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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동백림 사건

梅君子 2006. 7. 16. 12:44
    [민주화 발자취] 동백림 사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67년 7월 8일 ‘동백림(東伯林ㆍ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적화공작단 사건 제1차 진상발표문’을 발표했다.

‘대학교수와 의사, 예술인 및 공무원 등이 1958년 9월부터 67년 5월 사이에 동독 주재 북괴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접선, 간첩활동을 해왔다. 현재까지 194명이 연루됐으며, 특히 명지대학 조교수 임석진(林錫珍ㆍ35)박사등 7명은 소련ㆍ중공 등을 경유하여 직접 평양을 방문, 밀봉교육을 받고귀국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이어 11~15일과 17일까지 매일 한차례씩 ‘제7차 진상발표문’까지 추가 관련자들의 혐의사실을 발표했다. 특히 3차 발표문과 6차 발표문에서는 당시 국제적으로 명성을 재서독 음악가 윤이상(尹伊桑ㆍ당시50세)씨와 재불 화가 이응로(李應魯ㆍ당시 64세)씨가 연루돼 구속 수감되었음을 발표하고 “임의동행 형식으로 이들을 한국에 데려왔다”고 밝혔다.

이 사건의 발단과 관련, 당시 서독에서 유학하던 중 평양을 2회 방문했던임석진(현재 명지대 명예교수ㆍ한국헤겔학회장)씨의 설명.

“귀국 후 대학 강의를 맡고 있었다. 북한을 배신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불안감이 컸다. 그들이 나의 모든 것을 항상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5월 3일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고, 6월 8일 7대 총선에서 공화당이 신민당에 압승(의원수 157 대 61)했다.

 특히 총선을 둘러싸고 대학생과 야당을 중심으로 한 부정선거 시비로 전국이 들끓고 있었다. 사실 그러한 데모의 배후에 북한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평양을 두 번이나 방문했던 나로서는 유럽 유학생들의 실상과 북한의 의도 등을 정부에 알리는 것이 나는 물론 비슷한 처지의 유학생들에게도 ‘살 길’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더구나 이 같은 사실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신고하는 것보다 박정희대통령에게 직접 고변하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김형욱은 워낙 무지막지했으니까. 결국 박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후 수사가 시작됐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안이 훨씬 크게 부풀려졌다. 이후 윤이상씨 등은 인터뷰에서 나를 ‘중앙정보부의 첩자’로 몰아세우기도 했지만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회고록과 수사 관계자들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67년 초부터 북한의 대남공작이 활발해지고 그 대상이 북측이 활동하기쉬운 유럽에서 횡행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특히 북측은 유럽의 유학생 등을 포섭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공작단’을 만들어 남한으로 우회침투하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간지 특파원이 체코의 프라하에서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동베를린은 유학생들이나 교민들의 왕래가 더러 있었지만 프라하는달랐다. 그 곳에는 특파원이라 할지라도 용이하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특파원의 실종은 해당 신문사에서 알려 주었다. 그 동안의 정보와 그사건을 계기로 서독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북한의 공작에 대한 심각한 내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상부로부터 ‘임석진 교수의 고변’이 있으니 조사해 보라는 지시와 그의 자술서를 전달 받았다. 임 교수의 고변이 사실 확인에 많은 참고가 됐음은 사실이다.”

이후 이 사건은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단 사건’으로 발전했고, 서독과프랑스의 기자는 물론 정부의 공식 항의단 등이 국내에 들어와 관련 피고인의 재판을 방청하는 등 국제적 관심사로 비화했다.

“6ㆍ25 때 헤어진 뒤 15년 만에 이북에 있는 남편의 소식을 들었으나 이것을 당국에 알리지 않은 행위를 처벌해야 하는 것이 조국의 현실이다.

”1967년 12월 6일 결심공판에서 서울지검 공안부 이종원(李鍾元) 부장검사의 논고 내용 중 일부다. 이 부장검사는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평양을 방문했거나 난수표를 소지했던 피고인 6명에게 사형을 구형했다.당시 현실은 68년 1월 21일 이른바 ‘김신조 사건’을 전후로 북한의 무장간첩(공비)과 무장간첩선의 출몰이 잦았다. 이러한 북의 대남공작은 69년2월 위장간첩 이수근(李穗根) 사건으로 피크를 맞는다. 69년 3월 31일까지 이어진 동백림 사건의 수사 및 재판 과정을 당국은 이례적으로 구체적으로 공개했으며, 4ㆍ19 재판 이후 처음으로 법정에 마이크까지 설치해 주었다. 현실 문제를 실정법의 프리즘을 통해 정치ㆍ사회적으로 최대한 활용한 사건이었다.


