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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에 투영된 自然과 현재적 含意

梅君子 2006. 4. 12. 18:56
漢詩에 투영된 自然과 현재적 含意 - 李 澤 東(가톨릭대)



1. 머리말
2. 한시에서의 자연의 大體的 梗槪
3. 현실과 江湖에 대한 인식의 편차
4. 한시에서의 생태적 상상력
5. 마무리


1. 머리말

기실 자연은 한 두 세기 저쪽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근한 대상이었다. 당대인의 삶과의 도저한 친연성은, 차라리 객관적인 거리가 지각되지 않을 정도로 밀접한 것이었다. 과장이 허용된다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자연이 매개되지 않은 작품이 드물다고 할 정도로 韓國 漢詩에서 자연이 차지하는 부하량은 압도적이었다. 또한 이토록 彌滿한 자연이기에 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 성과 역시 풍성하게 산출되어 있으며, 그러한 성과들은 宗論으로 자리매김되어 우리 문학을 보는 시각을 유장하고 폭넓게 하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연구 대상 자체가 호한하고 그에 대한 탐사 역시 심도있게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기존 논의를 정리하며 실마리 삼는 것은 애당초 기대하기 어렵다. 사정이 그러하니 이번 발표에서는, 우선 한국 한시에 나타나는 자연의 대체적인 경개를 개관하며 그에 투영된 자연 친화적인 인식틀의 의미를 점검하고 특히 오늘에도 유의미한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사안을 한 두 항목으로 한정하여 논의하도록 한다. 그 하나는 시대를 넘어 恒常的인 고민이라 할 進退를 사이한 갈등이며, 다른 하나는 특히 오늘에 화두라 할 수 있는 생태적 모색인데 저 둘이 한시에는 여하히 투영되어 있으며 오늘날의 삶에 어떤 자양분으로 기능할 지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2. 한시에서의 자연의 大體的 梗槪

강호 자연은 전통적으로 현실의 가파름과 견주어지며 혹은 인사의 찰라성에 견주어지며, 安息의 공간이자 願望의 공간 그리고 歸依의 대상으로 관념되어 왔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다채로운 의미를 지닌 자연이 한국 한시에 투영된 양상을 細目化하여 간략히 검토한다. 먼저 한시에 투영된 자연의 가장 두드러진 측면은, 다른 무엇보다도 물아일체의 경지를 소요하려는 희구를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뜨락 가득한 달빛은 그을음 없는 촛대요,
자리에까지 찾아든 山光은 청치 않은 손이라네.
게다가 솔바람은 악보에도 없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으니,
다만 보배롭고 진중하게 간직할 뿐 다른 이에게 전하지 않는다네.
(滿庭月色無烟燭, 入座山光不速賓. 更有松絃彈譜外, 只堪珍重未傳人.)

널리 회자되는 崔沖의 <絶句>인데 물아일체의 정조를 전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月色과 山光만으로 이미 시인과 자연과의 조응은 내밀하게 확보되어 있다. 그런데 松?마저 청량감을 더하니 대상과 시인의 조응은 완벽한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렇게 마련된 서정적 고양을 흩뜨리기 저어하여 고답적인 경지에 이르지 못한 속인에게는 이러한 정황을 전하지 않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자연 그 자체를 대상으로 일체감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자연은 天理의 표상물로 형상화되어 오기도 했다. 살펴볼 작품은 厚齋 金幹의 <盆池養魚>이다.

물담긴 작은 단지 맑기도 맑은데,
대열을 이루어 수많은 물고기 노닐고 있다네.
고요한 속에 묵묵히 날고 자맥질하는 모습 관찰하는데,
아래 위로 소리개 날고 물고기 노님에 一理가 분명하구나.
(小盆儲水十分淸, 無數游鱗作隊行. 靜中默察飛潛象, 上下鳶魚一理明.

물담긴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떼를 보며 곧바로 ‘鳶飛戾天, 魚躍于淵’을 연상하며 천지에 彌滿한 天理를 관념하고 있다. 사실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천리나 이법은, 꽃의 피고 짐이나 사계의 갈마듦 등에서 관찰되는 자연의 일정함에서 확인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보는 바와 같이 이념이 착색된 존재로 자연이 관념되고 있기도 한 것이니, 물아일체를 노래한 계열과 함께 역시 강고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자연을 소재로 하여 江湖閑情을 읊고 있는 작품 역시 풍성한 맥을 형성하고 있는데 제시된 시구는 臨淵 李亮淵의 <村家> 연작 속의 작품이다.

아버님이 항상 물고기 반찬 마다시는데,
혹시라도 양념이 부족해서 그러신 건 아닌지.
어른의 마음 깊이 생각해 보니,
손주놈들 물가에 노는 것을 저어함이었네.
(家翁每却魚, 無或失鹽?, 窈料長者心, ?兒近水戱.)

