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순례기

밝은 기운이 으뜸인 광양 백운산과 상백운암 순례기행

梅君子 2013. 4. 19. 11:35

 

밝은 기운이 으뜸인 광양 백운산과 상백운암 순례기행 

 

 

 

 

일 시 : 2013년 4월 19일 ~ 20일

 

장 소 : 전남 광양시 옥룡면 백운산 일원

 

 

 

 

 

광양 백운산은 봄이 오는 길목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지리산맥을 북으로 두고서 남해안 해풍의 따뜻한 기운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위치가 백운산이기 때문에 광양의 매화가 빨리 피어 오르고 그래서 매화축제가 유명해진 곳이 광양이다. 지난번 남해 섬여행을 가면서 바라보던 섬진강에 어린 백운산을, 이 봄이 가기 전에 기어히 한번 오르리라 마음 먹었다가 이번에 실행했다.

 

그렇게 순례행을 끝내고 보니, 다녀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을 받는 기운이, 그리고 밝은 양陽의 기운이 가득한 곳이 광양의 백운산이기 때문에 마음에 한 점 우울함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래, 날마다 좋은 날을 보낼 수 있는 밝은 기운을 얻었기 때문에 광양 백운산 등정을 한번 추천해 본다. 마음이 아픈 자들이여! 그대들 한번 백운산에 올라가서 마음의 치유를 받으시라! 틀림없이 맑고 밝은 기운을 듬뿍 안고서 귀로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광양 백운산!

듬직하고 미더운 어머니 산.

한라산 다음으로 동식물이 많이 사는 이 나라의 보배산이다! 

개인적으로는 하루빨리 국립공원으로 지정이 되어 보호를 받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백운사에 도착하다

 

- 백운사까지는 차량 진입이 가능하다 -

 

 

 

 

백운사

 

호남정맥에서 뻗어 나와 섬진강을 따라 달리는 백운산에 자리 잡은 백운사는 흰구름 사이로솟아난 천혜의 기도처로 보조국사와 구산스님이 수행하셨던 상백운암을 비롯 백운암 하백운암을 일컬어 말한다. 이 세 암자는 보조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임진왜란 때 전소 되었다. 그뒤 하백운암과 백운암은 눌암스님에 의해 중건 되었고 상백운암은 구산스님에 의해 중건 되었다.

 

백운사 대웅전 특이하게도 건물에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고풍스러우면서도 절맛이 제대로 나는 사찰로 도선국사가 절터를 잡았다는 설이 전해 오고 있으며 말년에 은거하다가 입적한 곳으로 전해진다.

 

백운사가 자리한 백운산은 지리산과 마주하고 있으며 지리산, 조계산, 무등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상백운암을 지나 정상에 오르면 멀리 광양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백운사에 오르는 동곡 계곡은 백운산 4대 계곡의 하나로 산이 높은 만큼 골도 깊어 길이가 10㎞에 달한다. 계곡에는 호남의 3대 학자라는 최산두가 공부했다는 학사대를 비롯해 용소, 장수바위, 선유대 등이 아름답다. 이처럼 백운사는 계곡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계곡물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찻물이며 산이 험하면서도 넉넉하고 포근하다.

 

백운사를 비롯 상백운암 하백운암을 품고 있는 백운산은 산세에 비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지리산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국에 백운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수십 개에 달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고만고만한 ‘보통산’으로 인식돼 왔을 것이다. 백운산은 초봄에 어울리는 산이다. 왜냐하면 백운산 자락은 전국에서도 이름난 고로쇠 산지로 유명하며 뼈를 이롭게 한다는 골리수의 어원이 바로 백운산에서 나왔다고 한다. 게다가 섬진강가에 자리 잡은 섬진마을에는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매화꽃 마을이 있다.

 

백운사까지 숲 사이로 난 길을 올라가면 사실 알려지지 않은 만큼 보존가치가 높은 자연림을 끼고 있다. 한라산만큼 다양한 식생이 존재한다. 900종이 넘는 나무와 풀이 자라는 곳이기도 하다. 상백운암에서 시작되는 억새밭과 정상을 잇는 길. 정상도 좋지만 억불봉을 찾는 것도 백운사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억불봉은 억새 군락지로 영남 알프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억새밭이 장관이다.

 

출처: 인터넷 上

 

하백운암(下白雲庵) 
 
[위치]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백운산(白雲山)에 있다.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연혁] 상백운암과 하백운암, 백운암의 세 암자가 아래 위로 함께 위치하고 있는데, 이 세 암자 모두 1181년(고려 명종 11) 보조(普照) 국사 지눌(知訥)이 창건했고,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그 뒤 1914년 눌암(訥巖)이 중건했다. 1948년 세 암자가 모두 여순반란사건으로 소각되자, 1960년 6월 구산 수련(九山 秀蓮)이 중건을 시작하여 1963년 마쳤다.

