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천을 그리는 내원궁의 신비로움 - 선운산과 도솔암
도솔천을 그리는 내원궁의 신비로움 - 선운산과 도솔암
일 시 : 2012년 11월 30일 - 12월 1일
장 소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18
고창 선운사는 꽃무릇과 동백꽃이 유명한 곳이며,
이 지역이 고향인 미당 서정주 선생으로 또한 유명한 곳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신 미당 선생은 '질마재 신화'라는 시집詩集에서 돌아가고 싶은 고향 선운리를 애처롭게 노래했다.
- 선운사 주차장에서 오늘 야영할 선운산 정상인 수리봉의 뾰쪽한 모습을 담아 본다 -
- 야영장 주변에 조성된 산책로가 정겹다 -
질마재는 서정주 시인의 출생지인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 있는 선운리 마을의 속칭이다.
그 모양이 길마(수레를 끌 때 말이나 소 등에 안장같이 얹는 제구로 ‘질마’는 구개음화가 안된 상태)와 같은 형국으로 된 고개와 같다 하여
‘질마재’로 부르는 것이다.
그 시집에 수록된 아름다운 시 중에서 몇 편을 여기 발췌해 보면서 길을 떠나볼까 한다.
< 신 부 >
신부는 초록 저고리와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 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시집 <질마재 신화> 中에서
- 선운사 입구에 조성되어 있는 부도전 -
< 신선神仙 재곤在坤이 >
땅 위에 살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재곤이라는 이름을 가진 앉은뱅이 사내가 있었습니다.
성한 두 손으로 멍석도 절고 광주리도 절었지마는, 그것만으론 제 입 하나도 먹이지를 못해,
질마재 마을 사람들은 할 수 없이 그에게 마을을 앉아 돌며 밥을 빌어먹고 살 권리 하나를 특별히 주었습니다.
'재곤이가 만일에 목숨대로 다 살지를 못하게 된다면 우리 마을 인정을 바닥난 것이니, 하늘의 벌(罰)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두루 이러하여서, 그의 세 끼니의 밥과 추위를 견딜 옷과 불을 늘 뒤대어 돌보아 주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갑술년이라던가 을해년의 새 무궁화 피기 시작하는 어느 아침 끼니부터는 재곤이의 모양은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일절(一切) 보이지 않게 되고,
한 마리 거북이가 기어다니듯 하던, 살았을 때의 그 무겁디 무거운 모습만이 산 채로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마다 남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준 천벌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가 거듭 바뀌어도 천벌은 이 마을에 내리지 않고, 농사도 딴 마을만큼은 제대로 되어,
신선도(神仙道)에도 약간 알음이 있다는 좋은 흰수염의 조선달(趙先達) 영감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재곤이는 생긴 게 꼭 거북이같이 안 생겼던가. 거북이도 학(鶴)이나 마찬가지로 목숨이 천 년은 된다고 하네.
그러니 그 긴 목숨을 여기서 다 견디기는 너무나 답답하여서 날개 돋아나 하늘로 신선살이를 하러 간거여..."
그래 "재곤이는 우리들이 미안해서 모가지에 연자 맷돌을 단단히 매어 달고 아마 어디 깊은 바다에 잠겨 나오지 않는거라."
마을 사람들도 "하여간 죽은 모양을 우리한테 보인 일이 없으니 조선달 영감님 말씀이 마음적으로야 불가불 옳기사 옳다."고 하게는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두루 그들의 마음 속에 살아서만 있는 그 재곤이의 거북이 모양 양쪽 겨드랑에 두 개씩의 날개들을 안 달아 줄 수는 없었습니다.
- 서정주 시집 中에서
- 선운사 성보박물관 뒷담쪽 석상암 길을 들머리로 잡고 등로를 시작한다 -
- 석상암은 특이하게 순한 검둥개를 키우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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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 未堂 徐廷柱] 호는 미당(未堂). 전북 고창 태생. 소년 시절에 한학을 배우다가 중앙고보와 고창고보에서 수학하였다. 학력사항-중앙고등보통학교 -고창고등보통학교 경력사항-시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1949~한국문인협회 창립을 주도 1954~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 -동국대학교 시문학 강의 수상내역 1936작품명 '벽' -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 작품목록화사집(1941) 귀촉도(1948) 신라초(1961) 국화 옆에서(1975) 출처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고, 김동리‧함형수 등과 함께 시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해방 후에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앞장섰으며, 1949년 한국문인협회 창립을 주도하고 1954년에는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고, 줄곧 동국대학교에서 시문학을 강의하였다. 서정주의 초기 시는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을 보여주고 있다. 첫 시집 『화사집』에서 잘 드러나듯이 토속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인간의 원죄의식과 원초적인 생명력을 읊는 것이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인간의 운명적 업고(業苦)에 대한 인식은 동양적인 사상의 세례를 받아 영겁의 생명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 시기의 시집 『귀촉도』는 표제시에 있어서부터 동양적인 귀의를 시사해주는 것으로, 토착적인 정서와 고전적인 격조에의 지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1956년에 간행된 『서정주시선』에서는 「풀리는 한강 가에서」, 「상리과원」 등의 작품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한과 자연과의 화해를 읊었고, 「학」, 「기도」 등의 작품에서 원숙한 자기 통찰과 달관을 보여주고 있다. 서정주의 시는 『신라초』에 이르면서 새로운 정신적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초월적인 비전의 신화적인 거점이 되고 있는 신라는 역사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상의 고향과도 같다. 서정주는 『신라초』에서 불교사상에 기초를 둔 신라의 설화를 제재로 하여 영원회귀의 이념과 선(禪)의 정서를 부활시켰던 것이다. 1969년에 나온 시집 『동천』에서는 불교의 상징세계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질마재 신화』는 시인 자신의 유년기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질마재에 얽힌 사연들을 이야기하듯이 풀어내고 있다. 『떠돌이의 시』에서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 등에 공감하는 시인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서정주는 생의 본질적 문제들을 탐구함으로써 존재의 영원성에 도달하고자 하였으며, 언어 미학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초기에는 대지적 존재로서 인간의 조건과 본능의 몸부림을 보들레르적 탐미주의로 승화시키려 했으나 이의 한계를 깨닫고 곧 동양의 영원주의로 회귀한다. 중기 이후에 그가 몰두했던 신라정신과 신화 혹은 설화적 세계는 바로 그의 이와 같은 정신편력을 보여주는 것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상상력과 뛰어난 언어의 감수성이 빚어낸 작품의 문학적 완결성이라 할 것이다. 서정주의 시 세계는 전통적인 서정세계에 대한 관심에 바탕을 두고 토착적인 언어의 시적 세련을 달성하였다는 점, 시 형태의 균형과 질서가 내재된 율조로부터 자연스럽게 조성되고 있는 점등이 커다란 성과로 평가된다. 1972년 일지사에서 『서정주 문학 전집』(전5권)을 간행하였으며, 1994년 민음사에서 『미당 시 전집』이 나왔다.
- 한참을 헉헉대며 마이재를 올랐다 (마이재에는 비박용 데크가 한 채 마련되어 있었다) -
미당의 일대기를 재조명해 보면서 이곳에서 보냈을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선생이 동양 사상의 세례를 받아 영겁의 생명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다시 돌아오게된 인생 여정의 회귀에는
고향 선운산이 벗해 주며 키워 주었던 성장기의 원동력이 그 기원이 되었을 것이다.
선운사 뒷담을 따라 마이재를 향해 오르면서 내내 선생의 동백숲을 들여다 보는 마음이,
비록 고도를 올리는 산행길에 숨은 가빴지만 마음은 코발트빛 하늘에 견줄만큼 맑아지는 기분이다.
그만큼 선생의 향기가 우리 주위에서 맑음! 그 자체로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 시의 향기는 오래도록 우리 영혼의 상징적 안주처가 되게 해주는데 한 점 부족함이 없는 것이라고 다시금 생각해 본다.
- 능선길에 오르니 선운사 동구洞口가 한 눈에 훤히 들어 온다 -
1970년대 초 어느 늦가을 오후.
미당(未堂)은 선운사(禪雲寺) 고랑을 지난다.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이다.
선운사 버스 정류장에 우산도 없이 홀로 서서 이슬비를 맞는다.
때마침 선운사 동구 너머 주막집이 눈에 든다.
뜨끈한 방에 들어앉아 익어 쉰 김치접시 앞에 두고 막걸리를 퍼마신다.
40대 중반의 주막집 여인은 육자배기 한 소절 청하는 나그네의 고집에 못 이겨
나직이 소리를 한다.
이듬해 미당은 이곳을 다시 찾았다. 주막은 간데 없고 막걸리 집 여자도 사라졌다.
