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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 운동]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梅君子 2006. 7. 16. 12:48
[실록 민주화 운동]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1974년 7월23일 천주교 원주교구 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양심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양심선언은 천주교 고위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유신체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선언 첫째 항에서 지학순은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27일에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말미에 “이상 기록된 것은 나의 기본적 주장이며 생각이다. 이외에는 어떠한 말이 나오더라도 나의 진정한 뜻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주기 바란다”고 했다.

7월6일 오후 4시50분 지학순은, 4월22일 출국하여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 주교회의와 필리핀에서 열린 매스컴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뒤 유럽을 순방하고 귀국하던 중 김포공항에서 정체불명의 기관원들에게 강제 연행되었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관련하여 내란을 선동하려는 목적으로 시인 김지하에게 자금을 주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당시 유신정권은 백기완·장준하 등이 개헌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각계가 광범위한 유신 반대운동에 합류하자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고 이들의 활동자금이 북한에서 유입된 공작금인 양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김지하는 조사를 받던 중 그 돈이 지학순에게서 나왔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의 활동이 북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실제로 김지하는 원주 학성동 주교관 뒤편 언덕 위에 있는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지학순의 일을 돕기도 하고 민주인사들과 교분을 나누기도 했는데, 주교관에 오며가며 이따금 지학순으로부터 돈을 얻어쓰기도 했다.지학순은 귀국 전에 이미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해 4월3일 민청학련 관련 활동을 엄단한다는 대통령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된 뒤 유신반대 민주화투쟁을 주도하던 학생, 종교인, 학계 인사 등 1,024명이 반국가단체를 만들어 국가 반란, 공산혁명, 무력혁명을 추구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아 이중 20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국가내란 예비음모,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대량 구속되었던 터였다. 긴급조치 4호는 관련자를 사형까지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기에, 지학순은 고민 끝에 자신이 귀국해서 사실을 밝혀야만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한편 지학순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은 보았으나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것을 확인한 원주교구의 양대석·안승길 신부는 즉각 이 사실을 원주교구에 보고했다. 다음날 원주교구는 교구장의 불법연행 사실을 알렸고, 8일에는 추기경 김수환이 주교단 상임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오전 9시쯤 중앙정보부(중정) 요원이 김수환을 찾아와 지학순의 행방을 알려주었고, 김수환은 당장 중정으로 달려가 지학순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지학순은 김수환에게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행동으로, 학생들을 도와줄 목적으로 김지하에게 자금을 주었다. 그러나 공산당 단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같은날 오후 2시쯤 교황청 대사도 지학순을 면담했다.

7월10일 오전 11시 주교회의가 열렸고, 이어 오후 6시에 명동성당에서 시국 미사가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청와대에서 김수환을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그날 밤 8시쯤 지학순은 남산 중정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

지학순의 주거는 명동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으로 제한되었다. 그 뒤 동생 지학삼의 후암동 집으로 옮겨졌다가 신병을 이유로 다시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다. 성모병원 621호실은 기관원들과 지학순을 찾는 사람들의 실랑이로 늘 술렁거렸다. 지학순이 중정에서 나온 뒤 “그럼 그렇지, 누가 감히 천주교회를 건드려!”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좀더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학순은 병원에 있으면서 계속 고심하다 7월16일 김지하의 어머니와 아내를 면담하고 나서 마음을 굳혔다. 그네들의 자식과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그들과 똑같은 죄목으로 함께 감옥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7월23일 오전까지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이 전달되자 마음이 급해진 지학순은 서둘러 양심선언을 작성하였다. 2부를 자필로 써서 한 부는 변호사 임광규에게 영문으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고, 한 부는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의 수녀 서정렬에게 주어 한글 타자본 10부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23일 아침 원주교구 소속의 외국인 신부 설리반, 계오식, 포레이 등의 호위를 받으며 병실을 나섰다. 기관원들의 제지로 승강기를 이용하지 못하고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 병원 현관을 빠져나온 지학순은 미리 몰려와 있던 국내외 기자들에게 양심선언문을 나눠주고 읽기 시작하였다.

“본인은 1974년 7월23일 오전 형사 피고인으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으므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본인에 대한 소위 비상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지학순은 그 길로 명동성당으로 가 김수환·윤공희와 함께 미사를 집전하고, 곧바로 중정으로 연행되었다. 정오에서 1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얼떨결에 남산 중정 건물까지 따라들어갔던 신부 최기식은 2층 조사실 의자에 앉으려다가 쫓겨나고 말았다. 나중에 최기식은 이렇게 말했다. “양심선언은 화가 난 깡패 두목에게 오히려 뺨을 친 격이 되었으니 주교님이 구속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지학순의 구속은 대체로 보수적이던 한국 천주교회를 민주화의 열기로 들끓게 만들었다. 7월25일 열린 주교회의에서는 지학순의 고통에 동참하기로 뜻을 모았다. 같은날 명동성당에서는 벨기에와 프랑스 대사까지 참석한 가운데 시국 미사가 열렸다. 뒤이어 원주교구 신부 신현봉·노세현·이영섭이 강제 연행되었고, 지학순은 8월12일 3차 공판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로마 교황청에서 주교의 구속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나타내는 가운데, 지학순은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서한을 전달했다.

