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시: 마리아 칼라스의 부음을 듣고 - 황 금 찬 (시인)
꾀꼬리는 잠드는가 - 1977. 9. 16 마리아 칼라스의 부음을 듣고 - 황 금 찬 (시인) -
마리아 칼라스
그대는 금세기의 가장 높은
노래의 봉우리였으니
이제 어느 나라에 가서
또 누구의 행복을 노래 하려는가.
그대가
푸치니의 오페라의 영창곡을 부를 때,
영국의 청중은 20분간이나
기립하여 박수를 보냈고
이태리, 불란서, 독일, 미국 청중은
사람에게 귀가 있음을
진정 하늘에
감사 드렸느니라.
나비 부인 중의 「어떤 개인 날」,
꿈꾸듯이 불렀지
라 보엠의 「내 이름은 미미」,
병색 짙은 음성
모두 영혼의 기도였어라.
이화여대 강당에서
재청으로 부른 노래
쟈니 스키키 중의
「오 ! 사랑하는 아버지」
내 같은 하늘 밑에 살아 있는 것을
그리도 소스라치게
놀랐느니라.
이제 노래의 등불은
세계의 창에서
또 내 귓가에서 꺼지고 있는가.
세계의 꾀꼬리는
이 날 잠들어 갔다.
(출처: sunslife.com)
오페라 역사상 위대한 디바, "마리아 칼라스"의 마지막 유산으로 T.V, 영화, 오페라에 쓰인 마리아 칼라스의 가장 유명한 음악 모음집, "MARIA CALLAS (Popular Music from TV, Films and Opera)"가 발매되었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간 마리아 칼라스, 그녀의 전설과 진실에 관한 짧은 이야기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글: 2000-11-28
Maria Callas....?
마리아 칼라스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로, 그녀의 명성은 일반적인 예상을 뛰어 넘어 훨씬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살아있는 전설 내지는 여러 모습을 지닌 신화적인 인물로까지 추앙 받고 있다. 그리고 때때로 특정 집단의 이익에 맞게끔 미화되기도 한다. 최근 어느 설문조사에서 프랑스 사람들에게 생각나는 여자 가수의 이름을 물었더니 대부분 에디뜨 삐아프와 마리아 칼라스를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누구나 그 동안 삐아프의 노래를 들어왔으므로 그녀의 노래를 기억해 낼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이 그리스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진정 알고 있는지, 그녀에 관한 진실과 그녀의 생애, 그리고 그녀가 불렀던 곡들까지 알고 있느냐는, 즉 한 마디로 그녀가 받고 있는 열정적이고 경의에 찬 찬사의 주된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칼라스의 예술'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질문과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 그녀만의 분위기, 상류계급의 명성, 변덕스러운 성격과 스캔들, 보상받지 못했던 아리스토틀 오나시스(1906-1975)를 향한 사랑,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나코 왕가와 연결시켰던 우정 등 이 모든 것이 총체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물론 그녀의 변덕스러움과 스캔들은 증명되지도 않은 사실들이며, 수없이 많이 떠도는 이런 모호한 주장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내놓지 못할 것이다. 실제 그런 근거 없는 스캔들은 그녀의 실제 생애에서 발견되지 않았을 뿐더러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철저한 프로 정신과 엄격한 삶의 기준이 이런 음악 외적인 흥미위주의 것에는 어떠한 단서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두다 아는 것처럼 그녀는 파리의 샤이롯 궁 근처에 위치한 조르쥬 만델가 36번지의 아파트에서 수년간 반 은둔 상태를 보낸 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녀가 사망한 다음날 각 언론들은 '칼라스와 함께 위대한 비극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 암호랑이의 여신인 위대한 여인의 급작스런 죽음'(L'Aurore), '칼라스, 세기의 프리 마돈나'(L'Humanite), '마리아 칼라스, 가장 위대한 디바 - 마리아 칼라스의 영광'(Le Figaro)이라며, 이구동성으로 그녀를 기리며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녀를 디바(문자 그대로 '여신')라고 부르는 데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 그녀의 욕심 없음과 헌신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같은 이유로 칼라스는 오늘날도 여전히 마지막 디바로 존경받고 있으며, 고상하고 현실도피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낭만주의'의 화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지닌 의미는 현시대에서는 모순이 될지도 모른다. 