“술 팔고 창도 곧잘 하던 그 여자는 말년에 스산한 신세를 아편에 의탁하다가
아랫동네 감나무 밑에서 죽었다”고 마을사람들이 전할 뿐.
미당은 읊었다. 그리움에 목말라 서럽게.
(불교신문중에서)
< 선운사 동구 禪雲寺 洞口 >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 서정주 시집 中에서
- 드디어 선운산 정상 수리봉에 도착했다 -
미당은 고향 선운리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엮어 내면서 얼마나 신이 났을까 상상해 본다.
마을의 이러저러한 대소사는 한국농촌이 갖는 보편적 설화이거나 민담일진데,
그런 편린들을 주섬주섬 꿰어 엮어 아름다운 시어로 재탄생 시킨 선생의 능력은 과연 비범함을 초월했다 싶다.
선운사 성보박물관 뒷담을 들머리로 하여 마이재로 향하는 중간에는 석상암이 있는데,
비박 배낭의 무게 때문에 물을 따로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식수 2리터를 보충하려고 잠시 들렀다.
통통하게 살찐 검은개 한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주위를 돌더니 이내 자기도 갈증을 풀려고 곁에 와서 동무해 준다.
절이나 암자에서 개를 키우는 광경은 대처를 하는 절들에서 흔히 보게 되는데 이곳은 대처를 하지 않는 절이라 좀 특이하다.
원래 공부를 전념으로 하는 곳에서는 개를 키우지 않는 것이 좋음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개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조금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반사적으로 짖어대기 시작하니
한 밤중의 고요에 앉아 선정에 드는 수행자에게는 이 얼마나 방해스러움이 되겠는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 명경헌에서는 개를 키우지 않는다.
첫째는 약숫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짐승들을 키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지만,
개 또한 정적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수행하는 곳에서는 삼가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흔히들 산촌에서는 적막감을 달래기 위해 개을 많이 키운다.
개짖는 소리에 고라니나 멧돼지가 내려오지 못하는 예방책이 되기도 하는 잇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는 아주 무서움을 잘 타는 친구인 것 같다.
조금만 낯선 모습이 보이거나 들리면 사정없이 짖어대는 것은 그만큼 두려움을 잘 타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석상암은 평이한 여느 암자와 다를 바 없었으며, 위치 또한 평이한 곳에 있는 그런 암자였다.
석상암에서 바로 마이재로 오르는 길목은 모두 막아 놓았기 때문에 계곡을 내려와 다시 산길로 접어 든다.
말라붙은 단풍이 줄기에서 떨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애처로움을 바라 보는 마음에 연민이 깃든다.
비단 너뿐이랴만 애써 삶을 구걸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스럽기만 하다.
그래 법정스님은 모란꽃을 좋아하셨나 보다.
어느 날 모란은 기별도 없이 뚝뚝 분지러지며 떨어져 삶을 마감하기 때문에 구질구질하지가 않아 그 낙화 또한 매우 아름다운 법이다.
법정스님 또한 그렇게 삶을 마감하면서 가셨다.
이 세상에 내려 놓은 말빚도 모두 거두고 가리라 하시면서 책을 절판하기를 유언으로 남기셨으니,
당신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모든 것을 완결시켰지만,
후학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스님의 고집은 조금 아쉬운 대목이 있다고 본다.
책을 등불로 삼고 공부하는 이에게서 나침반을 거두었던 격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부처님께서도 경전(法)을 등불로 삼으라 하셨는데 그런 자비심 또한 매우 중요하다 싶다.
말빚도 거두려는 스님의 성품을 이해하기 때문에 따로 할 말은 없다.
어찌보면 우리는 말의 홍수와 글자의 홍수 속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적절히 항해를 도와줄 보배같은 등대 만나기를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그 등대란 무엇일까?
바로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는 일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의 정신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고 모자람도 없는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인 것이다.
자등명법등명 [ 自燈明法燈明 ]
석가가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가르침을 이르는 말. 석가가 노년에 아난다의 청을 받아들여 설한 가르침이다.
석가가 죽림촌(竹林村)에 안거할 때 병에 걸려 심한 고통을 겪자 아난이 마지막 설법을 청하였다.
이에 석가는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고 설하였다. 이것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다.
원래는 등(燈)이 아니라 섬(島)이었다고 한다.
즉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라고 하였는데 한역하면서 섬을 등불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즉 석가 스스로 자신이 지도자임을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석가가 만일 자신을 강조하였다면 ‘나는 세상을 구제하는 자이므로 나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라. 그렇지 않다면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라고 설법하였을지도 모른다.
출처 두산백과
- 선운사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 온다 -
- 멀리 바다 넘어 변산반도가 보이는 훌륭한 조망을 갖춘 곳이다 -
< 자화상 >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 시집 中에서
- 특이한 안장바위의 모습도 보이고 -
- 줌으로 당겨본 안장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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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장바위 >
선사 이래로 모든 이들이 의아하게 바라보았을 형상
안장바위는 저 홀로 무심한데 모두들 독특하다 하니 수긍이 안 간다
바위가 다 같은게지 형상으로 의미 삼으면 쳐지는 바위는 어떡하라고?
삼라만상은 형상으로 의미를 삼지 않는데 뜻을 단정하니 참, 난처하다
안장은 인간끼리 쓰는 용어 우리는 그런 거 모른다 그냥 무심한 눈으로 의밀랑 지워버려라
안장바위 항변한다 주위 산이 맞다고 맞장구 쳐 주는데 지나가는 행인들만 또 안장바위라 칭하니 ...... 이를 어찌할꼬?
- 小鄕 權大雄 ( infol@daum.net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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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양 무렵이라 서둘러 야영준비를 마쳤다 -
선운산의 정상인 수리봉에서는 일망무제로 트이는 절경을 만날 수가 있으니 과연 이곳이 승지임에는 틀림이 없겠다.
북으로는 변산반도 내소사쪽 바닷가가 줄포만의 염전들과 함께 펼쳐져 있으며,
동으로는 방장산 라인이 상쾌한 산그리매를 그려 주고 있었다.
변산의 기운이 넘어와 수리봉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휴식을 취한 다음에 선운사로 그 맑은 지기를 내려 주는 듯 싶었으니......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유숙하며 맑은 생각 한 점! 기어히 끄집어 내리라 다짐해 본다.
그런 마음으로 배낭을 풀어 숙영장비를 세팅한다.
일기예보를 점검하고 왔는데, 오늘밤 선운산 정상의 최저 온도는 영하 4도 내외이며 바람은 강풍이 예상된단다.
슬럼버트렉의 듀오 텐트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바람에 강한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에 일부러 이 텐트를 짊어지고 왔다.
가볍고 디자인도 나름 쓸만하고 팩다운과 함께 로프로 사방에서 버팅겨 줄 수 있으니 바람에 대항하기에는 아주 좋은 텐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로에 강하다는 것이 또한 장점이라 하겠다.
그런데 오늘 밤의 바람이 장난! 아니었으니......
날이 선 수리봉 정상에서의 숙영 중에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찬 바닷바람은 난생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마치 악마가 찾아와 우짖는 듯 공포의 소리를 냈기 때문에 그것이 오늘밤의 공부였던 모양이다.
희한하게도 자정을 넘기자 그렇게도 고요하던 바다가 포효를 시작하면서 2,3분 간격으로 집중강풍을 들이쳐대면서
텐트를 두들기며 말아 올리려 했으니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광풍의 크레인이 몰려와 텐트를 말아 올려 저쪽 선운사 아래로 이 텐트를 세차게 던져버릴 것 같은 그런 기세였다.
오죽하면 공포를 느꼈겠는가.
어디 바람 쎈 날에 한 두번 숙영하였으랴만, 이날 밤의 숙영만큼 힘들었던 기억은 별로 없다.
희한하게도 여명이 터오르기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 싶게 밤의 친구이자 악마의 연인 같았던 광풍은 소리 소문도 없이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참, 신기한 자연현상을 체득하던 날이었다.
그래 악마는 해를 싫어하는가 보다.
- 텐트를 세팅하고 나서 석양빛을 한껏 즐기는 호사스러운 시간을 가져 본다 -
- 마침 보름달이 길동무를 해 주시니 오늘밤이 심심치는 않으리라 싶다 -
- 밤내내 보름달이 지켜 주셨다 -
- 그러나 밤 12시 무렵부터는 엄청난 바닷바람이 불어와 새벽까지 계속 되면서 공포를 느끼게 해 주었다 -
- 광풍은 햇님을 무서워 하나 보다 (여명의 방장상 라인 모습) -
- 광풍을 잠재워 주시는 고마운 일출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
잠에 드는 둥 마는 둥 밤 내내 바람에 시달리다가, 동이 트는 시간이 되자 비로소 바람결이 잠잠해 졌다.
정말!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깡패같은 바람의 흔적을 느끼면서,
우리네 인생도 이와같은 질곡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말 것임을 대입해 본다.