“이곳은 호젓한 감방입니다. 그러나 저는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조작된 죄목으로 갇혀 있고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이곳이지만 저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 억울하게 갇혀 있는 많은 정의의 투사들, 목사, 교수, 학생, 변호사, 언론인들과 함께 이곳에 있으면서 저는 가장 미소한 형제들의 벗이 되고 싶었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지학순의 악연은 1970년 원주 문화방송국 설립을 둘러싸고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박정희의 동서가 되는 사람이 맡고 있던 5·16장학재단과 천주교 원주교구가 함께 방송국을 만들기로 했을 때, 원주교구는 분담금과 방송국 건물까지 내주었지만 장학재단은 한 푼도 돈을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계장부도, 영수증도 없이 공금까지 유용했다.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진정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고, 장학재단은 오히려 협박조로 나왔다.

급기야 지학순은 1971년 10월5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열고 천주교회 사상 최초로 가두시위에 나섰다. 1972년 유신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박정희는 그 보복으로 그해 여름 장마로 수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외국에 원조를 요청하러 가려는 지학순을 출국금지하고 연금했다. 그러자 지학순은 각 본당에 공문을 보내, 미사 후에는 반드시 애국가를 봉창하고 제대 옆이나 적당한 곳에 태극기를 놓아두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지학순은 이따금 정치적 자문을 구하던 장일순과 재해대책사업 실무를 맡은 김영주 등을 데리고 자주 산에 놀러가, 산 속에서 고래고래 ‘박정희 나쁜 놈’이란 욕설을 해대곤 했다. 그만큼 숨통이 막히는 정치상황에서 지학순은 “내가 박정희보다 오래 살아야 되는데…”라고 하였다.

절대권력은 절대저항에 부딪치게 되는 법이다. 종교적·국민적 저항 앞에서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통해 19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과 대통령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정략적 요식 행위에 대해 재야인사들과 정의구현사제단은 국민투표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민주회복국민회의가 기자회견을 갖고 제안한 것이 지학순이 이미 모범을 보인 양심선언 운동이었다. 수사기관에 끌려가 강압과 고문에 못이겨 허위자백을 하더라도 여러 방법으로 남긴 양심선언만이 진실임을 믿는다는 것이며, 양심선언을 통해 정부 당국의 비리나 부당한 처사를 폭로하자는 것이었다. 지학순은 부정으로 얼룩진 국민투표가 끝난 뒤 구속집행정지 조치로 2월17일 출감하였다. 투옥된 지 226일 만의 일이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이영진(시인)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김재중(경향신문 기자)

                                                                                                                  경향신문   2003-06-15



-池주교 성격 숱한일화-

“고약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주교가 될 줄 어떻게 알았어. 그런데 역시 그 고약한 것 때문에 큰 일을 해내더라니까”

1977년 9월 원주교구장 지학순의 사제 서품 25주년 경축행사 자리에 참석한 어느 원로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 ‘고약한 성격’이란 약한 자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품고 있으면서도, 즉석에서 시시비비를 가려 ‘예스’와 ‘노’를 분명히 할 정도로 직선적인 지학순의 성품을 말한다.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이 펴낸 지학순 평전 ‘그이는 나무를 심었다’에는 이러한 지학순의 성품을 가늠할 수 있는 일화들이 여럿 소개돼 있다. 72년 8월 엄청난 장마로 원주교구에 수재민이 대거 발생하자 지학순은 외국의 천주교 원조기관에 도움을 청하러 나섰다. 독일의 대표적인 원조기관인 ‘미제레올’을 방문했을 당시 기관측이 구체적인 사업내용을 요구하자 지학순은 대뜸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소. 미제레올 돈은 좋은 일에 쓰라고 하느님이 맡겨 놓은 것이니 내놓으시오”라고 말했다. 당시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신부 장용주는 이 말을 통역하며 속으로 ‘얻어먹는 주제에 큰소리까지 치시는구먼’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랑스러웠다고 술회했다.

