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순례기

사천 다솔사 - 산에 절이 있으매, 평화를 찾아 그곳에 가노라 10

梅君子 2012. 2. 25. 12:29

 

 

 

 사천 다솔사 - 산에 절이 있으매, 평화를 찾아 그곳에 가노라 10

 

 

 

                                                                                                       장 소 :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이명산

 

                                                                                일 시 : 2012년 2월  20일

  

 

 

 

거제로 탐매여행 떠나는 것은 가까운 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선 사천에 있는 다솔사를 오전에 들렀다가 탐매여행을 계속하리라 마음 먹었다.

 

다솔사는 주지였던 최범술 선생이 한국전통차의 중흥을 위해 애를 쓰셨던 현장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참배해 보고 싶었다.

 

거기에 만해 한용운, 소설가 김동리 선생이 집필하기 위해 머무르던 공간이니, 참배의 의미는 더욱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강진 백련사 여연 스님 머무시는 주지실에서 최범술 선생의 글씨를 보고,

 

인연 닿으면 꼭 한번 방문해 보리라 다짐한 이후로 두 철이 지나서야 결행하게 되었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길목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절이기 때문에 진입하는데 크게 장애가 되는 어려움었다.

 

송광사의 아름드리 육송군락들 보다는 수령이 덜 먹어 보였지만 다솔사 초입의 솔밭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래 다솔사多率寺라 하였을까?

 

아무튼 이곳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진신사리 또한 안치되어 있다 하니 참배의 의미가 더욱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었다.

 

 

 

  

 - 꽤나 넓은 주차장이 경내 입구에 자리해 있다 -

 

 

 

 

 

다솔사 [多率寺 ]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511년(지증왕 12)에 조사(祖師) 연기(緣起)가 영악사(靈嶽寺)라 하여 처음 세웠고, 636년(선덕여왕 5) 새로 건물 2동을 지은 뒤 다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676년(문무왕 16) 대사 의상(義湘)에 의해 영봉사(靈鳳寺)로 바뀐 뒤 신라 말기에 국사 도선(道詵)이 다시 손질하여 고쳐 짓고 다솔사라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懶翁)이 중수한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전화로 불탔으나 숙종 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의 건물은 1914년의 화재로 타버린 것을 이듬해 다시 세운 것이다.

절 안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 대웅전, 나한전, 천왕전(天王殿), 요사채를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에 세워져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2층 맞배집으로 건평이 106평에 이르는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또한 대웅전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9호인 보안암(普安庵) 석굴, 부도군(浮屠群) 등이 있다. 보안암 석굴은 고려 말기에 세웠다고 전해지며 석굴암과 비슷한 모양이다. 부도군은 도명(道明), 낙화(樂華), 성진(聖眞), 세진(洗塵), 풍운(風雲) 등 5인의 부도가 보존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용운(韓龍雲)이 수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고,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한동안 머물러 《등신불》을 쓴 곳으로도 유명하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대양루는 옛 건물이라 한다 -

 - 옛것이 보수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 상선약수 -

 

 - 대웅전 대신에 적멸보궁이 앉아 있다 -

 -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안치된 곳을 적멸보궁이라 한다 - 

 

 - 종무소 -

 

  - 요사채의 기와 전시는 좀 잡스러워 보인다 -

 

 - 참으로 이쁜 한옥이로다 -

 

 - 극락전 -

 

 

다솔사 극락전(多率寺 極樂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  주소 :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86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무량불이라고도 하며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는 대원을 품은 서방정토 세계의 부처이다.
신라 선덕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처음 건립된 이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창과 소실을 거쳐 1910년대에 중건한 것이 지금에 전하고 있다.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 좌우측의 창호와 머름, 벽체의 설치가 특이하다.

