따라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일 수 있다. 작가는 확실히  손자편이다. 그러나, 미래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삼대>나 <태평천하>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앞의 것이 순응이고, 뒤의 것은 배반인 만큼, 그것을 처리하는 작가의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하면 <벙어리 삼룡이>의 죽음은  화합도 배반도 아닌 환상의 결말이다. 이 소설은 이미 벙어리 삼룡이가 매를 맞고 주인집에서 쫓겨난 그쯤에서  구조적 결말이 난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마지막 삼룡이가 불을 지르고 아씨와 함께 그 불이 타죽는 것으로써, 이 소설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즐거운 쾌감을 자기의 가슴에 느끼는 것을 알았다. 색시를 자기 가슴에 안았을 때 그는 이제 처음으로 살아난  듯 하였다. 그는 자기의 목숨이 다한 줄 알았을 때 그 색시를 내려 놓을 때에는 그는 벌써 목숨이 끊어진 뒤였다. 집은 모조리 타고 벙어리는 색시를 무릎에 뉘고  있었다. 그의 울분은 그 불과 함께 사라졌을는지!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웃음이 그의 입가장자리에 엷게 나타났을 뿐이다.     (나도향, 벙어리 삼룡이)

만일 이 마지막 장면이 없었더라면, 이 소설도 최서해의 <홍염>등 과 같은 도식적인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틀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주인과 머슴과의 대립,  가난과 부의 대립, 부자의 횡포, 가난한 자의 핍박, 더구나 주인이 머슴의  딸이나 부인을 범하고, 머슴이 주인의 수탈을 앙갚음하는 일 따위는 프롤레타리아  소설이 즐겨쓰던 수법이었다. <벙어리 삼룡이>의 죽음은 그러나 폭력의 수단이  아니 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추구요, 그 죽음을  통한 실현인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작가의 결정사항이다.



(7) 아름답고도 유익한 소설을 위하여

이제 한 편의 소설을 끝내야 한다.
아무리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도, 밑도 끝도  없이 그것을 마냥 지껄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일은 생업이 아니다. 누구한테나 자신의 생업은 따로 있는 법이고, 그 살아가는 틈틈이 휴식과 영양보충을 위한 것이 소설이다. 생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여가선용이 될 수 있을 만큼 알맞게 유쾌하고 알맞게 유익해야 한다. 혹, 그럴 염려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소설이 너무 유익하고 재미있어서, 돈버는 일조차 잊어버리고 소설 읽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그 또한 실수요 죄악  아니겠는가.

이런 염려는, 소설읽기를 부업으로 여기는 사람들과는 달리, 소설쓰기를 생업으 로 여기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자기 말에 만일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거나, 한눈을 파는 사 람이 있으면,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귀와 눈을 빼앗으려고  애쓴다. 그래서도 소설의 적당한 길이는 필요하다. 그것은 소설쓰기를 생업으로  여기는 작가와 소설읽기를 부업으로 여기는 독자  사이에서 알맞제 조정된 길이여야 한다. 긴 이야기는 옛날에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넓은 영토를 가꾸던 한가한  귀족들한테 잘 읽혔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생활형태가 바뀌고 사람들이  바빠지기 시작하자 이야기는 짧아졌다. 소설의 길이는 원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필요에 따라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점잖지 못하게 소설을 먹고 사는 일에 비추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설 자체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도 그것은 알맞은  길이가 필요하다는 점을 일찍이 강조한 바 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1)너무 작은 생물은 아름다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지각은 순간에 가깝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2)너무 큰 생물, 예컨데 길이가 천 리나 되는 생물은 아름다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대상은  단번에 지각할 수 없고, 그 통일성과 전체성이 눈 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부디, 우리의 소설이 알맞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나기를 바란다. 또한  재미있고 유익하여, 그것이 오래도록 독자들의 사랑 속에 함께 하기를 바란다.

**이제 소설작법에 대한 송하춘 선생님의 글을 모두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