이처럼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이 박정희와 내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때문에 박정희는 그에 대한 신뢰가 싹텄던 모양이다. 소문에 따르면 박정희는 자신이 없을 때 자식을 맡긴다면 지학순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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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실록민주화운동]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우리는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과 소명을 믿는다”.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이 낳은 가장 큰 결실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출범하면서 발표한 성명서 ‘제1시국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1974년 9월26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순교자 찬미 기도회’에서 사제단은 단순히 지학순 석방만을 요구한 게 아니라, 유신정권을 반대하고 민주회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기로 집단적으로 결의하였다. 교회는 “기본권이 짓밟히고 침해당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피해자가 누구이든 그의 편에 서서 그를 대변하면서 유린당한 그의 권리를 회복해 주기 위하여 가해자와 침해자가 누구이든 그를 거슬러 항변하고 저항하고 투쟁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고 밝혔다.

74년 7월23일 지학순이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구속되자, 전세계 천주교회는 ‘주교 구속’이라는 사실에 먼저 놀랐다. 프랑스와 벨기에 대사가 외무장관 김동조를 만나서 지학순과 민청학련 관계자들의 선처를 바란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교황청도 8월6일 “이 재판이 공정한 해결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정작 한국교회 주교단의 입장은 상당히 애매하였다. 지학순 구속 직후인 7월25일 주교단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8월6일 주교단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성명서를 발표한 뒤로 이렇다 할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교구장 주교의 구속에 몸 닳아하던 신부 신현봉은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석방운동을 호소하였고, 마침 서울에서 유학 준비를 하던 신부 최기식은 거처를 아예 명동에 있던 가톨릭출판사로 옮겨 신현봉과 보조를 맞추었다. 또한 원주교구에서 활동하던 골롬반회 소속 외국인 선교사들도 지학순이 석방될 때까지 이발과 면도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 과정 중에 최기식과 연배가 비슷한 서울대교구 신부들이 합류했다. 로마 울바노 신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함세웅과 김택암·양홍·오태순·안충석·장덕필 등이 그들이었다. 지학순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국기도회가 전국을 순회하며 진행되었고 인천교구의 김병상·황상근, 전주교구의 문정현, 수원교구의 장덕호, 대전교구의 이계창, 부산교구의 송기인, 안동교구의 류강하·정호경 등이 열심이었다.

한편 감옥에 갇혀 있던 지학순은 자신이 책임을 맡고 있던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를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정의평화위원회는 이름만 있을 뿐 조직도 체계도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지학순은 책임자로 신부 박상래를 정하고, 거친 갱지에 정의평화위원회의 정관을 써서 비밀리에 감옥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에서 그런 공식적인 기구를 통해 일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고,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결국 8월29일 서울대교구의 사제 23명이 명동성당 사제관에 모여 지학순 사건에 대한 공식 태도를 결정하고, 주교단에 명확한 입장을 밝혀달라고 건의한 뒤 공동행동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그 결실은 9월23일 원주에서 맺어졌다. 9월26일 서울에서 열릴 순교자 찬미 기도회에 앞서 미리 23일 원주에서 열린 성직자 세미나에는 300여명의 사제들이 참석하였다. 당시 한국인 평사제가 모두 639명이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전국의 웬만한 신부들은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결성을 합의하고 인권회복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사제단 이름의 첫 기도회를 다음날 원주교구 원동성당에서 갖기로 했다.

원동성당 기도회에서 사제들은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동안 시국기도회에선 없었던 일이다. 71년 지학순이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할 때 가두로 진출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원주에서 기도회 진행을 실무적으로 맡고 있던 장일순과 김영주 등은 가두시위가 오히려 지학순의 석방을 더 어렵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정작 수백명의 젊은 신부들은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밀어붙여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결국 원주시청을 지나 로터리까지 시내를 한 바퀴 돌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틀 뒤인 9월26일 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주교 황민성의 집전으로 순교자 찬미 기도회를 열고,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을 전면에 내건 제1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사제들은 명동파출소 앞까지 시위를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신현봉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사제단은 연이어 제2시국선언(11·6), 사회정의 실천선언(11·20)을 발표하였는데, “어떤 기존 정권도 하느님 나라의 이름과 기준에 따라 비판받아야 하며 여기에는 그 합법성 여부는 고사하고라도 어떠한 민주정권도 면제될 수 없다”고 함으로써 교회가 공식적인 유신 반대운동에 나섰음을 만천하에 밝혔다.