오늘날 그러한 이미지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심지어는 눈에 거슬리며, 때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아티스트로서의 이미지 이상으로 개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자신의 통제권과 사적인 마력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명성이 가진 모순이란 바로 칼라스의 생애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녀의 사적인 부분에서 유래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런 부분은 현시대에 가수로서 가지는 그녀의 중요성이나 우리에게 전하는 그녀의 음악적 유산을 규정하는데 전혀 불필요한 것이며) 당연히 그런 사적인 부분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그대로가 최선일 것이다. 반면에 그녀의 공적인 삶 즉, 자유롭게 공연할 무대를 선택할 수 있었고, 언론과 음악계의 비평에 자신을 과감히 노출시켰던 가수로서의 그녀의 삶은 단지 이야기의 배경에 상응할 정도로 격하되어 있다는 점이다. 칼라스의 생애에서 이런 음악 외적인 측면을 시발점으로 삼는 것은 사전지식이 없는 대중들을 위해서는 비교적 쉬운 방법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빛나는 업적과 눈부신 활약에 매료된 사람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것 즉, '세기의 목소리'라 불리는 인물의 음악세계를 찾아야 한다. 그 음악 세계란 자신이 맡았던 역할의 여주인공들이 지녔던 성격과 칼라스라는 여성이 지녔던 기질이 결합되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시대의 가장 위대한 해석가의 한 명인 칼라스의 놀라운 목소리를 담고 있는 이 앨범의 또 다른 목적이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위대함 뒤에는 음악가로서 또한 비극적인 여배우로서의 재능이 최우선적으로 그리고 가장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루치노 비스콘티(1905-1976)에 따르면 그녀는 '이탈리아의 사라 베른하르트'라 불리운 엘레노라 뒤스 이후의 가장 위대한 비극적인 여배우라고 한다. (분명 그녀 앞에서 얼어버린) 어느 신출내기 기자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1922-1975)가 감독한 비음악적 영화에서 칼라스가 맡았던 메데아 역에 대해 질문했을 때 일이다. '칼라스 당신은 이제 여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하려 하시나요?' 라고 묻자, 칼라스는 고상하게 그러면서도 강하게 자신은 항상 여배우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수로서의 모습과 그 전설적 부분을 조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명성의 지표'를 살펴볼 수 있는데, 물론 비과학적일 수 있지만 전설적이 면이 음악적인 명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958년 12월에 칼라스는 '파리 매치'(12월 20일에 발간된 506호)의 커버를 장식했고 그후에도 두 번 커버로 나왔다. (도대체 이런 영광을 누린 뮤지션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그녀는 1957년 라 스칼라에서 비스콘티가 연출하고 자신이 출연했던 글룩의 오페라 "타우리안의 이피게니아"의 의상을 입고 나왔다. 1958년에는 전세계적으로 가수 겸 여배우로 그녀가 알려졌고 그녀의 명성은 당시의 음악계에서 부정할 수 없는 주된 줄기이기도 했다. 파리 매치(Paris Match)는 'Callas on the billboards'라는 제목의 박스 기사에서, '그 오페라에 이 위대한 프리마돈나가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사건이었다'고 했다. (프리마돈나는 말 그대로 '주연 여배우', 혹은 주인공 역할을 맡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표지에 실린 또 하나의 박스 기사는 '사회적 현상'이라는 제목의 브리짓 바르도에 관한 글이었다. 두 인물의 유사성은 곧바로 만들어졌고 칼라스의 명성에 대한 이유를 하나 더 추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칼라스는 연주자로서의 천재성을 발휘해 음악과 오페라에 많은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게 끔 만들어 낸 위대한 자질을 가진 실로 사회적 현상이 되어 버린 인물이었다.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햅번 만큼이나 가냘픈 몸매와 함께 그녀가 지닌 흠잡을 데 없는 여성의 이미지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에 이내 각인 되었다. 그리고 바야흐로 칼라스의 음악은 잠시 그 이미지 속에서 배제되어 버린 상태이기도 했다. 곧이어 '파리 매치'는 두 번째 더블 페이지를 마련했는데 '푸치니의 손녀의 집에서 칼라스는 이브닝 가운을 입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푸치니의 손녀 비키는 밀라노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였고, 그 옷은 '제4공화당 집권말기의 코티 대통령이 연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되었던 1958년 12월 19일에 파리 오페라에서 있었던 갈라 콘서트를 위한 의상이었다.) 사실, ('마지막 리허설. 16일 화요일, 그녀는 프랑스행 기차를 탄다. 목적지 : 리츠') 라는 제목의 그 페이지 속에 담긴 50년대의 아이템은 가수로서의 그녀의 경력에 변화가 일 것이라는 조짐을 보인다. 세상의 여자였던 칼라스는 가수로서의 성공하기 위해 매진하는 중이었고 청소년 시절부터 그녀 인생의 전부였던 일에만 헌신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녀에 관한 신화의 감춰진 면에 초점을 맞춰보자.