 

 

 

 

 - 응진전의 기와도 모두 현대식인데, 욕심 같아서는 옛 기와지붕을 한번 보고 싶다 -

 

 

다솔사 응진전(多率寺 應眞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9호 주소 :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86

 

응진은 아라한과 같은 의미의 불교용어로 응진전은 달리 나한전으로도 불린다. 나한 또는 아라한은 부처님을 따르던 수행자들로 최고경지에 이른 스승들이며, 이곳 응진전에는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신라 선덕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처음 창건된 원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이후 1690년(숙종6)에 죽마대사가 다시 중건하였다. 그 건물도 노후화 하여 1930년 만해 한용운 선생이 다시 중수한 것이 지금 전하고 있다.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에 들보 3량으로 조성된 이익공계(二翼工系) 맞배지붕 건물로 천장은 우물천장(井)으로 마감되어 있다. 규모나 제작기법의 면에서 옆의 극락전과 거의 같아 두 건물은 같은 시기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 적멸보궁 뒤에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이 안치되어 있다 -

 

 - 우리는 이곳에서 탑돌이를 하였다 -

 

 - 적멸보궁 경내에서는 노스님이 계속 독경을 하고 계셨다 -

(와불을 조성한 모습이 특이하다)

 

 

 

 

최범술 [崔凡述 ]

 

경상남도 사천(泗川)에서 태어났다. 최영환(崔英煥)이라고도 하며, 법호는 효당(曉堂)이다. 1916년 사천 다솔사(多率寺)로 출가하였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이듬해 박렬(朴烈)이 일본왕의 암살을 계획했을 때 중국의 상하이[上海]로 가서 폭탄을 운반해 왔으나 거사 직전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1년 3월 한용운(韓龍雲)이 불교계의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33년 도쿄의 다이쇼대학[大正大學] 불교학과를 졸업한 후에 조선불교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명성여자학교(明星女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2년 김법린(金法麟) 등과 해인사(海印寺)·다솔사(多率寺) 등에서 한글을 가르치다가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수감되었다. 

 

광복 후인 1947년 해인사 주지가 되었으며, 1948년 제헌의원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저서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한국의 다도》 등이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최범술 선생의 흔적은 뒷뜰에 다만 차나무밭으로 남아 있었다 -

 

 

 

 - 원래 부처님 진신사리탑이 뒤에 있으면 적멸보궁 내에는 따로 부처님을 두지 않는데, 와불이 모셔져 있다 -

 

 - 통창으로 사리탑을 경배 드리게 되어있는 구조였다 -

 

 - 종무소를 돌아가면 안심료가 나온다 -

 

 - 이곳 안심료에서 김동리 선생은 유명한 단편 '등신불'을 집필하였다 한다 -

 

 

 

 
김동리 [金東里]

 

김동리

인간성 옹호에 바탕을 둔 순수문학을 지향했으며 8·15해방 직후 좌익문단에 맞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본명은 시종(始鍾). 이명은 창귀(昌貴). 아명은 창봉(昌鳳).

임수(壬守)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경주제일교회부설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계성중학교에서 2년간 공부했다. 서울로 올라와 경신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낙향하여 박목월 등과 사귀며 동서양의 고전에 심취, 인간과 자연과 신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1933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김달진·서정주 등의 〈시인부락〉 동인들과 사귀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같은 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입선된 후 〈망월 望月〉·〈고목〉 등을 발표했으나, 곧 시창작을 중단하고 소설로 전향했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면서 이주홍·조연현·최인욱·홍구범 등과 사귀었다. 이때 받은 상금으로 다솔사·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쓴 소설 〈산화 山火〉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다시 당선되어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후 〈바위〉(신동아, 1936. 5)·〈무녀도〉(중앙, 1936. 5)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했으나, 다솔사로 다시 들어가 광명학원이란 야학을 세우고 농촌계몽운동에 힘썼다. 1940년까지 〈황토기〉(문장, 1939. 5)·〈찔레꽃〉(문장, 1939. 7)·〈동구 앞길〉(문장, 1940. 2)·〈다음 항구〉(문장, 1940. 9) 등을 계속 발표했으나, 일제의 어용문학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하는 것을 거절, 광명학원이 강제 폐쇄되어 만주지방을 방랑했다.