사제단은 공식적인 대표도 없고 회원 명단도 따로 없는 유기적이며 자발적인 결사였다. 중심을 이루었던 젊은 신부들은 열살 정도 나이가 많았던 신현봉을 대표격으로 여겼다. 정치적 사안은 서울지역, 특히 명동성당을 무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가톨릭신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함세웅과 서울대교구의 동료 신부들이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

사제단 소속 신부들은 74년 12월25일에 결성된 전국적 규모의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국민회의는 71명의 종교계·학계·언론계·재야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는 김택암·박상래·신현봉·양홍·함세웅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부 윤형중이 상임대표를 맡았고 함세웅이 대변인으로 일했다. 75년 1월6일 윤형중은 연두 기자회견을 열어 마침내 박정희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1월9일 사제단은 80여명의 성직자와 2,000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권과 민주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갖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지난 한해 동안 암흑 속의 횃불을 높이 들고 우리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이 땅에서의 인간회복을 위해 애타게 기도해 왔고 목메어 외쳐 왔다. (…)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집권자에 의해 유린되었고, 진리와 양심을 외면하고 거역하는 집권자의 죄악은 오히려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 하느님의 말씀은 거부되고 독재자의 말은 신성시되며, 교회는 감시당하고 독재권력은 성역화되며 신앙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박해받고 권력자의 폭력은 난무하고 있다. (…) 하느님의 말씀은 왜곡되었으며 인간의 보편적 양심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여 권력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박정희는 74년 10월1일 국군의 날 치사를 통해 ‘환상적 낭만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어 11월19일에는 김종필이 한국기독교실업인회에서 주최한 ‘국무총리를 위한 기도회’에서 로마서 13장을 인용하여 “교회는 정부에 순종해야 하며 정부는 하느님이 인정한 것”이라고 하면서, 정부를 비판하는 그리스도교인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하겠다고 윽박질렀다. 75년 2월 박정희가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하려고 했을 때 사제단이 거부운동을 벌이자, 2월7일 문화공보부 장관 이원경은 담화를 통해 “최근 일부 종교인들이 종교 본연의 위치를 벗어나 정치활동에까지 지나치게 관여하고 법질서를 혼란시켜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언행을 거듭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한편 국민투표가 끝나고 지학순이 석방되자, 천주교 주교단은 춘계 주교회의를 갖고 2월28일 메시지를 발표하여 “이제 정부가 긴급조치를 폐지하고 구속인사들을 석방하고 폭넓은 대화를 모색”하고 있으니, “교회도 교회 나름대로 그 동안의 행동을 반성하고 앞으로 유사한 사태에 대처할 자세를 정립함으로써 교회 안의 일치를 도모하고 외부로부터 오해를 제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요컨대 앞으로 정치참여는 사제단이 아니라 주교단과 주교단 산하의 정의평화위원회에 맡겨두라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사제단의 활동이 본격화하면서 민주화를 염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비신자 가리지 않고 성당에 모여들었지만, 한편으로 이런 움직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주교단은 그것을 문제삼은 것이다.

그러나 사제단은 이미 교권 수호 차원에서 지학순 석방운동을 하던 성직자들이 아니었다. 기도회를 하기 전에 주기적으로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시국에 대한 강의를 듣고 토론하면서 어둠 속에 갇힌 진실을 발굴하는 광부로서, 현실문제에 몽매했던 터널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민주회복을 외치는 동안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을 만났으며, 사회변혁을 교회의 일차적 사명으로 깨달았다. 그들은 성탄절 때 달랑거리는 자선 냄비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 스스로 해방하는 교회가 되기를 자청했던 것이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진실 밝히는데 큰공헌-

인권 회복과 사회정의 실현을 목표로 일어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내년 창립 30돌을 맞는다. 인간의 기본권이 짓밟히던 암울한 시대에 굴하지 않고 올곧은 소리를 외쳐온 사제단은 그동안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환경운동 등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 왔다.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한 사제단의 시국미사와 성명서 발표 등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사제단은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크게 공헌했다.

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수사를 받던 도중 사망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당국은 경찰관 2명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고 덮으려고 했다. 하지만 구치소에 수감된 해당 경찰관들은 자신들만 처벌되는 것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했고 이 이야기가 같은 곳에 수감된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 이부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부영은 이같은 내용을 담은 쪽지를 밖으로 내보냈고 결국 5월18일 사제단은 당국의 사건 축소·은폐 사실을 폭로했다. 사제단의 폭로에 국민들은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으며 이것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사제단은 명확한 회칙이나 강령이 없이 사제들의 자발적 참여를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회원 가입과 탈퇴의 형식적 절차가 없기 때문에 사제단 회원은 ‘명시적 회원’이 아닌 ‘잠재적 회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제단은 결성 당시 300여명으로 시작하여 70~80년대 활동을 통해 400~450명 정도로 늘었지만 80년대 후반 시민사회의 성장과 가톨릭 교회의 보수화 등으로 인해 다소 감소한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문규현 신부가 대표를 맡고 있는 사제단은 14개 교구별 대표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와 상임위원회에서 의사를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