강 구비 한 곳에 터잡아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이 형상화되고 있으니 노인을 향한 효심이나 노인의 손주를 향한 자애 그리고 물가를 헤집고 노닐고픈 동심이 겹쳐 제시되면서 일상적인 살이의 오롯함이 그려져 있다.또한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 형상화되기도 하지만 개개의 자연물을 통해 人事에 대한 단상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 양태는 인사와 자연의 대조적인 속성에 착안하기도 하고 유비적인 속성에 착안하여 結構되기도 하는데, 우선 대조적인 속성에 착안한 구절을 살핀다. ‘덧없는 인생 좁쌀만큼 미미한데, 웅크리고 않아 산이 마르고 돌이 문드러질 때까지 고뇌하는구나(浮生不?微如粟, 坐念山枯石爛時) ’와 같은 시구에서는 웅혼한 자연에 견주어진 人間의 잗디잠과 그러한 잗디잔 人事를 부여잡고 시비를 끊이지 않는 삶의 모습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이어진다.

有限한 人事와 無限한 자연의 대비는 개인의 경우에 국한되지 않고 王朝의 갈마듦을 두고도 동일한 정조가 빈번히 등장하니, 牧隱 李穡은 고구려가 멸망하여 ‘성곽에 인적은 끊어지고(城空) 초석도 바스러졌는데(石老) 그럼에도 자연은 인사의 흥망에 아랑곳 않아 예 떴던 달은 지금도 여전히 휘황하게 비추이고 있으며(月一片) 구름도 옛 모습 그대로라는(雲千秋) 사실에 대해, 회한에 젖어들고 있다. 더욱이나 화자의 그러한 회한에도(長嘯倚風?)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푸르른 산이나 절로 흐르는 강의 무심함이(山靑江自流) 시인의 애상감을 더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자연물과 인사를 대조적으로 관념하여 結構되는 경우와 달리 자연물과 人事의 類比에 착안하여 정조를 피력하기도 하는데 제시된 작품은 宋翼弼의 <望月>이다.

둥글어지기 전에는 항상 더디 둥글어지는 것을 안타까이 여겼는데,
둥글어진 뒤에는 어찌 이리 쉬 이지러지는가.
서른 밤 중에 하룻밤만 둥그나니,
한평생 사는 심사도 온통 이와 같구나.
(未圓常恨就圓遲, 圓後如何易就虧. 三十夜中圓一夜, 百年心事摠如斯)

한달 내내 지고 뜨는 달인데, 휘황한 보름달은 한달 중에 하룻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들어, 榮枯와 盛衰가 갈마드는 사람들의 살이에서 ‘榮盛’한 때는 찰라이고 ‘枯衰’한 나날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이 경우 시인에게 찾아드는 정감의 내함은 물론 다층적이다. 애상감일 수도 있고, 젊어 한 때를 즐기자는 합리화일 수도 혹은 安分의 정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자연을 두고 宦路에서의 궤적과 얽어 작품을 결구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제시된 작품은 辛?의 <木橋>이다.

긴 가지 찍어 끊어 여울 한 곳에 걸쳐두니,
흩날리는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는 여울에 걸쳐져 있네.
한순간 걸음걸음에 간직했던 깊은 뜻을,
공명을 추구하는 벼슬길에 옮아 보아라.
(斫斷長條跨一灘, 淺霜飛雪帶驚瀾. 須臾步步臨深意, 移向功名宦路看.)

눈발 나부끼고 서리앉은 한겨울,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데는 여간 익숙한 사람이라도 조심스러운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한겨울 외나무 건너기를 가파른 인생길로 치환하여 사려토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본 대로 자연을 매개로 한시에서는 다기한 인식이 형상화되고 있다. 자연 전체를 아울러 관념하던 특정한 자연물로 한정되든 그것과의 異化나 同化를 통해 정서나 인식을 표출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자연은 한시를 포함한 고전 시가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는데 당대인의 생활 조건을 염두에 둔다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라고도 하겠다. 좁혀 들어가면 얼마든지 細目이 확장될 수 있겠지만 자연에 투영된 인식의 대체적인 양상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 삶에 대한 寓意로, 자연의 영겁에 비견되는 인사의 찰라성에 대한 悔恨으로 그리고 천리의 표상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제양태를 두루 포괄하며 그 의미를 고구하려는 시도는 난망일 수밖에 없다. 이에 이어지는 장에서는 한 두 항목으로 좁혀 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는데 하나는 현실과 강호의 대칭구도에 대한 이해이며 다른 하나는 한시에 투영된 생태적 상상력의 현재적 의의에 관해서이다. 강호와 현실을 대칭축으로 상정하며 그에서 피어난 단상이 정리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항상적인 화두일 것이며, 시편에서 확인되는 생태적 상상력의 편린은 특히 오늘에 유의미한 성찰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3. 현실과 江湖에 대한 인식의 편차

한국 한시에 있어 자연을 두고 세속과의 단절과 고답적인 삶을 희구하는 정조는 압도적이라 할 정도로 도저한데, 금방 뽑아든 네 수로 이루어진 <山居雜詠> 연작에서도 이러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구름이 깊고 물 또한 깊은데, 찾는 사람 없음을 스스로 기뻐한다(雲深水亦深, 自喜無尋迹(山居雜詠 其一))’는 시구나 ‘산을 둘러 있는 돌길은 위험하여, 인간 세상의 소식 드물다(石逕繞山危, 人間消息稀(山居雜詠 其二))’는 구절, 그리고 ‘산도 높거니와 길 또한 위험하여, 문 밖에는 찾는 손님 드물다(山長路亦危, 門外客來稀(山居雜詠 其三))’ 그리고 ‘서성거리며 홀로 감상하다가, 해가 저물어 사립문을 닫는다(徘徊吟獨賞, 日暮掩柴扉(山居雜詠 其四))’는 구절 등이 그것이다.