그렇게 우리는 의연한 마음으로 인생 태풍의 위기를 항상 잘 넘기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튼 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밤의 끝에는 태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광명을 찾는 정신줄을 놓지 말고서 힘차게 살아 나가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저런 생각줄에서 왔다갔다하며 잠을 설치다가 어느 순간 혼절에 동화되어 깊은 잠에 한번 빠졌다 싶다.
그러다가 깨어 났으나, 다행스럽게도 상쾌한 여명이 찾아왔나 보다.
그래 얼른 방한복으로 완전무장을 갖추고서는 일출을 잡기 위해 서둘러 니콘을 꺼내들고 밖으로 나간다.
밖에는......
그야말로 새벽 여명이 황홀한 지평을 그리며 필자를 반겨 주고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도 모진 밤을 산꾼들은 인내로써 참아내며 기다렸던 것이다.
아!
자유다!
대자유가 여기에 있다!
- 이 일출의 환희심을 맛보기 위해 광풍의 밤을 참아낸 것이다 -
- 햇님 왼편이 방장산 실루엣이다 -
< 일 출 >
해 떠 오르는 시간
일출 보러
산에 올랐다
아침 구름
바다 이룬 곳에
빈마음 가득터니
해 떠 오르자
물밀듯이
그리움 일어 난다
그러기에
일출 보지 않으려
했는데......
그리움 가득 채우고
돌아 서려니
내마음 서럽다
- 小鄕 權大雄 ( infol@daum.net )
- 30여분을 그렇게 일출의 환희삼매에 빠졌다 -
- 동틀 무렵의 겨울새벽이 신비감 그 자체임은 비박해 보신 분만이 알리라 -
- 선운사 뒷편 쳔연 동백림에 서리가 가득하다 -
새벽의 일출에 맺혔던 환희심은 좀처럼 가시지 않고서 필자의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그러나 그 일렁임을 필자는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일렁임 가운데 내재해 있는 그리운 그 무엇인가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 애를 써본다.
그러나 이내 그러한 집착의 몸짓도 거두기로 한다.
항상 그렇지만 정상을 오를 때는,
그 무엇인가를 얻어가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하며 등정을 한다.
그러나 정상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벗하는 동안에 자신이 그 정상과 동화되었음을 이내 느끼게 된다.
그러면 되었지......
다른 그 무엇을 또 바라랴?
그렇게 떠나는 발걸음같이 걸음걸음이 가벼우랴.
- 비행운雲을 뿌리고 지나가는 비행기가 산길을 재촉한다 -
수리봉에서 햇반과 짜장국을 데워 아침으로 들고서 바로 행장을 꾸린다.
보통은 누룽지로 해도 되는데, 오늘은 점심을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르므로 좀 든든하게 식단을 차린 셈이다.
벌써 한 팀의 등산객이 지나갔으니 이내 이곳도 시끄러워질 것임은 자명하다.
관광 당하지 않으려면 얼른 짐을 꾸려서 길을 떠나자.
그런 마음으로 패킹을 하는데, 추위 때문인지 손이 곱아서 어째 집 떠날 때와 같은 깔끔한 패킹 솜씨가 안나온다.
오히려 쓰레기주머니만 늘어난 배낭의 모습이...... 영! 그렇다.
흔히들 폼생폼사[폼生폼死]라는 말을 자주 한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는 뜻. 배가 고파도 예쁜 옷을 산다거나, 실력도 없으면서 좋은 도구만 사는 경우에 잘 쓰는 말이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사전적 의미를 읽어 보면서 배가 고프지 않으면서 예쁜 옷을 사는 경우는 폼생폼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대부분 이와같은 사전적 의미가 맞겠지만, 기왕지사 인생지사도 폼 좀 나게 살아보면 어떨까?
예전에 선비들은 결코 추워도 곁불은 안 쬐었으며,
비가 내리고 옷이 젖어도 곁우산은 안썼다 한다.
그런 정신이 폼생폼사라고 다시 정의해 보자.
기왕이면 폼 좀 나게 살아라!
남들이 다시한번 쳐다볼 수 있게,
고고한 자신을 빳빳이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폼생폼사의 정신이라고 그 의미를 다시 정정해 보자.
그렇게 살아라! 이 말씀이다......
- 그래 서둘러 길 떠날 채비를 한다 (요즘의 텐트들은 너무나 가볍게 잘 만들어졌다) -
- 옛적 군용 A Tent는 너무나 무거웠다 (1969년 지리산 종주 때 필자) -
- 미스타 시에라에 패킹을 끝낸 모습 -
- 미스터 불독! 좀 웃어 보며 포즈를 취할 걸 그랬다 -
행장을 꾸리고서 다시 길을 떠난다.
필자는 이미 소년시절부터 방랑벽이 있어서 배낭에 텐트 짊어지고 무전여행 다니기를 밥먹듯이 했기 때문에 배낭 꾸리는 일이 이제는 이골이 났다.
군용 A텐트가 너무 무거워서 그 당시에는 두 명이 텐트와 폴대와 군용침낭을 나누어 패킹을 했기 때문에 솔로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으나,
지금은 장비들이 너무나 발달하여 혼자서도 충분히 박배낭을 패킹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그 당시와는 상황이 틀리다고 본다.
다만, 나이가 들어서 배낭의 무게를 줄이고 줄여야 하기 때문에, 그러자면 히말라야를 등정할 수 있을 정도의 고가장비로 대체를 해야 하는데,
필자는 언감생심 히말라야는 꿈도 꾸지 않기 때문에(또 바람이 들면 장담을 할 수는 없겠지만......) 꼭 교체를 해야만 하는 가에 대해서는 갈등이 많은 편이다.
국내여행을 혼자서 그것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시도해 보려면 배낭의 경량화는 필수일 수 밖에 없어 그나저나 고민은 된다.
암튼, 그건 그때 가서의 일이고......
지금의 장비도 45년 전과 비교하면 매우 훌륭하므로 나름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슬리핑 백만큼은 필자도 최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려 하고 있다.
산에서 숙영지를 꾸미는 일은 생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검증된 고가장비로 준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하다.
고라이트와 도이터의 두 종류 침낭과 떠마레스트의 네오에어 매트를 가지고서 현재는 4계절을 모두 커버하고 있다.
필파워 850에 구스다운 1,600그램 정도의 명품 발란드레 침낭과 같은 경우는 오히려 여름에 써먹을 수 없기 때문에
적절히 상기 두 종류를 배합해서 적응을 하고 있는데, 나름 만족이다.
동계의 가장 추운 날씨에 대응할 때에는, 침낭 커버와 상기 두개의 침낭을 겹쳐서 그 안에 내피로 이너를 깔아주면 영하 20도까지는 생존이 가능하게 구성할 수 있다.
단점이라면 부피가 좀 커진다는 점. 그러나 발란드레로 갈 경우에는 삼계절용을 또 구해야 하므로 어차피 마찬가지이고 비용면에서는 오히려 더 경제적이다.
옛날에 본 '아이거 북벽(,The North Face)'이라는 영화는 절벽에서 그야말로 로프에 의지해 비부악도 하던데,
거기까지는 필자가 안 바랜다.
언감생심 필자의 체력으로는 절대 따를 수 없는 경지임을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자일도 잘 타보았으나, 그 경지는 필자와 어울리지 않음을 이내 알았던 까닭이다.
그렇지만 노후의 여정에 맞는 장비로 재구성하려는 노력만큼은 아무튼 계속할 작정이다.
마지막으로 이스턴의 1킬로그램 짜리 텐트 정도만 구입하면 끝날 것 같기는 하다.
누구는 텐트를 제일 먼저 비싼 걸로 바꾸기도 하지만,
그것은 폼생폼사를 잘못 이해하는 젊은 분들의 경우이고 텐트는 침낭, 메트레스에 이어 세번째를 차지하는 생존장비라고 생각하면 된다.
생존에 관한 문제에서 세번째에 드는 장비를 첫번째로 구입하는 것은 폼생폼사가 아니라 겉멋만 잔뜩 든 겉생겉사이기 때문이다.ㅎ
그러므로 이제 거의 다 오기는 한 것 같다.
융프라우산 [ Jungfrau 山 ]
높이는 4,158m이다. 베른알프스산맥에 속하는 산으로,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북벽(北壁)에는 중생대 쥐라기의 석회암이 노출되어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철도역인 융프라우요흐(높이 3,454m)에서 4시간이면 등정할 수 있으나 상당한 숙련이 필요하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름다우며 북동쪽에는 묀히와 아이거, 남동쪽에는 알레치 빙하, 남쪽에는 알레치호른, 더 멀리에는 몬테로사산이 있다. 융프라우란 ‘처녀’라는 뜻이며, 인터라켄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명명되었다.
