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을 흔들었던 이태석신부님의 자취를 찾아서
내마음을 흔들었던 이태석신부님의 자취를 찾아서
며칠 전으로 기억한다.
아내가 정말로 좋은 다큐멘타리가 있는데... 꼭 보자고 다짐을 하여...
궁금한 마음으로 KBS 다큐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었다.
의사이자 신부였던 어느 성직자의 일대기를 다큐로 잡았다 하는데...
아내와 함께 늦은 밤에 이 다큐를 보다가 끝내 울음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에도... 이런 훌륭한 성자聖子가 계시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 아내의 감상평이었다.
우리는 언제 함께 담양에 계시다는 故 이태석 신부의 묘역을 참배하자 꼭 다짐하였는데...
오늘 공교롭게도 담양에 들를 일이 있어서 혼자 참배하게 되었다.
머... 아내하고는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
첨단산업단지에서 중요한 회합을 마치고 나서...
담양군에서 부군수를 지냈던 친구를 만나러 건너 왔다가...
시간이 남아서... 담양의 여러 인연들을 스케치하던 중에...
꼭 참배하고 싶었던 담양천주교 묘원을 찾아 갔던 것이다.
우선 아래에 요즘 시사時事로 회자되는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옮겨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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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읍에서 복흥방향으로 10여분을 달리면 천주교공원묘원에 이를 수 있다 -
- 공원 한가운데에 성직자 묘원이 자리했다 -
- 가운데 십자가 좌측에 이태석 신부가 계셨다 -
- 생각보다는 많지 않은 신부님들이 이곳에 묻히셨다 -
- 수녀님들도 사제묘역에 함께 잠들어 계셔서 보기에 좋았다 -
- 외국인 신부들의 이름도 간간히 띄었다 -
- 살아서 남긴 것은 이태석 요한 신부라는 이름 뿐일까 -
- 10여년 동안의 의료와 선교 봉사가 그분의 훌륭한 이력서로 남았다 -
- 항상 긍정적으로 밝은 웃음을 지녔던 맑고 향기로운 분! -
- 누군가 묵주를 헌정하였다 -
<아래 기사는 카톨릭 신문에서 발췌>
‘한국의 슈바이처’ 살레시오회 이태석 신부의 생애
모든 것 바쳐 사랑하고 떠나갔네
발행일 : 2010-01-24 [카톨릭 신문 제2682호,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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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6일 살레시오 관구관에서 봉헌된 이태석 신부의 장례미사에는 전국서 모인 1500여 명의 조문객이 이 신부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사진 문수영 cpi88@catimes.kr)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고 이태석 신부의 자작곡 ‘묵상’ 중).
오랜 내전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 수단 톤즈에 희망과 사랑의 꽃을 피운 이태석 신부(살레시오회)가 1월 14일 연꽃과 같은 삶을 마감했다. 마지막까지 “에브리싱 이즈 굿(Everything is good)”이라고 말하며 가족과 주변사람들을 위로하고 하느님 곁으로 떠난 그의 삶은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묵상’의 가사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고 떠나간 삶이었다. # 연꽃과 같은 삶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가진 이태석 신부는 1962년 부산에서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다재다능했던 그는 1987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군의관으로 군 복무를 마친 이 신부는 돌연 의사로서의 보장된 길이 아닌 사제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살레시오회 입회 후 광주가톨릭대와 로마 살레시오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그는 2000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살레시오회 소속 한국인 신부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수단에 파견됐다. 수단으로 건너간 이 신부는 가난과 한센병을 비롯한 전염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 일은 교육과 의료봉사였다. 그는 아무것도 없었던 톤즈 마을에 병실 12개짜리 병원을 짓고 하루에 200~300명의 주민을 진료했다. 또 학교와 기숙사를 세워 가난한 어린이들을 가르쳤고,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음악으로 아이들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노력했다. 8년 간 수단에서 그는 ‘너희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라는 복음 말씀처럼 가장 낮은 이의 모습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거기까지 였다. 이 신부는 2008년 11월 휴가차 한국에 왔다가 대장암 판정을 받고 1년 간의 투병생활을 이어갔다. 투병 중에도 그는 병원이 아닌 서울 대림동 공동체에서 머물며 젊은이들을 위한 곡을 작곡하고 밴드를 결성하는 등 마지막까지 자신이 가진 탈렌트를 풀어 내놓았다. 실천적 삶과 헌신적인 봉사의 삶을 살아 온 이 신부는 제7회 인제인성대상 특별상(2006년), 제23회 보령의료봉사상(2007년)을 수상했으며 지난해에는 제2회 한미 자랑스런 의사상을 수상했다. # 신부님 사랑합니다 이태석 신부의 장례미사는 1월 16일 살레시오 관구관에서 15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조문객들 중 대부분은 생전의 이 신부를 만난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신부와 수련 동기인 백광현 신부는 “이태석 신부는 사랑 때문에 자신의 온 몸을 봉헌한 사제”라며 “이 자리는 그가 남긴 사랑을 여기에 남아 있는 우리들이 성장시키고 전파하라는 부탁을 받는 자리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수단 톤즈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존 마옌(24)은 “이 신부님께 그저 감사하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또 훼링턴 신부(살레시오회 수단지구장)는 “톤즈에서 당신이 하셨던 사업은 선교사로서의 모든 것을 보여줬다”며 “당신의 꿈을 온 마음으로 젊은이들과 함께하고 톤즈의 젊은이들에게 당신의 삶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신부의 유해는 전라남도 담양 천주교 공동묘역 살레시오 성직자 묘역에 안장됐다. 이지연 기자 (mary@catimes.kr) |
- 참으로 단정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있는 묘원이다 -
- 일반 교우들의 묘역도 따뜻해 보였다 -
- 분재같은 느낌을 주던 소나무의 모습 -
- 정갈하고 장중한 곳이다 -
- 입구에 있는 경당 -
- 참으로 유순한 모습이 정겹다 -
- 여러 맑은 영혼들이시여... 안녕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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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카톨릭 묘원의 참배를 끝내고 계속해서 추월산쪽으로 진행하였다.