적시한 구절에서 ‘雲深’이나 ‘水深’, ‘石逕危’와 ‘山長’ 등은 세속과의 단절이나 차단을 표상하고 있다. 구름이나 물과 산 그리고 돌길로 격절된 공간이니 세속으로부터의 ‘消息’은 ‘드물어지고(希)’ ‘찾아 드는 이 역시 없을 수밖에 없다(無尋迹)’. 그런데 이러한 공간 속에서 세속으로부터의 단절을 ‘스스로 기꺼워하고(自喜)’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조의 발현은 구태여 山僧인 浮休가 쓴 해당 시편에서만이 아니라 僧俗을 가리지 않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토록 도저한 자연친화적인 상상력이 빚어지는 것은 어떠한 연유에서인가. 강호로의 몰입과 세속으로부터의 단절을 願望하며 고답적인 경지에서 소요하려는 희구는 그리고 세속과 자연을 인식론적으로 대립시켜 정조를 발현하는 것은, 우선 정치 현실과의 대척성이 착색되면서 강고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숱한 논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士禍나 黨爭으로 대표되는 현실 정치의 가파름이 속세를 부정적으로 강호를 긍정적으로 표상하는 이해를 더더욱 강렬하게 해온 것이다. 고려말 정치적 혼돈기를 살아간 金齊顔의 작품 <寄無說師>와 관련 詩評을 통해 이를 확인하기로 한다.

세상사는 是非 소리로 어지러우니,
십년토록 머문 진토는 사람 옷깃 더럽혔구나.
흩날리는 꽃떨기, 지저귀는 새소리, 봄바람 살랑이는 속,
어느 메쯤 청산 속에서 홀로 시비를 닫고 있으려나.
(世事紛紛是與非, 十年塵土汚人衣. 落花啼鳥春風裏, 何處靑山獨掩扉.)

작품은 본 바와 같이 江湖와 塵世를 뚜렷이 이분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흩날리는 꽃떨기와 지저귀는 새소리 속에 살랑이는 봄바람은’ 그 자체로도 희구의 대상이겠지만, ‘옷자락을 더럽히는 是非 속의 世事’가 대칭축으로 상정될 때 그 의미가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洪萬宗의 詩評에서 적절히 논평되고 있듯이 ‘遁世之意를 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도모하지 못하고’ 끝내 현실 정치에서의 파란에 희생된 이력을 애석해 하는 것은, 金齊顔 개인만이 아니라 전통 사회를 살아간 士林 일반에 두루 해당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조가 발현되는 작품의 대척점에 현실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을 詩化하고 있는 작품도 존재한다. 사실상 전통 사회에서의 사림들은 한편으로 고답적인 삶을 희구하면서도 동시에 蘊蓄한 경륜을 현실적인 지평에서 실현하려는 의지도 없지 않았다. 이는 선비들에게 부과된 소명이기도 하였던 만큼, 그토록 거친 정치현실이지만 끝끝내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작품이 드러내고 있는 정조에서 그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중종에서 선조 연간을 문신으로 지낸 芝川 黃廷彧의 작품 <官罷向芝上午坐樓院>의 2, 3연이다.

홍진에 묻혔을 땐 거나하게 전원으로 돌아감이 좋다하였건만,
백발에도 오히려 行路하기 어렵다고 노래하누나.
혹여 하늘이 사람을 시험하여 애오라지 스스로를 허여하게 함인가,
비가 도리어 손을 머물게 하여 잠깐의 안식을 얻게 하듯이.
(紅塵?說歸田好, 白首猶歌行路難.
天或試人聊自遣, 雨還留客暫求安.)