융프라우 철도는 1896∼1912년 건설되었으며, 최대경사도 25°의 아프트식으로, 9.3km를 오르는 데 50분이 걸린다. 기점역(基點驛)인 클라이네샤이덱(높이 2,061m)에서 약 2km는 완만한 초원이지만, 나머지 7km는 모두 아이거와 묀히의 산허리를 뚫은 터널이다.
해발고도 2,865m의 아이거반트역(驛)에서는 아이거 북벽의 1,800m 아래쪽에 있는 그린델발트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 1811년 마이어 형제가 발레 쪽에서 등정에 성공하였으며, 1865년 영국의 G.영과 H.B.조지가 인터라켄 쪽에서, 1927년에는 2명의 가이드가 남쪽에서 각각 정상에 올랐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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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산반도 불사의방과 줄포만을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 -
- 수리봉을 지나 곧 만나게 되는 또다른 조망대(좁아서 비박지는 못 된다) -
- 선운사 윗쪽으로 광활한 차밭이 조성되고 있나 보다 -
- 안장바위와 선운저수지가 점점 가까이 다가 온다 -
- 저 참당암은 평범해 보여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
- 가운데 사자머리 모양을 한 천마봉이 바로 내원궁이 있는 도솔암이다 -
그건 그렇고......
아무튼, 산상에서 맞이하는 월출과 일출의 장엄함에 대해서는 이를 경험하지 않은 분들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말은 꼭 해주고 싶다.
아무리 좋은 화소의 DSLR Camera로도 건질 수 없는 화각의 장엄한 일출을 어찌 다 필설로 표현할 수가 있으랴.
와이드 렌즈로도 절대 표현 못할 그 장엄함을 다행히도 우리의 두 눈은 그대로 건져낼 수가 있다.
그 장엄한 일출을 맛보려면, 그래서 산에 올라가 직접 새벽을 맞이하는 수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말로는 설명이 안되는 까닭이다.
ㅎㅎㅎ
마치 새벽 일출을 광고하는 카피라이터 같지 않은가.
그리고 필자의 가슴 깊은 곳에는 산을 제압하려는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 그 자체가 되고 싶은 마음 밖에는 없다.
듬직하고 묵중하면서도 언제나 말이 없는 산山!
멋지지 아니한가.
마치 말빚도 모두 거두고서 훌훌 떠나가신 법정스님 같은 모습이 아닐까 싶다.
어차피 우주와 우리는 하나되는 일체일 뿐이니까.
그런 마음을 다시금 새겨 보면서 수리봉과 이별하기로 한다.
선운사의 전경과 작별하려고 내려다 보니 아침빛이 경내에 가득 뿌려 지면서 동백숲에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이제는 떠나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능선길을 재촉하는데 계속해서 변산반도가 우측에서 따라 온다.
지난 번에 보았던 변산의 낙조도 좋았다 치지만 어제 본 수리봉의 낙조 또한 고왔다는 생각만 건져 본다.
그런 마음으로 참당암 삼거리에 이르렀다.
참당암은 가보지 않은 암자였으나,
위에서 내려다 보는 조망으로 보아서는 크게 끌리는 점이 없었으므로 그냥 패스하기로 한다.
그래서 지름길로 하산을 재촉해서 선운사와 도솔암 사이에 나있는 임도길로 내려 섰다.
이제 점심 때가 가까워 왔으므로 단안을 내려야 한다.
낙엽이 많은 산길에서의 취사는 매우 위험하므로(필자는 겨울 산행시 텐트의 베스티블 내에서가 아니면 취사를 절대 하지 않는 것이 신조다)
점심은 행동식으로 대신할 수 밖에 없다.
그래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게 다행이라 싶다.
도솔암은 워낙 유명하고 불자들이 많이 찾는 곳인지라 절간에서 점심을 공양 받을 수는 있겠으나 그 또한 여인네 신도가 너무나 많은 특성상 꺼려 진다.
그러니 행동식이 대안이다.
임도길을 서서히 오르면서 중간에 있는 진흥굴과 장사송도 사진에 담아 본다.
올 때마다 몇 번을 보았지만 지나치지 못하고 그곳에서 휴식하며 완상하였을 수많은 시인묵객들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서정주 선생의 소년시절 모습도 떠올려 본다.
소년은 배고픈 가난의 시절에 이곳에서 어떤 기운을 느꼈을까.
점심 때라 그런지 맨날 먹는 타령에만 대입을 하는 마음에 참 우스운 생각이 든다.
그래 그런 마음도 털고서,
6백년이 넘었다는 반송 종류의 장사송을 바라 보려니 참으로 그 장쾌한 모습에 눈이 시원하다.
아름다운 나무.
앞으로도 천년을 더 살면서 많은 참배객들에게 다함없는 우주법문의 감동을 주시거라.
그렇게 기원 드리면서 가까워 온 도솔암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드디어 도솔암 초입에 이르르니 목탁소리가 몇 번 들린다.
점심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 소리다.
주차장의 버스에서 내린 신도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들 있다.
공양을 들기 위해서다.
내 예감대로 몽땅 여신도들이시다.
- 한참을 걸어 도솔암 가는 깔끔한 임도로 내려 섰다 -
- 신라의 진흥왕이 도를 닦았다는 진흥굴 -
- 반송 계열로 수령 6백년을 자랑하는 장사송 -
- 드디어 도솔암 입구에 이르렀다 -
- 그렇게도 와보고 싶었던 내원궁도 이제는 보이기 시작한다 -
- 꽃무릇 밭의 경구가 마음을 새롭게 해 준다 -
"꼭 할 수 있는 한가지만이라도 실천하라 "
이 얼마나 가슴에 와닿는 말인가.
- 중도솔암터의 마애석불에 참배객들이 끊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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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를 구할 비기를 가슴속 복장에 품었다는 마애석불이다 - (인터넷 자료 옮김)
- 저 네모친 복장 속에 나라를 구할 비결책을 보존했었다고 한다 -
이 마애석불에는 비화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는데 설명문과 인터넷 자료를 합하여 여기에 옮겨 보면 이렇다.
▒▒▒ 도솔암 마애불의 비밀 ▒▒▒ 도솔암 서편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이 마애불은 인근주민들에게 [미륵불]로 불리면서 많은 이야기를 안고 있는데, 특히 미륵신앙의 배경 하에 동학농민운동과 밀접히 관련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미륵신앙은 미래불 (彌勒)이 출현하여 현실의 모순과 괴로움을 타파하고 이상세계를 구현하리라는 구원론적 신앙으로서, 특히 억압받고 있는 하층민에게 널리 수용되었다. 이 마애불이 조성된 후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불상의 배 부분에 표시된 사각형의 복장(腹藏)속에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비기(秘記)가 들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비기를 함부로 꺼내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숱한 전설만을 남긴 채 세월이 흘렀다. 그뒤 100여 년이 지나 전라도 고부를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이 무르익던 무렵, [미륵부처님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있는데,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말이 은밀하게 나돌았다.
이에 1892년(고종 29) 8월 어느 날,동학 정읍대접주인 손화중(孫華仲)의 접중(接中)에서, 민중을 구원할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륵의 비기가 반드시 필요하며 지금이 바로 비기를 열어볼 때임을 결의하였다. 이에 동학도 300여 명이 도솔암으로 올라가서, 청죽 수백 개와 새끼줄 수천 다발로 임시가교를 만들어 암벽에 올라간 뒤 비기를 꺼내었다. 그후 미륵의 비기에는 [조선 500년 후에 미륵석불의 복장을 여는 자가 있을 것이며, 그 비기가 세상에 나오면 나라가 망할 것이요,그러한 후에 다시 새롭게 흥할것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동학도가 천지개벽의 비결을 입수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무장, 고창, 영광, 흥덕, 고부, 정읍, 태인, 전주 등 전북의 동쪽지역 일대에서 동학도의 수가 수만명으로 급격히 불어 났다. 미륵신앙(彌勒信仰)과 동학(東學)이라는 사상적ㆍ실천적 물결의 합류는, 민중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희구해 온 혁세(革世)의 불씨에 거대한 불길을 일으켰던 것이다. 실제로 동학도들이 비기를 꺼내었는지 또는 그 내용이 어떠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미륵불의 힘을 통해 모순에 찬 현실을 타파하고 이상세계를 이루고자한 당시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과 실천적 행동은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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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의 정읍대접주 손화중은 전봉준이 선봉장이었다고 한다면,
바로 병참을 담당하던 보급부대장이었기 때문에 후방에서 보급품을 모아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대접주의 군사들을 먹일 막중한 책임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미륵불의 도래를 빌미로 해서 세상을 구할 비책을 손에 넣었다는 소문의 확산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도솔산 칠선대의 미륵불에서 나온 비기를 손화중이 손에 넣었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그의 예견은 적중해서 수만의 후원자가 그의 휘하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고 점점 강해진 동학의 세력은 이제 전라도땅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면서 나라를 구할 유일한 대안세력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조선의 군대마저 무장해제를 시키고 기세등등했던 일본군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현상으로써 민초들의 군대가 출현한 셈이었으니,
그 간담이 얼마나 서늘했을 것이며 조선민초들의 사나운 기상 또한 어찌 부정할 수 있었으랴.