칼라스가 극도로 힘겨운 오페라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계속된 노력, 정력, 자신은 물론 타인에 대해 확실히 요구하는 자세, 프리마돈나로서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실력을 갈고 닦은 그녀의 마음이 화려한 경력을 낳은 비결이었다. 그녀가 행한 혹독한 노래연습은 그녀에게 있어서 매일 섭취해야 하는 식량과 같았다. 그녀의 어머니 에반겔리아(Evangelia)는 그녀의 두 딸, 큰딸 재키(Jackie)와 5살 어린 마리아(Maria)를 출세시키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마리아의 출생은 마리아의 부모인 칼로게로풀로스(Kalogeropoulos) 부부가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에 사망한 아들 바시리(Vassili)의 기억을 지우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 때문에 서로 거부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떤 긴장이 두 모녀지간에 맴돌았고 이들은 평생을 떨어져 살았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신의 언니가 노래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점 때문에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열쇠는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녀가 지녔던 목소리나 천재적인 재능과는 별개로) 목표을 향해 한 방향으로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아테네의 음악원을 다니던 시절에 마리아 트리벨라(Maria Trivella)와 그 뒤에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엘비라 데 히달고(Elvira de Hidalgo, 1988-1980)라는 스페인 출신의 비르투오조 성악가로부터 바른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1908년에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 역으로 데뷔한 히달고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기에 앞서 1920년대말까지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으며 활동한 성악가였다.) 히달고는 종종 칼라스의 학창시절을 묘사하길, 음악원에 제일 먼저 와서 가장 늦게 나가는 학생,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수업 뿐 아니라 다른 학생의 레슨 시간에도 참가해 베이스부터 소프라노까지 모든 음악을 배우려고 노력했던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칼라스는 그녀의 발성과 표현법, 특히 벨 칸토 부분은 히달고에게 배운 것이었다. 칼라스의 첫 번째 스승이었던 히달고는 음악적 영향을 미친 존재이자 어떤 면에서는 그녀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칼라스는 8년간 그리스에서 머물면서 공식 데뷔에 앞서 경력을 쌓았는데, 당시가 전시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이 기간 동안의 활동의 증거들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세워진 헤로드 아티쿠스 극장에서 공연한 베토벤의 피델리오가 마지막 참가 작품이 될 때까지 줄기차게 오페라와 오페레타, 그리고 오페라 아리아와 가곡 심지어는 독일 가곡까지 부르는 콘서트가 이어졌다. 히달고는 칼라스에게 이태리야말로 성공을 약속하는 확실한 나라라고 누누이 말해왔지만 마리아는 미국을 동경했다. 미국은 그녀와 매우 가깝게 지낸 아버지가 살고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뉴욕은 혹독한 기다림(작업 중에는 잠깐의 휴식도 없었다), 희망과 실망을 요구하는 곳이었다. 결국 운명은 그녀를 다시 대서양을 건너게 했다. 히달고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곧바로 칼라스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성공을 보장하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바로 1947년에 베로나의 아레나 극장에서 폰키엘리의 "라 지오콘다"로 이태리 오페라 무대에 처음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칼라스가 이태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태리는 곧 그녀의 남편이 될 지오바니 바티스타 메네기니(Giovanni Battista Meneghini, 1985-1981)를 만난 곳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두 번째 스승이자 大지휘자인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 1978-1968)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세라핀은 칼라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스승이었다. 히달고가 그랬던 것처럼 세라핀도, 칼라스에게 발성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일단 기회를 맞아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음을 입증시킨 인물이다. 세라핀의 지휘로 칼라스는 길고 힘든 작업 끝에 그녀의 위대한 역할인 "노르마"를 해냈고(그는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으로 데뷔했다), 이태리인들이 그녀의 목소리에 익숙해지게 되자 당시의 관례대로 이태리어로 바그너의 곡을 노래하기도 했다.