洪萬宗이 소화시평에서 작품에 투영된 앙앙한 시인의 심사를 激切하다고 요약하고 있는 대로 강호로 둘러싸인 歸田에 대한 희구와 세속에서의 상승 욕구 사이의 ?? 속에 끝내 처신을 바로 못한 회한이 확인된다. 귀거래를 희구하는 마음과 끝끝내 떨치지 못한 機心 사이에서의 노년의 회한이 감지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강음부호가 세상을 향한 미련에 놓여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하다. 자신의 罷職을 일순간의 一弛一張을 되풀이하는 인생사의 한 이완으로 관념하는 3연에서 작품에 녹아있는 작가 의식의 지향이 어느 쪽을 향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처럼 강호와 현실을 대칭축으로 상정할 때 가능한 대응 방식은 예로 든 두 작품에 보이듯 현실을 두고, 애써 止揚하려는 의식과 구태여 志向하려는 의식으로 양대별될 수 있겠다. 물론 이 경우 강호에서의 逍遙에 대한 희구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재론을 요치 않는다. 그런데 강호와 세속의 이항대립은 일견 명료해 보이나 구체적인 양태는 단순하지 않다. 강호에의 몰입과, 세속에의 좁게는 官界에의 관심이 한 개인의 의식 속에서도 착종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평가받는 이력과 부합하지 않는 정조를 피력하는 작가나 작품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孤山의 시편에서는, ‘바라보면 종남산이 항상 있나니, 빨리 돌아가 동문에 오르리(終南長在望, 還向上東門)’와 같은 정치 현실에의 지향이, ‘차라리 눈도 없고 또 귀도 없이, 전원으로 돌아가 이 평생을 마쳤으면(不如無目兼無耳, 歸臥林泉畢此生)’에서 보이는 脫俗에의 희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대 현실에 대한 지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되는 尤庵에게도 ‘녹수 소리는 마치 성내는 듯, 청산 조용함은 마치 찡그리고 있는 듯. 산수의 뜻을 靜觀하자니, 내가 風塵으로 나아감을 꺼리네(綠水喧如怒, 靑山?似嚬. 靜觀山水意, 嫌我向風塵)’와 같이 현실의 대칭축인 강호를 보다 우위에 두는 인식을 자신의 시편에 투영시키고 있다.
통상적으로 생각한다면 현실과 강호가 대칭축으로 상정되며 양자에 대한 好惡가 선명하게 구분될 것으로 보이지만, 현실이라고 하여 전적으로 부정적으로 이해될 수는 없으며 강호라고 하여 전적으로 긍정될 수만은 없기에 양자에 대한 이끌림과 반발이 적지 않은 변주를 보이고 있다. 보다 극단적으로 자연과 강호의 이분법적인 대립을 근본에서 무화하고 있는 정조도 제출되고 있는데, 沙浦 李志賤에 의해 쓰여진 ‘세속을 떠났다 뉘 다 옳으며, 인간에 머무른다 뉘 다 그르리(物外知誰是, 人間問誰非)’와 같은 시상도 개진되는 것이다. 僧軸을 次韻한 작품이니 다른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강호와 자연이 경계를 허무는 이러한 시상에는 隱者然하는 이들의 부적절한 행태에 대한 반감도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虛名은 虛名대로 찾으며 機心을 간직한 이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이른 시기부터 제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老峯 金克己에 의해 쓰여진 ‘인간 세상 험난하다 그대여 비웃지 말라, 자신의 집이 도리어 급류 중에 있나니(人世險?君莫笑, 自家還在急流中)’와 같은 구절에서도 이미 세상을 향한 機心은 흉중 깊이 숨기고 假漁翁의 포즈를 취하는 세태를 냉소하고 비판하는 정조가 녹아있다. 이러한 날선 비판은 18세기 후반을 살아간 중인문사인 晩翠亭 朴永錫에게도 그대로 확인되는데 機心을 숨긴 假漁翁에 대해 준엄하게 논박하고 있다.

만약 산림에 누워 쉬며 명망을 낚으며 동시에 논밭으로 專利함을 아우르고, 집에는 본디 받은 소득이 있으며 일신은 처사의 명망을 겸하여, 자신은 살찌우고 백성을 학대하여 향곡에서 무단한 자를 어찌 족히 사대부의 행태라 이를 수 있겠는가.(若夫偃息山林以釣名, 兼?阡陌以專利, 家有素封之入, 身兼處士之名, 肥己虐民, 以武斷於鄕曲者, 豈足謂士大夫之行也哉)

논의를 정리하자면 한시에서는 강호와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며 강호에의 몰입을 희구하는 작품이 압도적인 분량을 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에 대한 집착을 내비치고 있는 시편 역시 제출되고 있다. 기실 사화와 당쟁으로 점철된 현실적 국면을 消去한다면 강호와 현실이 가치론적으로 위계지어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실에서 온축한 경륜을 실현하는 일도, 退去하여 立言垂後하는 일도 공히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한데 귀거래를 노래하는 시편이 압도적인 데에는, 앞서의 언급처럼 정치 현실의 가파름이 작용하였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온전히 해명되지 않는 측면도 없지 않을 듯 하다. 기실 名利나 功名에 대한 추구는 누구에게나 내밀하게 간직된 욕구이다. 그렇지만 또한 어느 누구도 그러한 내밀한 욕망을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는데 이러한 점은 전통 사회에서의 사림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저토록 미만한 자연 친화적인 시편들에는 자신이 흉중 깊이 간직한 기심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으려는 방어기제나 스스로를 향한 보상심리가 잠복해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몇몇 진정성을 지닌 소수를 간추리고 관성에 의한 타성적인 작품을 논외로 한다면, 방어기제나 보상심리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강호와 현실의 이분법적 구획을 무화하거나 假漁翁의 機心을 통박하는 작품이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여 이어져 오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논의된 자연과 현실과의 관계지움은 기실 전통 사회의 사림들에게 긴요한 문제였다. 그렇지만 세상살이의 풍파는 如舊하며 당대인의 기심은 상승에의 욕구와 만인을 향한 무한 경쟁으로 치환되어 오늘을 사는 우리를 옥죄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저들 작품에 녹아있는 고뇌의 다채로운 편폭이나 가식에 대한 준엄한 논박은 올바른 삶의 자세를 정초하는 데에 간접적인 귀감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니 현재적 유효성도 적지 않다 하겠다.