조선말,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항변조차 하지 못했던 그 시절에 어떻게 저런 큰 세력이 호남땅에서 의병하여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말인가?
거기에는 백제의 미륵신앙과 신라의 미륵신앙의 차이점에서 나오는 믿음이 크게 달랐던 까닭이 있었다 하겠다.
원래 동학의 시초는 동학이라는 종교를 정립한 경주(慶州) 출신 최수운(崔水雲)이 그 시조가 된다.
그렇게 경상도 땅에서 일어났던 동학은 난세를 맞이하면서 전라도 땅에서 의병의 기운으로 폭발하고 말았으니,
이는 신라와 백제라는 두 세력의 양면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보아야 한다.
즉, 화랑의 세력은 통일신라의 일등 공신이 되었는데, 그들의 또다른 이름이 바로 미륵선화(彌勒仙花)였다고 한다.
이렇듯 신라의 미륵신앙은 상류사회에 뿌리를 내리고서 제도적으로 부유층에 자리잡은 종교적 신념으로 발전된 반면에,
백제는 신라에 의해 멸망되면서 그 미륵신앙 역시 백제를 다시 부활시킬 매체로써 기층민들의 가슴 속에서 재림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말해 미륵불이 도래하는 날 서민들의 모든 기복이 절로 이루어지고 백제가 다시 부활하게 된다는 굳센 믿음이 천년을 이어지면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런 미륵불의 배꼽에 감추어진 복장에서 나라를 구할 비결을 손화중이 입수하였다고 했으니,
백제 유민들의 기대가 활화산처럼 폭발하게 된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목숨도 아깝지 않을 그런 의병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의거로운 일이야 말로 우리의 자주정신을 다시 부활시키는 발로가 되었던 것이다
익산 미륵사와 모악산 금산사 그리고 도솔산 선운사는 이렇게 미륵신앙의 자생지로서 천년을 보존해 내려오던 사찰이었으니,
동학의 폭발이 미륵불의 재림을 기다리던 전라도의 하층민들에게서 이제 그 때가 되었다는 신호탄이 되기에는 결코 한 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민초들의 기복신앙으로 자리 잡았던 미륵불의 재림에 대한 환영은 걷잡을 수 없는 기폭제가 되어 전라도 땅에서 크게 폭발하여 나라 전체를 뒤흔들면서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것이니 이를 정말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한양의 사대부들이 자신의 일족을 보존하기 위해 어떻게든 친일의 물꼬를 터볼 궁리만 하던 그 불순수의 시대에,
기 하층민이던 민초들은 나라를 구할 생각을 하고서 과감히 제 몸도 아끼지 않는 구국의 대열에 용맹스럽게 뛰어 들었으니
그 의기로움은 지금 되새겨 보아도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었으며 다시금 새겨 보아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정신력이었던 것이다.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를 그대들은 꿈꾸는가?
그렇다면 이 동학의 기상을 다시금 되새기며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겠는가.
- 반송이 실루엣으로 마애불의 발 밑에다 묵송을 그려 냈다 -
- 마애불 오른편에는 단아한 나한전이 자리하고 있다 -
- 나한전과 내원궁 입구(우측) 일주문이 함께 보인다 -
- 현자와 성인들의 모습이 참으로 인자해 보인다 -
- 이제 상도솔암인 도솔천내원궁에 오르기로 한다 -
- 천마봉에서 바라본 도솔천 내원궁(상도솔암). 굳은 신심으로 새긴 미륵불이 천년 비바람을 견디며 내원궁을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다 - (인터넷 자료 옮김)
필자가 오늘 이렇게 불쑥 선운산 수리봉에 올라 변산의 불사의방을 가늠해 보면서 그 기운의 원류를 고찰해 보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지금의 시대 또한 손화중이 입수했다는 비기 만큼이나 목마르게 위급한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혹시들 해 보셨는가?.
나라가 두동강이 난 지금은 필시 한반도의 이천년 긴 역사로 보았을 때에 태평성시가 아님은 자명한 일일진대,
어찌하여 우리 민족은 지금이 태평성대인양 착각하면서 살고 있는 걸까하는 그 점이 심히 우려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남북으로 갈려서 서로들 다른 강대국에 의지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형제 대하기를 원수로 알고서 이를 득득 갈며 살고 있는데,
지금이 위기가 아니면 언제가 위기라는 말인가?
외국의 군대가 들어와 이 땅에서 나갈 줄 모르던 시대는 오로지 일제강점기와 현재 밖에는 없는데, 그리 보아도 이 나라가 어찌하여 위기가 아니라는 말인가.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주해 있던 시기였다.
그후 러일전쟁에서 참패한 러시아군이 물러가고 일본군만이 유일하게 남아서 결국은 한일합방까지 획책했던 것이니,
이렇듯 외국의 군대가 자주국에 진주하고 있음은 절대로 우리에게 유리한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님을 새삼 간과해서는 안된다.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복하자,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의 속국으로 조선을 강등시키고 나서 출병 한 달만에 물러들 갔는데,
그로 보아도 외국군대의 한반도 진주는 1900년대 이후의 특이한 시대상황 밖에는 없었던 실정이니
나라가 자주국이 되려면 한시바삐 국력을 일으켜서 자주국방의 확립과 함께 외국군대의 출병을 요구해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시기가 바로 요즘의 시국인 것이다.
지금 젊은 지도자가 나라의 명운을 걸고있는 위태로운 북의 정세를 바라 보면서,
그를 꼭두각시로 세우고서 쥐락펴락하는 실체가 그 누구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시는가.
그들의 정권이 붕괴될 때에 우리는 과연 호시절을 만나 통일의 대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겠다고 낙관하시는가.
월출산 상견성암편에서 조국의 명운이 달린 이 문제들을 여러 주장을 통해 필자가 자세히 거론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또다시 심도있는 논의를 하지는 않겠지만,
친일親日, 친중親中, 친미親美, 친로親露의 세력만이 유일하게 호사를 누리고 있는 기회주의 [opportunism, 機會主義]에 물든 자들이 활개를 치는
작금의 세태를 볼 때에 확실하게 이 나라가 난세에 처해 있다는 분명한 입장만큼은 다시금 곱씹고 넘어가야 겠다.
(우리 영혼의 맑은 수행처를 찾아서 - 월출산 상견성암 편 바로가기 ---> http://blog.daum.net/valeriano/17627659 )
우리의 정신력은 백제유민이 미륵불의 재림을 기다리던 그런 시대정신을 이제는 넘어서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본다.
팔왕새야 울지 말라던 녹두장군의 슬픈 이야기가 이제 다시 재현되어서는 아니되는 까닭이 지금 우리에게는 경제력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는 유리한 조건 때문이다.
이 경제력으로 군사력을 키운다면 지금이 통일의 적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무너질 때에 중국이 바로 접수하러 나선다면,
우리가 하다못해 핵카드라도 하나 쥐고서 맞장을 뜨자 배수진을 치고 달려 들어 북한을 지키려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런 대안이 하나도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한반도의 비핵화만 찬미하고 있으니 이는 미국의 MD정책에 말려든 결과로서
중국과 러시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참으로 미련한 속국의 지위로 밖에 아니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중국과 소련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가 춤추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심도있게 검토를 해 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국의 MD정책(Missile Defence Policy)에 먼저 말려든 캐나다의 경우를 살펴 보자.
1950년대에 미국은 캐나다에게 MD의 가입을 강요했고, 캐나다는 이에 따랐다.
당시 캐나다는 최신 초음속 전투기 개발이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하2 이상의 속력을 가진 애로우Arrow 전투기의 시제기를 6대 정도 생산한 단계였던 것이다.
캐나다의 예산은 양자 택일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는데,
즉 MD가입이냐, 전투기개발프로젝트로 지속해서 나가느냐 중의 양자택일의 상황이었다.
캐나다는 미국의 강권에 못이겨 MD에 가입했고 결국은 전투기 개발을 포기하므로써 자주국의 지위에 크게 악영향을 받게 되었다.
아무리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다고 한들 무엇하겠는가?
만일 소련이 동시에 캐나다와 미국을 요격하는 미사일을 날렸을 때에 미국은 자신들의 본토방어를 위해 먼저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발사하지,
캐나다를 위해서 자국의 방위권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 아니겠는가.