▦검찰신문과 답변(발췌)

<피고인A>동백림에 왜 갔나? 공작원 임모가 여비를 대준다며 구경가자고했다/ 북에 사는 누나의 소식을 알려고 했는데? 그들이 이북에 사는 친지가 없느냐고 졸라 황해도에 사는 누나의 주소를 적어 주었다/ 노동당 입당을 위해 이력서를 써주었다는 것은? 명함이 없어 백지에 주소 성명 직장을써 준 일이 있다/ 입당 선서를 했다는데? 접선방법에 대해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했다/ (부인에게)남편의 행동을 알고 있었으며 함께 동백림에갔다고 진술 했는데? 그렇게 말해야 구속도 안 시키고 남편을 위하는 귀부인이라고 해서 시인했을 뿐이다.

<피고인B>평양에서 무엇을 했나? 평양 비행장 근처 안전가옥에 수용되어평화통일과 한일회담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동당에 입당했는가? 그들이 입당시켜 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귀국해서 ‘개성의 형이 대구에 사는 갑순이에게’라는 대남방송을 듣지 않았나? 귀국 후 2년 동안 그들에게서 흥미를 잃어 북괴방송을 듣지 않았다.

<피고인C>지령을 받은 적이 있는가? 56년 처와 함께 평양에 가서 산업시찰을 하고 원산에서 8ㆍ15 경축식전을 참석했으며 처남도 만났다. 서독에 돌아와서 박정희 대통령 방독 때 통일방안(시가와 방법)에 대해 오찬회 석상에서 질문하라는 것과 광부 박모를 포섭하라는 지령을 수행했다/ 난수표를갖고 있었는데? 사용은 커녕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로 압수 당했다.

<피고인D>밀봉교육의 내용은? 유럽 여행 중 동백림에서 공작원을 만났다.북괴 영화(‘춘향전’과 ‘꽃피는 평양’)를 보았고 한국의 농촌문제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공작금은? 돈은 받지 않았다. 조사를 빨리 끝내준다기에 200달러를 받았다고 했다/ 평양에 가겠다고 약속했다는데? 그들의 호구(虎口)를 벗어나기 위해 그랬다/ 귀국 후 왜 신고하지 않았나?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검찰측 논고(발췌)

사회의 상식에 속하는 것이라도 반국가단체를 유리하게 하는 것일 때는 군사기밀에 속한다. 북괴공작원도 간첩이며, 그들과의 만남은 간첩과의 접촉이다. 개인으로부터 수집한 자료를 총괄 분석해서 군사력 등을 평가할 수있을 경우 그 개인자료도 군사기밀로 볼 수 있다는 서독의 ‘모자이크 이론’을 원용해야 한다.

동백림에 있는 북괴의 안전가옥은 치외법권과 불가침권을 갖고 있으므로그곳으로 간 사실은 북괴 지배하로 탈출한 것이다. 잠입죄는 지령을 받고귀국한다는 인식만 있으면 되며, 지령 완수 목적이나 증거를 필요로 하지않는다. 대법원은 최근 북괴에 끌려갈 수 있다는 인식이 있으면서 어로저지선을 넘은 어부들에게 탈출죄가 성립한다고 판결했다.

▦피고인 최후진술(발췌)

“북괴의 꾀임에 빠져 지각없이 적성지역을 드나들었던 것을 수치스럽게느끼고 있다” “유럽에서 저지른 일들이 그 때는 중한 줄 몰랐으나 조국에 돌아와 생각하니 큰 잘못 이었다” “못쓰는 못도 두들겨서 펴서 사용하듯 당국이 잘못을 용서하고 재생의 길을 열어주길 바란다” “인생과 학문이 미완성인 채로 끝나는 것이 유감이다”

“모든 공소사실은 인정하지만 간첩죄로 규탄받고 싶지는 않다” “한 마리 양이 길을 잃고 헤매다 돌아온 것처럼 관용으로 용서해 달라” “아버지를 보겠다는 자식의 정이 나를 여기에 서게 했다. 효도를 우리의 미풍으로 외국인에게 자랑해 왔다” “자식을 보겠다는 일념에 법도 눈에 보이지않았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