4. 한시에서의 생태적 상상력

앞 장에서는 현실의 대칭축으로 상정된 자연을 두고 양자의 관계망에 대한 인식의 편차와 그 의의에 대해 살펴 본 셈이다. 그런데 기실 한시 작품들에는 이러한 이분법적인 인식을 넘어 인간과 자연을 아울러 성찰하며 유장한 인식틀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도 영성하지 않다. 다만 적실하게 생태적인 성찰을 환기하는 작품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아니므로 작품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산문도 아울러 읽으며 그 의의를 점검하려 하는데, 먼저 제시한 작품은 無用秀演의 <敬次三淵先生高韻> 중 한 구이다.

시내와 도랑은 벗할 만하고, 고기나 새도 영성을 지닌 것을(溪山斯可友, 魚鳥亦含靈).

한 눈으로도 자연친화적인 이해가 보다 심원한 통찰로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벗으로 대상화된 溪山을 넘어, 계산에 깃든 一體萬物이 모두 靈을 함장하고 있다고 관념하고 있다. 어쩌면 ‘一體萬物, 皆唯佛性’을 근간으로 하는 불교적 사유나, 齊物論에 기반한 도가적 사유에 착색된 전통 사회에서 이러한 이해를 담은 시편이 제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해당 시구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모든 萬象은 靈性을 간직하고 있으니, 만상이 인간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이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含靈’한 존재들이 조화로운 살이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일방이 다른 일방을 이용하거나 상호간에 쟁투가 벌어지고 있으니 그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 역시 작품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제시된 작품은 谿谷의 <索居放言十首> 중 첫 번째 시인데, 그러한 쟁투에 대한 반성의 편린을 읽을 수 있다.

큰 벌레는 작은 벌레를 먹고, 강한 이는 약한 이의 고기 먹는다.
삼키고 먹는 이 세계에서, 사물은 서로를 해친다.
강한 이라고 어찌 항상 강하랴, 때로는 더욱 굳센 적을 만난다.
힘에 맡기면 힘은 그 끝이 없고, 지혜에 맡기면 지혜도 갖가지다.
지인은 나와 남을 끊음으로써, 그 마음은 허공처럼 넒어진다.
허공은 사물을 이기지 않고, 사물도 허공을 이기지 못하나니.
(大蟲食小蟲, 彊者飽弱肉. 呑啖世界內, 物物相殘賊.
彊者豈常彊, 有時遇勍敵. 任力力無盡, 任智智相百.
至人斷人我, 心與虛空廓. 虛空不勝物, 物亦勝不得.)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벌어지는 서로가 서로를 물고 무는 쟁투에 대해 형상화하고 있다. 가장 강인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손쉬운 처방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동원될 수 있는 ‘智力’이 무궁하기에 결국은 또다른 강자에게 약육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정을 일깨우며, 人我의 사슬을 끊는 至人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일체의 경쟁과 쟁투가 없어질 수 있다는 진단에 이르게 된다.

사람은 얼마 안되는 길이의 혀로, 신선한 기름기의 온갖 맛을 먹는다.
그것이 목구멍을 넘어가자마자, 곧 더러운 똥과 함께 하는 것을.
(人爲膚寸舌, 百味窮鮮?. 不知?過咽, 便與糞穢俱.)

同題各首의 이어지는 작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으니, 인간의 무한정한 욕망이나 탐욕스런 추구도 결국은 허망하다는 점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谿谷의 해당 작품에서는 오늘날의 심층 생태학이 도달하고 있는 깊이에 해당된다 할 혜안을 마련하고 있으니 근본적인 층위에서의 성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어지는 작품은 순조 연간을 살아간 晴蓑 趙雲植의 <養魚>인데 역시 유사한 성찰이 제시되어 있다.

새로 심은 씨고기 한치도 못되는 걸, 어린 놈들 보자마자 낚시바늘 두드리는구나.
살 곳 얻어 꼬리치며 기뻐 말라, 방생이란 원래가 살생할 마음인 것을.
(新種魚苗未滿寸, 已看穉子却敲針. 爾莫洋洋欣得所, 放生元是殺生心.)