미국은 그렇게 두마리의 토끼를 일거에 잡는 정책을 캐나다와의 관계에서 성공했던 것이다.
전투기를 미제로 도입하게 되면 모든 부속품을 미국에서 사들여야 하는 일급 구매국가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캐나다는 미국 변두리의 방공망 구실을 하면서 미국의 도움 없이는 자체적인 전투기도 날릴 수 없는 군사의존형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니,
이를 좋은 본보기로 삼아 우리는 그러한 술수에 말려들어서는 결코 안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젊은 시절 미공군의 문관으로 재직하면서 미군의 군수품을 이동시키는 업무를 관장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뼈져리게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면서 자국의 본토에 핵이 안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 한반도가 필요할 뿐임을 차제에 집고 넘어가야 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중국과 소련의 묵인 하에 북한이 대형 미사일을 실험하면서 미국을 위협하고 있으니 이는 3차대전까지도 불러올 수 있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오늘 북한은 3단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성공시켰으니 이는 정말 한반도를 화약고로 몰아가는 위험한 징후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러한 징후로 만일 3차대전이 발발하게되면 한반도는 소련과 중국과 미국에 의해 핵탄두 실험장으로 전락하게될 위험 요소를 가득 안고 있는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만 터지는 격이니 이런 억울한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또 다른 예로 중국과 소련이 미국의 MD망을 제거하기 위해서 먼저 미국 본토나 알래스카를 칠 것 같은가 생각해 보자.
결코 그렇지 않다.
자국을 사정거리로 두고서 넘보고 있는 한반도의 레이다망과 미사일망을 제일 먼저 타겟으로 잡고서 공격을 시도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그 때에 이르러 우리의 대안은 무엇이란 말인가.
속절 없이 우리의 산업시설이 다 파괴되면 그때 가서도 우리가 세계경제대국의 일원이라고 큰소리 뻥뻥치면서 물건을 수출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수출할 물건이 어디 있겠으며, 만들 원료는 또 어디에 있을 것이며, 이미 폐허로 변한 산업시설의 폐기물들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
- 중상단부가 내원궁이고, 우측 하부의 절벽에는 마애불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 (인터넷 자료 옮김)
- 내원궁에서 더 깊이 들어가는 쪽은 단애가 감싸고서 상도솔암을 호위하고 있다 -
- 조선 최고의 비보터인 내원궁이 드디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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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원궁의 내부에는 보물로 지정된 지장보살상이 계신다 -
근본적으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의 국방정책이 결코 미국이나 일본, 중국과 소련 중의 어느 한 편만을 편들어서는 안된다.
현재 한반도 남쪽은 미국의 군사기지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과 중국, 일본을 사정거리에 두고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결정적 위치에 있음을 주목하자.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모든 강대국들이 탐내는 중요한 군사기지이기 때문에 반대급부적으로 자체 생존이 영구 가능할 수 있는 위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즉, 강대국간의 국경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중립국으로서의 완충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갑에 우호적으로 쏠리게 되면 을이 불안해 하면서 이 완충지의 점령을 심사숙고하게 된다.
만일 갑과 을 그리고 병과 정을 모두 아울러 평등한 정책을 가지고서 대등한 관계로 어느 한 쪽에 쏠림이 없는 정책기조를 영구히 견지해 나간다면
그들은 모두 안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생존의 비결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립국가를 천명하고서 그에 준하는 국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미국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자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한다면 어느 강대국도 우리와의 한 판 일전을 꺼리게 된다.
갑과 을 사이에 있는 완충지대에서 핵을 날린다고 가정했을 때에 모두가 사정권에 들어 있는데 어느 누가 감히 공멸하려고 대들 것인가.
그렇게 해야 영구생존, 자주생존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심사숙고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정세가 캐나다나 일본의 경우 보다 더욱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은 아니 드시는가.
자체 제작이 가능했던 수준인 레이더 기지 구축기술과 이미 실전 배치되어 있는 방공 미사일 철매,
그리고 KFX 등을 모두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계획이 바로 캐나다가 당했던 미국의 MD정책이라는 점을 주목해 보자.
미사일 기지의 부지 제공과 제반 운영비는 한국이 부담하라!
나머지는 모두 자기들이 운용하면서 핵우산의 그늘에 관한 정보는 제공해 주겠다 하는 이 계획에 말려들면 자체 제작했던 레이더 기술력은 이제 물거품이 될 것이고,
국산 미사일 개발 실적 또한 사장되면서 우리는 그들의 중요한 전략무기 주요 구매국으로 부상하게 되면서 영구히 중국과 소련이 깔보는 나라로 전락할 것이다.
만일 북한이 침몰하는 유일한 통일의 기회가 다가온다면 그때가서 중국에 대항할 큰 힘을 우리가 예비해 놓았는지 재삼 재사 점검해야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매우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은 장수 용골대와 마부태 등을 화의의 사신으로 남한산성의 인조대왕에게 보내서 항복조건으로 총 11개의 수측을 준수할 것을 강요했다.
거기에는 청나라가 명明을 칠 경우 용병 3만을 지원군으로 보내라는 조건 등등 여러 조항들이 속국의 지위를 강요하는 식의 일방적 불평등 조약으로 제시되었는데,
그 전에 동등한 형제의 나라로 맺었던 청나라와 조선의 조약은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해서 조공을 바치는 군신의 관계로 대한제국의 성립 때까지 지속하게 된다.
그런데 그 9측을 살펴보면 '조선은 신구(新舊) 성원(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즉, 청나라가 조선을 보호할 것이니 조선이 보유한 성곽 중 기존의 것은 보수하지 말 것이며, 절대로 새로운 성곽도 계획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조선의 성곽을 재보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그것은 청과의 전쟁을 대비하겠다는 통보로 알고,그런 일이 발생하면 다시 쳐들어 오겠다는 강력한 엄포였던 것이다.
그런 내용이 오늘날도 비슷하게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은 아니해 보시는가.
레이다 기지를 구축할 부지 제공과 그 유지 비용은 한국이 부담하라,
그 운용은 미국이 할 것이며 그에 대한 군사정보 제공은 그때 가서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맹점이 도사리고 있다.
만일 대미 전쟁이 유럽과 중동 그리고 한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다고 했을 때 그 우선순위에 있어서 한국이 몇번째가 될 것인지 상상해 보자.
그들은 가장 중요한 중동의 오일 방어를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는 전면전을 첫번째 목표로 삼을 것이다.
둘째로는 그들의 모국母國인 유럽의 방어권을 위해서 사력을 다해 싸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3위권으로 밀려나게 되는데 군사지리적으로 중요한 병참기지임은 한국도 분명하나,
1,2 순위에 밀려 한국을 포기하게 되는 상황까지 어찌 안 온다고 장담을 하랴?
2차 마지노선으로 일본이 있고, 그 뒤에 미태평양방위사령부가 있는 하와이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걱정이 없다.
군사적으로 공백상태가 될 한국을 나머지 강국인 중국과 소련 그리고 잠재적으로 일본이 차지하려고 넘보는 것은 자명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구한말과 매우 유사한 시대적 상황이 한반도 주변에서 똑같이 맞물리며 재현되고 있는데 이 무서운 사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가?
- 필자는 일찌기 이렇듯 아름다운 지장보살을 뵙지 못했다 - (인터넷 자료 옮김)
- 내원궁 오른편을 호위하고 있는 천마봉의 천마좌座 -
- 막다른 절벽 끝에 산신각이 함께 하고 있다 -
- 이 산신각은 조선시대의 선운사 수행승이었던 두 선사禪師를 산신으로 모셨다 -
지금 우리가 MD정책을 받아들이는 것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게 조선의 성곽을 다시는 재정비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화약을 한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아마도 일본과 중국은 우리가 영구히 재무장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 중국이 동북공정을 빌미로 북한을 집어 삼킬 수 있을 것이고,
일본은 독도를 빌미로 다시 출병하게 될 것은 뻔한 이치인데,
만일 핵우산이 어느 날 미국의 이해와 맞물려 사라진다고 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느 우산에 기대야 할 것인가.
왜 우리는 핵우산을 가지면 안되고 자기들은 가지고 있어도 되는가.
왜 우리는 노예스런 속국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서 수출만 잘 된다면 연평도가 포격으로 풍지박산이 되건 말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일본이 우기던 말던 오로지 부유층 일족의 안위만 편안하기를 바라면서 식민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의 정치를 담당한 상류 지도층들은 혹시 자기들 생존을 위한 자산을 외국에다 빼돌려 놓고 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외국으로 건너가면 그뿐이라는 안일한 발상으로 즉흥적 정책을 마구마구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들이 혹시 이중국적자는 아닌지 체계적으로 통계를 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아니 드는가.