[유적.유물] 현존하는 건물로는 인법당(因法堂) 1동만이 있다. 특별한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참고문헌]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 대웅전의 부처님은 선정삼매에 들어 계시었다 -

 

- 백운당 요사채에서는 어떤 스님이 장좌불와하고 계실런지 -

 

- 옛날에는 이곳이 하백운암이었다고 들었다 -

 

- 그러니 위쪽으로 중백운암, 상백운암이 있을 것이다 -

 

 

 

 

등반을 시작하다

 

- 모나리자님과 함께 백운산 정상을 향해 등정을 시작했다 -

 

- 봄의 꽃들이 곳곳에 피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

 

- 꽃사진 스냅을 유독 좋아하는 양반 -

 

- 얼레지 -

 

- 상백운암과 정상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이르렀다 -

 

- 백운산 정상이 지근거리로 보인다 -

 

- 상부능선은 아직도 겨울이 가시지 않았다 -

 

- 진틀서 정상 오르는 정규 코스 -

 

- 한재 지나 뾰죽 봉우리가 따리봉(1,127m) -

 

 

 

정상에 올라 섰다

  

- 백운산 정상에 올라 섰으나 흐린 조망이 매우 아쉽다 -

 

- 이곳은 진달래가 이제 봉우리를 맺었을 뿐이다 -

 

- 모나리자님 백운산 정상(1,222m) 등정 기념 인증샷 -

 

- 지도상의 백운산 정상 고도 1,218m를 1,222,2m로 누군가가 고쳐 놓았다 -

 

 

 

 

- 저곳 금천계곡에서 어느 교수님이 산삼 여럿 뿌리를 득템했다고 광양 산악인께서 알려 주신다 -

 

- 부부 정상 인증샷 -

 

 

 

 

백운산 [白雲山]

 

전남 광양시 다압면·옥룡면·진상면

 

높이는 1,218m이다. 반야봉(般若峰)·노고단(老姑壇)·왕증봉(王甑峰)·도솔봉(兜率峰:1,053m)·만복대(萬福臺)등과 함께 소백산맥(小白山脈)의 고봉(高峰)으로 꼽히며, 전라남도에서 지리산 노고단 다음으로 높다. 서쪽으로 도솔봉·형제봉(1,125m), 동쪽으로 매봉(867m)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뻗치는 4개의 지맥을 가지고 있다. 섬진강(蟾津江) 하류를 사이에 두고 지리산(智異山)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다압면 금천리로 흐르는 금천계곡과 진상면 수어저수지로 흐르는 어치계곡, 도솔봉 남쪽 봉강면으로 흐르는 성불계곡, 옥룡면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광양읍 동천을 거쳐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동곡계곡 등의 백운산 4대 계곡을 품고 있다. 동곡계곡은 실제 길이가 10km에 이르며 학사대, 용소, 장수바위, 선유대, 병암폭포 등의 명소가 있다. 학사대는 호남 3걸로 일컫는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가 소년시절 10년 동안 학문을 닦았던 곳이다.

 

남한에서는 한라산 다음으로 식생이 다양하고 보존이 잘되어 있어 자연생태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백운란·백운쇠물푸레·백운기름나무·나도승마·털노박덩굴·허어리 등 희귀식물과 함께 900여 종의 식생이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옥룡면 동동마을 등지에서 채취하며 단풍나무과에 속하는 고로쇠나무의 수액은 약수로서 유명하다. 남쪽 산기슭에는 고려 초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는 백운사(白雲寺)가 있다. 백운산 자연휴양림으로 관리되고 있다.

 

[출처] 백운산 | 두산백과

 

 

 

 

- 다시 오던 길로 회귀하여 이번에는 억불봉 방향의 상백운암을 순례하기로 한다 -

 

- 정상 부근에는 두 곳의 헬기장이 있다 -

 

 

 

 

상백운앙을 참배하다

 

- 상백운암을 찾는데 조금 애를 먹었다 -

 

- 다행스럽게도 암자 입구를 찾아 반가웠다 -

 

▲ 상백운암 석축과 계단

 

 

 

 