어린 아이들이 못이나 내에 모여들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은 일반적으로는 목가적인 풍경일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서경적 풍경 속에 잠복한 이면의 속성을 날카롭게 잡아 내고 있다. ‘放生’은 기실 ‘殺生’에 다름 아니라는 진단은 谿谷의 작품에서 보이는 성찰을 보다 예각화하여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또한 아무래도 물상과 물상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相殘보다는, 인간이 물상을 대상화하여 벌어지는 殘賊이 보다 문제시될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적시된 작품들을 두고 생태적 관심이 기저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오늘의 우리에게 소중한 성찰을 제공하는 것으로 高評하며 그 의의를 詛嚼하는 것도 이미 충분히 의미있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논의가 이 지점에서 머문다면 현실적인 효용이 반감되리라는 것이 발표자의 판단이다. 현실적인 정황이 消去된 진공상태에서라면, 곧 순연히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인 층위에서라면 인간과 물고기 등의 만물이 輕重이나 本末에 있어 차이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순연히 이론적인 층위에서의 사색이 웅숭깊다는 것을 확인하는 지점에 머문다면 현실적인 난점이나 오늘의 시무를 타개할 자양분을 얻기에 충분히 않을 것이니, 현실적인 부면은 선험적인 이론만으로 선명한 해법이 구해지기에는 만만찮게 중층적이며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부면에 착목하여 시상을 개진한 작품이 있으니 함께 읽으며 이에 대해 좀더 살피기로 한다. 東陽尉 申翊聖의 <詠隧身物其八 魚網>이다.

寒食, 穀雨 가까워져, 뺨 부비며 물고기 떼 여울 올라오네.
때 만났다 싹쓸이함은 내 뜻이 아니니, 부러 아이시켜 그물코 성글게 만든다네.
(寒食風前穀雨餘, 磨?魚隊上灘初. 乘時盡物非吾意, 故敎兒童結網疎)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마지막 구에 투영된 시인의 인식인데 특히 ‘그물코 성글게 만든다네(結網疎)’란 언명이다. 때 만났다고 하여 개울 물고기를 투망으로 전부 잡지 않으려는 시인의 마음은 앞서 제시한 谿谷이나 晴蓑와 다르지 않으니 역시 생태적 관심이 기저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앞서의 시편들과는 인식의 편차가 드러나니, 바람직하지 않은 행태를 타개하려는 해법이 같지 않은 것이다. 곧 谿谷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질적으로 高揚된 ‘至人’이 되는 것에서 해법을 구하고 있으며, 晴蓑의 경우에는 ‘放生’이 곧 ‘殺生’과 다름 없다는 진단을 하고 있으니 해당 작품에 투영된 인식에만 국한한다면 필경 谿谷이나 晴蓑는 물고기를 잡는 행위 자체를 매도하였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당대인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들도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한다면 결코 손쉽게 ‘至人’이 될 수 없으며 방생하여 기른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생존해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정이 그러한데, 至人으로의 질적인 비상에서 해법을 찾는 것이나 相殘하는 양태를 부정적으로 진단하는 데에 머무는 것은 현실적으로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結網疎’라는 구절에서는 그와는 달리 현실적인 부면을 도외시하지 않으며 나름의 해법을 도출하려 하고 있다. 곧 만물을 대상화하여 殘賊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한편으로 인간은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직시하여 그물코를 성글게 하여 일정 부분만을 취하는 것으로 절충하고 있으니 현실적인 정합성은 보다 더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해당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인식틀은 東陽尉 개인에 의한 돌출적인 인식이 아니기에 그 의미를 더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작품에서 확인되는 인식은 한두 세기를 경과하며 당대 지성들의 저작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관련된 글들을 되짚으며 그 추이를 확인하도록 한다. 우선 제시한 앞의 글은 楓皐 金祖淳의 것이며 다음 글은 東谿 趙龜命의 글이다.

사람이 蟲魚나 鳥獸를 먹는 것은 平常이라고 하고 벌레나 물고기 짐승이 사람을 먹는 것은 變怪라고 하는데, 平常이라는 것은 과연 하늘의 뜻이며 變怪라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닌가? 사람은 蟲魚나 鳥獸와 함께 하늘로부터 났는데, 하늘이 과연 사람이 먹게 하기 위해 蟲魚나 鳥獸를 만들어 낸 것인가? 이러하다면 하늘은 과연 사람에 대해서만 편애하는 것인가? 蟲魚나 鳥獸 역시 하늘이 사람에게만 사사로운 것을 알고 기꺼이 사람들에게 먹히려 하겠는가? 하늘이 만약 사람에게만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면 어찌 蟲魚鳥獸라고 사람을 먹을 수 없겠는가? 먹는 것이 평상이지 변괴가 아니라고 한다면 蟲魚鳥獸들도 사람에게 먹히게 되면 그 마음에는 또한 반드시 변괴이지 평상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蟲魚鳥獸들과 사람이 서로 먹는 것을 하늘은 어찌하여 許與하겠는가?

천지가 만물을 만듦에, 사사로이 사람에게 후하고 물상에게 박한 것은 아니어서, 균등하게 같은 기를 부여하였는데, 옳은 것을 받은 경우에는 사람이 되고 치우친 것을 받은 경우에는 물상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사람과 물상은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다. --- 무릇 사람을 기르는 데 소용됨이 이것의 책무이니 무릇 동포를 거느리고 당여를 먹는 것이 어찌 다시금 인간의 이치이겠는가.