이중국적자들이 우리의 상류 지도층에 얼마나 잔재하고 있는 것인지,
과거 친일의 후예들이 지금에 이르러 얼마만큼의 지위와 부를 유지하면서 옥상옥으로 군림하듯 살고 있는지 국민적 지지로 엄격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승만 시절에 유야무야 사라진 반민특위와 2010년에 해산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親日反民族行爲者財産調査委員會가 과연 제 할 일을 다했다고 보는가.
구한말의 친일파는 일제하에서 조선 최고의 지도층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으로 군림하였으며,
미국에 의해 해방되자마자 이승만의 반민특위를 무력화 시키고서 다시 제도권을 장악하며 기득권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친일파가 청산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재 찬탈하고서 독립운동가를 다시 탄압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의열단의 지도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부사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악질 친일경찰의 전력이 있는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던 사실이야말로 거꾸로 간 역사의 상징적인 본보기였던 것이다.
제국주의자에 맞서 싸운 세력이 식민통치에서 벗어날 때에 새로운 국가 권력의 주역이 되었던 사례들은 전 세계사를 들추어 보면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면서 급기야는 지도층의 일부가 다시 친일의 세력으로 물들면서 재무장하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일본육군사관학교의 제2분교라 할 수 있는 만주의 신경군관학교 출신이 우리의 정권을 잡으면서 부터는 친일세력이 더욱더 노골화 되어 갔으며,
지금은 언론마저도 일부 장악하면서 국가의 근본기조를 좌지우지 뒤흔들어 대고 있으니 과연 이 나라가 태평성대라고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 이제 이 161 계단을 내려 가야만 한다 -
- 그곳에는 하도솔암이 자리하고 있다 - (인터넷 자료 옮김)
- 하도솔암의 요사채 -
- 도솔암을 이별하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언가 허전하기는 했으나 한결 가벼워졌다 -
- 천마여 오래도록 조선을 지켜 주시라 -
자주국방이 없는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망각하고서는 지금이 태평성대라고 국민을 속이면서 펑펑 과소비나 조장하며 망동스런 정치나 하고 있으니 참으로 걱정이다.
거기에 국민들 또한 부화뇌동하면서 지도층의 검은 속셈도 모르는 체 열렬히 지지를 보내고 있으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될 일인가.
내일 모레 어찌될지 모르는 풍전등화의 국가 명운 앞에서 독재자의 딸을 환호하며 깨어날 줄 모르는 우경화의 보수세력으로 치닫는 그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비이성적인 망국의 정치 풍토 앞에서 이를 걱정하는 이가 과연 우리 주위에 몇 명이나 될 것인가.
당신만이라도 조국의 명운을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두 눈 부릅뜨고 올바른 시각으로 우리의 현실을 다시금 되새겨 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젊은이들이여 흔들림 없는 혼불에 의지하면서 강력하게 자주대한민국을 엮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고 묻지 말고 '어떻게 하겠다!'는 자신감으로 조국의 미래를 이제는 젊은 당신들이 차고 나가라는 말씀이다.
구태의 악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기득권의 정신은, 이미 친일의 총칼 앞에서, 이데올로기의 총칼 앞에서, 그리고 독재자의 총칼 앞에서
주눅이 들대로 들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진리를 보고서도 까맣다고 배신 행위를 했던 전력이 많은 사람들이니까
어떤 참신한 생각과 지도력도 그들에게서 기대하지 말고, 이제는 당신들이 조국의 미래를 책임지며 박차고 나가라는 말씀이다.
좌도 우도 아닌 자주성 있는 우리의 주체혼불이 활활 타 오르기를 필자는 강력히 소원한다.
조국이여 그렇게 일취월장하시라.
조선의 백성들이시어, 우리 고유의 힘을 길러서 우리 고유의 자존이 가능한 주체국가를 건설해 나가시자!
이 땅에 다시는 외국군대가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제 당신들의 책무다!
젊은 조국의 아들딸들이시어!
오로지 당신들만이 희망이다.
- 그런 마음을 안고서 선운사로 내려 온다 -
- 선운사의 영산전 뒷편으로 어제 야영했던 수리봉의 절벽이 보인다 -
- 조선시대의 멋을 한껏 간직하고 있는 대웅전 뒷편으로 천연기념물인 동백숲이 보호되고 있다 -
-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 -
그렇다면 우리의 젊은이들이시여! 과연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만 사대근성에 빠지지 않게끔 우리가 처신할 수 있는 것인지 선배의 조언을 듣고 싶으신가.
그 비결이라는 것이, 가급적이면 현재 유지하고 있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적극 활용하면서 군사대국의 면모를 재빨리 획득하는 일이라고 말씀 드려 본다.
올해는 이태리를 제치고서 세계무역 8강에 진입하는 쾌거를 달성하였는데 그렇게 쌓이는 돈을 어떻게 하면 유용하게 쓸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는 돈과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두가지 중대한 기회를 거머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그러므로 주변 강국에 버금가는 군사대국으로의 변신을 꾀하는 정책을 하루라도 빨리 달성해야만 한다.
그렇게 우리가 군사강국의 면모를 획득하게 되면 외국군대를 향하여, 우리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이니 우리의 영토에서 당신들에게 유리한 병참기지를 유지하지 말고
당신들의 영토 안에서 방공망체제를 구축하는게 좋겠다!며 외국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옛적에 우리나라가 근 이천여년을 자주적으로 살아 오던 정책에서는 외국군대가 오래도록 한반도에 머무는 정책은 매우 위험하였던 점을 상기해야 한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대전에서도 강력하게 만주를 지키고 있었다.
산동반도와 일본을 제패하던 백가제해百家濟海(너른 바다를 다스리는 나라)의 왕국! 백제의 해상국가는 당시 초강력국가로 동아시아의 해상을 지배했었다.
신라는 나당연합군을 유지했지만 당에 먹히지는 않으면서 독립국가의 품위를 유지했었다.
우리의 정신적 혼불이 결정적으로 약화된 것은 병자호란에 패배한 인조仁祖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릅을 꿇고 예를 올리면서 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자주국가의 장쾌한 기상이 꺾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우리의 민족혼이 청淸에게 무릅을 꿇었던 것이다.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바칠 수 밖에 없었다.
삼배구고두는 여진족이 천자를 뵈올 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는데 우리의 왕이 그렇게 치욕을 당하기는 선사 이래로 처음이었다.
이 일은 두고두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우리의 후손들이 베게 맡에서도 결코 잊지 말아야한다고 유언으로 남겨야 될 중대한 사안인 것이다.
인조의 항복 이후로 신라, 백제, 고구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우리의 기상은 처참하게 무너지며 곤두박질 치게 된다.
그렇게 조공을 바치다가 결국은 일본에 의해 조선은 망하게 되었으니 두번째의 처참한 유린이었다.
그후에는 중공군과 유엔군의 범람으로 인해 조국의 땅은 또다시 철저하게 파괴되면서 정신도 더욱더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어디에서도 민족의 자주성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통곡의 땅에서 그러나 조국의 혼불은 다시금 활활 솟으면서 살아나고 있다.
마치 강철이 수백번의 담금질을 당하면서 명검으로 재탄생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제는 두번 다시 외국군대에게 우리의 강토가 유린당하지 않아야될 당위감을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우리의 젊은 미래 혼불들이시어.
조국의 현 실정을 두 눈 부릅뜨고 직시하고서 두번 다시는 당하지 않겠다고 두주먹을 발끈 쥐도록 하자!
이와같이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 어느 한 쪽에 결코 치우치지 않겠다는 중립적 각오를 강력하게 유지할 수만 있다면,
오늘날 한국의 자존은 절대로 보장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영구적으로 말이다.
우리가 삼천년 동안 한반도를 자주적으로 지켜온 것은 좌우 어느 나라에도 정신적으로 결코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 왜 일어났던 것일까.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명나라만 지지하려는 정신 나간 세력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무엇인가.
나라의 왕이 처음으로 외국의 왕에게 무릅을 꿇은 치욕스런 사건! 아니었겠는가.
그러므로 오늘의 두동강난 조국도 결코 태평성대가 아니요, 지난 삼천년 이래 가장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위기감의 상황으로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이여!
필자의 세대는 이제 서서히 태양이 지고 있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투철한 조국관을 가지고서 장차 통일에 대비하려 하시는가!
......
그러자면 힘!을 길러야 하지 않겠는가.
이란이 북한의 비위를 맞추면서 오일을 판 모든 자금력을 동원해 가면서 북한의 핵기술을 빼돌리려고 하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란은 이라크가 미국에게 당했던 것을 곁에서 두 눈 똑똑히 뜨고 바라 보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잠재적 적국이요, 수천년을 놓고 보았을 때 잠재적 휴전국인 중국과 일본을 양쪽에 두고서 과연 어떤 정책을 취해야만 하는가.