1948-1951년 기간은 칼라스가 이태리(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멕시코도 포함)를 장악했던 시절이었다: 베니스의 '라 페니체', 나폴리의 '산 카를로', '로마 오페라', '피렌체 국립 가극장'까지. 그런데 밀라노의 '라 스칼라'만이 빠져 있었다. 그녀는 1950년에 테발디(Tebaldi)를 대신해 "아이다"로 라 스칼라에 데뷔했는데, 당시 그녀가 해낸 최고의 역할 가운데 하나였다. 1951년 피렌체의 '마지오 뮤지칼레'에서 베르디의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를 성공적으로 공연해내자, 마침내 라 스칼라도 그녀에게 매료됐다. 칼라스는 시즌 개막 행사(12월 7일에 시에서 후원하는 聖암브로스 축제)에 초대되어 "시실리아섬의 저녁기도"를 다시 공연했다. 1952년에는 베르디의 "맥베드"로, 1954년에는 스폰티니의 "베스타의 무녀"로, 1955년에는 "노르마", 1957년에는 베르디의 "가면 무도회"로 다시 그 영광을 재현했다. 1958년까지 연이은 성공을 이룩한 그녀는 그야말로 '라 스칼라의 여왕'(칼라스의 철자를 바꾸어 놓은 듯한)이었다. 그녀는 다양한 레파토리를 선보여 배역이 극과 극으로 치달을 정도로 서로 배타적인 역할까지도 시도했고, 다양한 목소리를 시험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EMI를 통해 많은 레코딩 작업을 함고 동시에 그녀의 국제적 경력도 점점 넓어졌다. 이 시기는 또한 비스콘티(Visconti)와 함께 오로지 라 스칼라에서만 작업한 기간이기도 했는데, 20세기의 가장 중대한 오페라 공연("라 트라비아타", "몽유병의 여인", "안나 볼레나")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과도하게 공연에 출연하자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예술적인 가치 면에서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지만) 최고수준에서 열정적으로 실연했던 몇 년간의 여파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칼라스의 경력은 쇠퇴기를 맞이했고, 특히 오나시스(칼라스의 여성적인 면과 그녀가 지닌 심오한 그리스적인 자질을 끌어내는 법을 알고 있던 인물)에 의해 버림받은 후부터는 자괴감에 빠진 채 은둔생활을 했고, 음악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기도 했다. 이런 은둔생활은 1971년부터 1972년까지 있었던 뉴욕 마스터 클래스 강의로 종결된다. 하지만 그 수업에서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지를 가르칠 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타고난 천부적 소질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1973년에는 토리노에서 단 한번 연출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그녀의 고별연주 여행은 과거의 명성은 추억으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가슴 아픈 여행이었다.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오페라 주인공들처럼 비극적일 정도로 찬란한 자신의 운명에 괴로워했다. 노르마, 비올레타, 토스카, 메데아는 모두 자신의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여인들이었다. 다행히 이 음반세트는 우리가 평생의 빚을 진 그 아티스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으며, 나아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예술에 대한 증인이 되고 있다.
자료제공 : EMI (글 : 김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