제시된 구절을 따라 읽으면 앞서 읽은 谿谷이나 晴蓑의 시편에서 확인되는 본질적인 층위에서의 고뇌가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과 동물을 두 항목으로 범주화하였을 때 사람이 동물을 먹는 것은 平常이며 동물이 사람을 먹는 것은 變怪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楓皐는 이 점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사람이나 동물이 ‘동일하게 하늘로부터 생겨났다’는 自覺에 바탕한 것이다. 하늘의 마음이 사람과 동물에게 공평하게 할애되었다면 어떤 미물이라 하더라도 동물이 인간에게 대상화되어 수단으로 쓰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東谿의 언명 역시 동일한 함의를 담고 있으니 천지가 물상을 빚어낼 때 동일한 기를 균등하게 품부하였는데 물상들은 인간들의 대상이 되어 먹이가 되고 있으니 참다운 人理라 이를 수 없다고 관념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논지가 이 지점에서 그친다면 짐작컨대 역시 谿谷이나 晴蓑의 시편에서 보았던 인식과 유사한 진단이나 해법이 제시되는 쪽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글에서는 원론적인 층위에 머물지 않고 東陽尉의 작품에서 언뜻 확인되는 현실적인 부면에 대한 고뇌가 이어지고 있다.

옛 사람들은 어찌하여 사냥하거나 물고기 잡는 일을 가르쳤는가? 佃漁를 가르친 것은 성인의 마음이 어쩔 수 없는 데에 바탕한 것이니,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 蟲魚鳥獸들은 그 同類 사이에서 약한 놈의 고기를 강한 놈이 먹는다. 사람들도 가르침이 없다면 역시 蟲魚鳥獸의 마음이다. 同類 사이에서 약한 것이 먹이가 되고 강한 것이 먹는다면 얼마나 많다고 서로 먹어 다 없어지지 않겠는가?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천지간에 난 것으로 오직 인간이 가장 신령하니, 천지의 일을 성취케 하고 천지의 和順함을 거들고 도와 음양으로 하여금 그 도를 잃지 않게 하고 만물로 하여금 저마다 그 생을 완수하게 하는 것은 사람만이 진실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물의 주인이 되는데, 인정이 먹지 않으면 주리게 되며 먹음에는 반드시 고기로써 자양하여야 하므로 부득이하게 물상에서 취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나를 그르다 여긴다면 저들은 능히 그 삶을 완수할 수 없다. 만을 살리고 하나를 먹는 것을 저들도 반드시 사양함이 있지 않을 것이며 나의 취함도 무해한 것이다.

楓皐의 경우,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충어조수가 대상화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원론적인 이해에 바탕하여 삶을 이끌기에는 어려움이 있기에 그러한 난점을 타개하기 위해 고기를 먹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 자신의 논리를 정리하고 있다. 곧 인간은 고기를 먹지 않으면 생존을 영위해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고기 중에서 가장 맛난 것은 바로 사람인데, 사람 사이의 ‘相食’을 용납할 수 없어 ‘不得已’하게 ‘匪類’를 먹게 하여 ‘佃漁’을 허용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東谿의 경우 역시 물상들이 同胞이고 黨與이니 懸殊의 차이는 없다는 원론적인 층위에서의 시각은 공유하고 있지만, 사람이 萬物의 주재자라는 인식 아래, 전부가 아니라 부분을 먹는 것을 허여하고 있는 것이다.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를 비유로 이끌어들인 것도 흥미로운데, 피치자들이 일정 부분을 賦役으로 희생하는 것이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듯이 물상의 경우에도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萬 중에 하나는 인간을 위해 허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에 이르고 있다. 楓皐와 東谿의 단상을 함께 읽으며 우리는 동양위의 시구에 등장하는 ‘結網疎’가 앞서 살핀 谿谷이나 晴蓑의 인식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谿谷이나 晴蓑가 인간과 만물을 공히 균일하게 바라보며 입론을 개진하고 있음에 비해 이들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그 속에서 가능한 절충점을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存齋 魏伯珪는 천리에 대해서는 아예 논급하지 않으면서 먹고 먹히는 인간과 대상의 관계를 올곧은 사람과 패역한 이들의 관계와 등치시키고 있기도 하다.

물고기를 마땅히 잡아 먹을 수 없다면, 성인이 반드시 그물 얽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큰 것이 작은 것을 먹는 것은 이치의 마땅한 바이다. 그렇지만 앎이 없는 것은 먹혀 마땅하지만, 앎이 있는 것은 먹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 桀紂가 湯武에게 먹힌 바 된 것은, 桀紂가 또한 물고기일 뿐이었으니, 그렇다면 사람으로 능히 먹히는 것이 되지 않을 자는 진실로 드물다. --- 南袞은 禽獸의 心腸으로 靜菴을 먹었으니 이는 천지의 변괴이다.