1945년 경남 사천에서 8·15해방을 맞이한 뒤, 곧 서울로 올라와 민족주의 문학진영에 가담했다. 특히 김동석·김병규와의 순수문학논쟁을 통하여 우익측의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로 두드러졌다. 좌우문학진영과의 이론 대립이 치열했던 때에 발표한 평론 〈순수문학의 진의(眞義)〉(서울신문, 1946. 9. 15)·〈문학과 자유의 옹호〉(백민, 1947. 6)·〈순수문학과 제3세계관〉(대조, 1947. 8)·〈민족문학론〉(대조, 1948. 8) 등은 이론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던 우익측의 민족문학론을 논리화·체계화시킨 글로 평가되었다.

그는 이론투쟁과 아울러 조직력을 중시했다. 박종화·이하윤·김진섭 등이 중심으로 있던 중앙문예협회의 불투명한 성격을 거부하고, 서정주·조연현·곽종원·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했다. 정부수립 때까지 이 단체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윤회설〉(서울신문, 1946. 6. 6~26)·〈혈거부족 穴居部族〉(백민, 1947. 3)·〈달〉(문화, 1947. 4)·〈역마〉(백민, 1948. 1) 등을 발표했다. 1947년 〈경향신문〉 문화부장, 1948년 〈민국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냈고, 오랫동안 한국문학가협회 소설분과위원장, 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했다. 문예지의 발행에도 힘써 1949년에 창간한 〈문예〉와 1968년에 창간한 〈월간문학〉의 주간을 지냈다.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58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67년 3·1문화상, 1968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0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창작집으로 〈무녀도〉(1947)·〈황토기〉(1949)·〈귀환장정 歸還壯丁〉(1951)·〈사반의 십자가〉(1958)·〈등신불〉(1963) 등과, 평론집으로 〈문학과 인간〉(1948)·〈문학개론〉(1952)·〈문학이란 무엇인가〉(1984) 등을 펴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3g1537b

 

 

 

 

- 만해 항용운 선생이 심었다는 황금측백 -

 

 

 

 

안심료(安心寮)

 

적멸보궁에서 내려와 좌측으로 가면 안심료(安心寮)가 나오는데, 안심료(安心寮)는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요사이지만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한국 불교의 법맥을 이은 유서 깊은 장소이다.

안심료 앞에는 측백나무 세 그루가 높다랗게 서있는데, 한용운 스님의 회갑 때 지인(知人)들과 함께 심은 것으로 ‘황금측백 나무’라고 부른다. 그리고 안심료에서 김동리(1913~1995)선생이 1960~1961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등신불’을 집필하여 발표 했던 곳이다.


출처 : 달마넷

 

 

 

 

- 차나무는 사방에 많이 심어져 있다 -

 

- 다솔사 연혁탑 -

 

 - 노부부도 한 컷 남긴다 -

 

- 주차장쪽 내려가는 길 -

 

- 장작들이 단정하다 -

 

- 이제 다솔사를 안녕하는 시간이다 -

 

 

 

 

 

  

 

 

다솔사와 진신사리

 

 

원래 껍대기에 불과한 것이 사대육신일진대

 

무엇하러 사리는 남기셔서 참배하게 만드는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물상의 허망함만 안고서

 

펑펑 우는 아낙네의 슬픔이 다솔사를 멤도는구나

 

 

- 小鄕   權大雄 ( infol@daum.net )

 

 

 

 

 

 

 

- 참배 증명사진 -

 

 

 

 

다솔사는 그 단정한 맛이 과연 문인들의 고향다웠다.

 

아쉬운 점이라면 최범술 스님의 향취가 담긴 차 한잔 못하고 나온 점이라고나 할까.

 

겨울이라 그런지 매점도 문을 닫았고,

 

노스님은 독경 중이시니 어디에도 전통차 안부 물을 곳이 없다.

 

독경하던 노스님은 필자의 참배를 유리창 너머로 바라 보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쓸데 없는 중생들이 맨날 기복만 드리러 왔다갔다 하는구나......

 

용케도 잘 아실 법하다.

 

한낮 중생이 그런 얕은 서원이라도 내 세움을 해량해 주시라.

 

다솔사는 부처님 진신사리 업고 허리가 휘어 보였다.

 

 

 

- 2012년 1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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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鄕  權大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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