거의 10여년 만에 필자의 은거지였던 추월산 아래 추성산방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필자는 그 시절 광주에서 일을 마치면 이쪽 길로 간간히 귀가를 하였는데...
사실 오늘에야 카톨릭 묘원에도 들어가 보았고...
아래에 있는 담양 국씨의 재실인 애일당에서도 차를 멈추게 되었다라는 고백을 해 본다.
생각해 보면 지난 10여년 간이 주마등처럼 떠 오르나... 건질 것이 없다!
부질없는 것이... 인생길이라더니...
필자의 마지막 이력서는 과연 무엇으로 남게 될 것인가.
마지막 10년을 혼불을 다해 살아냈던 이태석 신부님 같이...
그런 삶을... 내도 살아 보고 싶다.
묵주기도인지... 염원의 기원인지... 모를 처절함이 내를 채찍질한다.
"감동이 감동으로 끝내서는 아니 되리라
감동이 감동을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하리라
그래야 그 감동이 이어질게 아니겠는가"
- 묘원에서 조금만 움직이면 애일재에 이르게 된다 -
- 담양 국씨들의 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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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00~2001년을 이곳 추월산 아래 추성산방에서 지냈던 적이 있다.
그때부터 필자는 자신만의 안거지를 꿈꾸게 되었고...
그 결과... 2003년에는 나름대로의 터를 얻게 되었다.
추월산 아래 정기가 가득 모이는 곳이라 참으로 아늑하였고...
'공부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바로 아래 그림의 자작나무 숲 속에서 필자는 한 해를 났던 것이다.
- 반듯한 농로 뒤쪽 자작나무 숲에 추성산방이 있다 -
- 저수지를 끼고 있는 추성산방의 모습 -
- 10년만에 찾은 이곳에서 인증샷을 하고 싶었다 -
- 추월산은 밝은 기운이 가득한 양명한 곳이다 -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담양읍에서 북쪽으로 14km 정도에 위치한 전라남도 5대 명산 중의 하나이다. 추월산은 담양군 용면과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을 가로질러 있는 해발고도 731m의 산으로, 옆에는 방장산, 금성산이 있고 북으로는 노령산맥의 지맥에 속한 소주령이 있어서 노령의 맥이 여기에서 중추를 이룬다. 아름다운 경치와 울창한 수림에 약초가 많이 나 예로부터 명산으로 불렸으며 진귀종의 추월난이 자생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산 정상에서 65m 정도 아래 지점에 보리암(菩提庵)이 있는데 이곳 주변 절벽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부인 이씨가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그 건너편 전라북도 순창을 경계로 한 산록에는 용추사가 있다. 용추사는 임진왜란 때 휴정 서산대사의 법도를 계승한 담양 출신의 소요대사가 노년에 머물렀던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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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읍내에 있는 담양실내체육관이 새로운 위용을 자랑한다 -
- 이곳이 그 유명한 관방제림이다 -
- 약 400년 전에 관官에서 인공으로 조성한 방제림이다 -
- 지난 여름밤에 친구들과 이곳을 산책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
- 담양천도 잘 정비되어 있다 -
- 담양의 도로에는 이런 메타쉐쿼이어 숲이 지천에 널려 있다 -
누구를 위한 삶일까
우리는 살아가는 날들에 대해서
누구를 위한 삶일까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삶이 누구를 위한 헌신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는지
한번 물어 보고 싶다
절대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
주위에 그럴싸하게 포장되었던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
되물어 보고 싶다
그래서 말하노니...
삶을 살아가는 감동에 대해서
감동이 감동으로 끝내서는 아니 되리라
감동이 감동을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하리라
그래야 그 감동이 이어질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사는 삶이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내가 나한테 부끄럽지 않으면 되었지...
내가 신神 앞에 부끄럽지 않으면 되었지...
그 무슨 다른 시선이 두려울까
- 小 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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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담양행은 지난 10년 간의 나와...
지난 10년 간의 이태석 신부를 비교해 보는...
그런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필자도 사실 지난 10년 간이... 저 지난 20년 간보다...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살아왔던 나날들이었다고 감히 자부는 한다.
그러나... 이신부님이 세웠던 그런 대원을 꿈꾸지... 못했던 아쉬움은 있다...
'그래서... 하늘님은 내를 더 살라 하시는지 모른다.'
'이신부는 더 할일이 없다'시어 데려 간 건 아닐까.
그래...
무언가 쓰임새 있는 재목으로 남는 그런 일을 혼신을 다해서 해 내고 싶다.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하였듯이...
베토벤이 '합창'을 써 냈듯이...
그 일은... 비록 남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초라할지 모르나...
자기 자신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는... 그런 삶을 열심히 살아가려는 노력은...
'나름대로 보람이 있다'라고 결론을 지은다.
내가 나한테 부끄럽지 않으면 되었지...
내가 신神 앞에 부끄럽지 않음 되었지...
그 무슨 다른 시선이 두려울까... 라는 각오로...
살아낼 일이다.
小 鄕 權 大 雄 書
일 시 : 2010년 12월 29일 (수)
장 소 : 전남 담양군 쌍태리, 추성리, 담양읍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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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valeriano
- 2010년 12월 29일 완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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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알비뇨니"의 "현과 올겐을위한 아다지오 G단조"
기타연주곡은 Albinoni 작곡의 Adagio이며 독일의 Guitarist인 Bernd Steidl이 연주한다.(아랫 글은 발췌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