존재는 無知한 것은 먹어도 되며 有知한 것은 먹어서는 안된다는 절충안으로 물상을 대상화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존재의 경우 이러한 관념을 인사의 治亂에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하겠는데 南袞이 靜菴을 해꼬지한 것을 無知한 자가 有知한 자를 해친 天地之變으로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 사람 사이의 ‘相食’만은 피하기 위해 佃漁를 허용하였다는 언급이나 사람과 만물이 균일하나 인간이 주재자라는 언급에는 인간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설명하려는 유가적 시각이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논의를 정리하도록 한다. 생태적 상상력이 개입된 작품을 살피면, 본원적인 성찰을 베풀고 있는 작품군도 있으며 현실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그 속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작품군도 함께 하고 있다. 비약하자면 전자가 불가나 도가에 친연하다면 후자는 유가적 가르침에 보다 경도된 것으로 판단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근원에서 베풀어지는 성찰이라면 불가나 도가의 사유가 보다 유장한 의미를 지니는 반면 현실적인 부면에서의 적합성이 고려된다면 분별에 대한 고뇌를 정치하게 밀고나간 유가적 사유가 보다 정합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 속에 저와 같은 상보적인 이해가 함께 하는 것은 소망스러운 사실로 보인다.

아무튼 살핀 작품들에 투영된 선인들의 고뇌는 근원에서 혹은 현상에서 오늘의 전지구적인 재앙에 대해 서로 다른 울림을 던지고 있는 바, 오늘 우리의 몫은 저러한 울림을 이 자리에 맞게 재해석하며 한편으로 함의를 풍부히 하는 일일 것이다. 되풀이 하자면 우리 전통을 담아내고 있는 한시에서는 웅숭깊은 성찰은 그것대로 이루어지면서 현실적인 부면을 고려한 이해는 또한 그것대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反自然’을 넘어 ‘伴自然’을 모색하려는 오늘날에도 적절한 반성의 토대가 되리라는 점은 자명하다 하겠다.



5. 마무리

이상에서와 같이 이번 발표에서는 한국 한시에 투영된 자연의 제양상을 개괄하고 자연을 대상으로 한 한시 작품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으로 보이는 진퇴를 사이한 갈등을 집중적으로 살펴 그 의미를 고구하였으며 뒤이어 오늘날의 삶을 성찰할 계기가 될 수 있는 생태적 관심에 대해 점검하여 보았다. 현상적인 삶의 모습은 한 두 세기 저쪽과 오늘이 단층적이라 할 정도로 판이하지만, 검토한 시편에 응축된 고뇌나 갈등은 오늘의 時務를 바라보는 데에도 指南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틈이 많은 중에도 더더욱 미비한 점을 들어 앞으로의 과제로 삼으며 발표를 마치도록 한다. 한시에 투영된 자연의 전반적인 양상을 검토하며 오늘에 유의미한 면을 살피려 하였기에 불가피한 점이 없지 않지만, 시대의 異同에 따른 자연관의 추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못하였다. 또한 바야흐로 ‘녹색의 시대’로 깊숙하게 진입하고 있으니만큼 현대 인문학이나 문학 비평에서도 생태적인 관심이 활황을 보이고 있는데 역시 그에 대해서 관심을 할애하지 못하였다. 후자의 경우에는, 과문한 탓도 있지만, 전통에서 빚어낸 사유와 산업화를 경과한 오늘의 사유가 유사한 틀을 보이고 있다는 피상적인 확인만으로는, 양쪽의 지양을 통한 보다 적절한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 별다른 보탬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였다.




漢詩에 투영된 自然과 현재적 含意

이 향 배

한시의 창작 대상에 있어서 가장 밀접한 것이 자연이다. 선조들에 있어서 자연은 곧 학습의 장이며, 수련의 장이며, 遊賞의 대상이며, 憧憬하는 理想鄕이며, 遁世의 隱居地요 생활의 터전이었다. 선조들은 다각도에서 자연을 접근하고 활용하였기 때문에 한시에 나타나는 양상도 다양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를 체계적으로 밝혀낸다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며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표자는 현대적인 입장에서 한시에 투영된 자연에 대해 통시적으로 고찰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는 전통 한시를 새롭게 접근하려고 모색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또한 결코 쉽지 않은 연구인데도 발표자는 한시에 반영된 자연의 양상을 분석해내는데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좀더 발전된 연구 진행을 위해 몇 가지 의문나는 점을 질문하고자 한다.

1. 자연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범위에 대한 규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자연은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山水와 같은 자연을 의미하거나 생리적인 현상 등을 나타내는 자연(주22의 경우), 理의 所當然을 의미하는 자연 등등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발표논고에서 사용된 의미는 이러한 세가지 측면을 포함한 의미인지 아니면 산수와 같은 자연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구분해줄 필요가 있지 않은가.

2. p2 주4번 시에 대해 발표자는 강호한정이라는 요지로 해석했는데 그보다는 가족간의 그윽한 정을 그린 시가 아닐까.

3. ‘4.한시에서의 생태적 상상력’에서 산문 인용이 너무 많아 제목과 상충된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한시를 좀더 보완할 필요가 있으며 인용된 산문은 보조자료로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4. 큰 제목이 한시에 투영된 자연과 현재적 함의인데 ‘현재적 함의’는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여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