미국과 중국에 의존되어 있는 현재의 한반도 상황에서 중국은 순순히 북한을 결코 남한에게 내어줄 수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북한군이 압록강까지 몰리고 있을 때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의 장래를 걱정해 보았을 것이다.
친미정권이 만일 북한에 세워진다면 그것은 중국공산당의 몰락까지 불러올 수 있는 위기상황이 될 것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그래서 중공군이 100만 대군으로 물밀듯이 한국동란에 참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미국의 정책이 만일 대만의 장개석에게 실지회복의 기회를 부추겨 동시다발적인 전쟁을 중공군하고 벌이기만 하였더라도 우리의 통일은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 못해 맥아더가 주장했듯이 원폭 한 발만 사용했더라도 쉽게 끝냈을 전쟁을 그들은 3만명의 미군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사대국을 위해서라면 있는 돈을 다 까먹고서라도 획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외국군대의 철수를 요구한다면(지금 한국에는 유엔군이라는 외국군대가 진주해 있는 상황이다), 중국도 조금은 안심을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이 일본이나 미국과 중국을 모두 동등시 하는 국가정책을 일관성있게 유지해 나간다면 안심하고서 북한에 대한 야욕을 조금씩은 잠재울 것이다.
금상첨화로 우리가 만일 핵무기라도 보유하고 있다면 중국은 절대 압록강을 넘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와서 안정되어 가는 중국의 경제부흥 상황을 핵 때문에 침몰당할 수도 있는데 그 자충수를 그들이 왜 두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핵무기도 없으면서 또한 외국군대도 철수하고 없는 상황이 한반도에서 다시 일어난다면 문제는 심각하게 열세에 몰리게 될 것이다.
왜 일본은 무례하게도 끊임없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요구하는 것일까?
만일 중국이나 소련에 의해 독도가 강탈되거나, 또는 일본과 한국이 서로 전쟁상황에 돌입한다고 했을 때에
독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아킬레스 건이 될 것이기 때문에 사활을 걸고 뺏어가려 하는 것이다.
왜냐고?
만약 독도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서 일본을 노려본다고 한다면 반경 1,000km 이내에 일본의 모든 영토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게 된다.
정확히 일본열도를 반틈으로 나누어서 좌우를 모두 요격할 수 있는 중요한 병참기지가 바로 독도이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 놓고 잠을 못자는 것이다.
만일 울릉도가 일본의 미사일 기지가 있는 곳이라고 가정을 해 보자.
바로 한반도는 울릉도의 미사일기지 사정권에서 반틈씩 남북 모두 요격당할 수 있는 사정권 안에 들게되어 맥을 못추게 된다는 이치하고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대마도 보다도 먼저 독도를 중히 여기며 사수해야할 중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울릉도가 일본의 미사일 기지라고 한다면 소련과 중국의 코앞에 일본의 미사일 기지가 진출하게 되는 격이니 그들 또한 잠을 못자게 될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도를 절대로 일본 또는 제3의 강대국에게 내어줄 수가 없는 것이다.
- 대웅전에 비해서 매우 왜소한 관음전은 그래도 단아해 보었다 -
- 천개의 손을 펼치신 천수관음보살상 -
- 무언가 뿌듯한 결산의 마음을 안고서 산문을 나선다 -
- 유스호스텔도 뒤로 하고 -
- 마이재를 들머리 삼아 선운산(336m)에서 하루 숙영하고, 도솔암과 선운사를 차례로 참배 드렸던 산행길이었다 -
- GPS Route Map -
- 선운사로 변산의 기운이 넘어오는 수리봉의 품안에서 하룻밤 유숙을 하고서, 도솔암의 진경에 마음의 장쾌함을 얻었던 초겨울의 감미로운 산행길이었다 -
- 오늘 새벽에 보여주신 이 일출을 결코 잊지 못하리라 -
여러가지 생각으로 버무려진 오늘의 운수행은 필자가 원하지 않던 전쟁광분론이었으니,
어찌보면 지탄을 받아 마땅할 일이 될 것 같아 잠시 저어해 진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이 몸 사대육신을 주시고서 다시 한번 공부해 보라고 보은의 기회를 주셨던 필자의 모국에 대해서 그만큼의 걱정은 해 두는게
참된 도리라고 생각하며, 그 사유의 문제점을 이제는 명확히 지적하여 우리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풀어나갈 과제로 삼게하자는 생각은 참 잘한 일이라 여겨진다.
보은의 정성으로 어찌보면 팟쇼같은 행위를 준비하자고 부르짖었으나,
순전히 그것은 이웃나라들과 서로 싸우지 말고 조화롭게 살아가려면 충분한 힘을 길러야만 한다는 역설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었음을 해량해 달라.
결코 가지 말아야할 길을, 조국을 걱정한다는 의미에서 조국에 대한 보은으로 알고서 나름 심사숙고한 계책이었으니 이도 해량해 주시기 바란다.
사실 필자는 정치를 혐오한다.
특히 한국의 정치사 앞에서 필자는 어렸을 때 부터 매우 분개하며 성장했었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니 대략 43년 전의 일이다.
그때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독재의 칼날로 기승을 떨치면서 우리를 공포정치 앞에서 움찔도 못하게 모든 것을 억누르던 그런 시대였다.
그때는 군사교육을 훈련받던 교련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교련선생은 현역 또는 예비역이 담당을 맡고 있던 그런 시기였다.
교련복에 각반과 요대를 차고서 일주일에 두번씩 사람 죽이는 훈련을 배우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똑똑한 친구 한 명이 요대에다 볼펜으로 '유신독재 반대!'라고 장난 삼아 새긴 것을 교련선생이 보고서 바로 중앙정보부에다 밀고를 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삼일 밤낮을 고문으로 시달렸던 그 친구는 한동안 말을 잃은 소년이 되었고,
어느 날 그는 정치를 하기로 마음 먹고서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목표로 공부에 매진하면서 결국 그 뜻을 이루게 된다.
선생이 학생을 밀고하던 공포정치의 시대가 바로 그 시절이었다.
어디 말이나 될 도덕률이겠는가.
그러니 독재에 반대하면 빨갱이라고 잡아 죽이지 않았겠는가.
그때의 젊은 영혼들은 겁에 질려 '검은 것도 희다'고 해야할 판이었으니, 어디에서 만주국도 우리 것이니 실지회복을 해야한다는 힘찬 기상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인가!
그렇게 가르치던 스승은 겨우 한 두 분 계시던 그런 공포정치의 나날들이 무려 18년간이나 계속해서 지속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필자가 오늘 이렇게 장황하게 주장하는 참 말뜻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가.
오늘은 마침 음력 절기로 달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서 암흑으로 밤하늘에 떠있을 삭망이다.
이 밤하늘에 분명히 달은 떠 있을텐데, 삭망으로 인해 달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날짜로 미루어보아 하늘에 달이 분명히 떠있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자명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이 안보이니 없다고들 한다.
대다수가 없다고 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그만 바보가 된다.
백로가 까치밭에 가면 색이 틀리니까 반동!이다라고 몰리는 이치와 같다.
오늘의 한국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노무현 선생은 기득권의 비뚤어진 세력과 그리고 친일의 잔재들과 싸우려고 '달은 분명히 떠있다!'라고 언급하였으나,
그들은 '달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너는 바보다!'라고 해 대면서 선생을 바보 얼치기로 몰아 세웠다.
그것이 바로 노무현 선생이 세상을 하직한 결정적 이유가 된다.
달이 있는데도 달이 없다는 기득권에 국민들이 반신반의하면서 수긍을 하기 시작하자, 하도 기가 막혀 선생은 마지막 카드를 뽑아든 것이다.
여러분은 바로 오늘이 음력으로 10월 삭망이라고 알려 드리는데도 오늘밤 허공을 바라보면서 어떤 대답으로 결론을 내리실 것인가?
'달은 있다!' 하실 것인가?
아니면 '달이 보이지 않는다!' 하실 것인가?
모두가 맞는 대답이긴 하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표면적으로 '달은 없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가 없으므로 국론분열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달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편을 찬동하시는 분들은 예리하게 지적을 하지 않아 그렇지,
'달은 없다!'는 거짓말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들은 기회주의자 처럼 나는 '달이 없다!라고 한 적은 없다'며 나중에 책임론에서 한 발 빼고자 하는 음모가
자신 속에 자기도 모르게 잠재해 있음을 나중에 깨닫고서 후회하게될 것이다.
'달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어찌 '달은 없다!'라는 말과 틀리다고 할 것인가!
친일파적 생각 아니겠는가.
구르믈 벗어난 달이 나중에 비추어야만 그 사실을 깨달으려는가?
허공의 달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면서 이를 안타까워 하고 있구나.
아! 오늘이 바로 삭망이로구나......
- 2012년 12월 12일 완성하다 -
小鄕 權大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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