상백운암의 연혁


상백운암은 옥룡면 동곡리 백운산 정상아래 있다. 현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19교구 화엄사의 말사이다. 처음에는 상백운암, 중백운암, 하백운암이 한 사찰의 암자였는데 지금은 백운사(하백운암)가 중백운암을 겸하며, 상백운암은 현재 인법당과 요사를 겸한 건물 한 동이 있다. 백운산의 정맥이 삼존불 봉황의 둥지터를 형성한 상백운암은 주천하길지(周天下吉地)로 신라말 도선국사가 처음 움막을 짓고 수행했다고 전하나 기록이 미미하여 확인할 수 없고 다만 고려시대 1181년(명종11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상백운암이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 초조불일보조국사는 이곳에서 멀리 독수리형상의 산을 보고 ‘큰 절터가 있겠구나’ 고 그 산을 영취산이라 명한 뒤 송광사를 지은 목수들을 데리고 절을 짓고 흥국사라 했다고 한다. 또한 송광사 제2조 진각혜심국사가 상백운암에서 법을 인가받았다. 조선시대에는 1437년(세종19년) 다시 중창하였으나 1597년(선조30년)에 정유재란으로 소실됐으며, 1638년(인조16년)에 다시 세우고 그 뒤 1792년(정조16년)에 법운화상이 중건하고, 1843년(헌종9년)에 중수했으며, 1872년(고종9년)에 법운선사가 다시 크게 중창하였다. 그 후 1914년 눌암(손치현)이 사재를 다 털어 다시 재건했으나 1948년 여순사건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 구산스님이 복구했다.

 

상백운암은 조선조에는 팔도도총 섭벽암각성, 회은장로가 수행했고, 호암체정 선사가 수행해 도를 깨쳤다. 근래는 금오 큰스님, 송광사 고승구산방장 활안 큰스님이 3년을 수행하신 불교 성지다. 상백운암은 신라, 고려, 조선 등 천년을 넘게 사세를 유지해 오다가 여순사건 후 국군이 빨치산 은거지가 된다고 소각한 것을 구산스님에 의해 다시 지어져 조계종 수좌들의 꾸준한 도량으로 유지해 오고 있다.

 

상백운암 보물 목조삼존불감


상백운암의 보물은 목조삼존불감(上白雲庵木造三尊佛龕)이다. 불감이란 일종의 휴대용 법당을 말한다. 나무로 만들 경우 원통형의 나무를 양분하여 한쪽에 불상을 모신다. 대개는 좌우에 협시를 함께 두는 경우가 많다. 불감은 스님이 이동하면서 불공을 드리기 위하여 지니고 다니는 것으로, 불교 목공예의 멋을 한껏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 상백운암 보물 목조삼존불감

 

 

 


상백운암 목조삼존불감은 높이 28.7㎝, 길이 50㎝ 가량으로 둥근나무를 삼등분해서 본존인 아미타불과 좌우로 관음과 지장보살을 부조한 형식의 불감이다. 본존불은 상현좌 위에 결가부좌하였으며, 좌우 보살은 입상이며 지장은 손을 합장하고 안치했다. 그러나 이 불감은 현재 동국대 박물관 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960년대 백운암에서 도난당한 것이 이곳까지 가게 된 것이다.

 

다행히 상백운암 목조삼존불감 복장에서 복장기와 후령통이 나왔고 이기문에 의하면 1684년에 영현스님이 상백운암에서 조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목조삼존불감은 도난당해 현재 동대박물관에 있고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도 문화재 절도 공소시효기간이 10년이라 찾을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 상백운암 절터 뒤편의 커다란 바위절벽. (얼굴바위)

 

 

 


상백운암은 해발 1천m가 넘는 고지대임에도 물이 있어 백운암에서 스님들의 수행을 가능케 할뿐만 아니라 백운산을 찾는 등산객들의 갈증까지 해소해 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상백운암 절터 뒤편으론 커다란 바위절벽이다. 이 바위 밑에 우물이 있고 사철 마름이 없이 물이 솟고 있다. 이밖에도 상백운암은 석축과 계단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짧은 계단으로 조성돼 있고, 맷돌, 고려청자, 이조분청자기, 이조백자 등 많은 도자기 파편과 기와 파편들이 주변에 널려져 있다.

 

주천하길지 상백운암


상백운암 주지 정륜스님은 “명산에는 명찰이 있다고 했다”며 “상백운암은 호남정맥의 최고봉인 백운산 몸통의 심장부에 위치해 예부터 불가에서는 지리산 상무주암을 갑천하길지(甲天下吉地)라 하고 상백운암을 주천하길지(周天下吉地)라 한다”고 말했다.  정륜스님은 “많은 고승대덕들이 수행하고 도를 깨친 상백운암은 스님들 사이에는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로 백운산과 함께 광양의 보배이나 여순사건 후 국군에 불태워졌다”며 “1959년 구산스님이 터만 남아 있는 것을 임시 인법당을 지어 지속해 오다가 세월에 함석지붕이 터지고 기둥이 썩고, 벽이 무너지고 있어도 워낙 고지대에 위치해 보수를 못하고 폐허가 되다시피 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 상백운암 절터 뒤편 바위절벽 밑에있는 우물.

 

 

 


상백운암은 인터넷에 올려져 널리 알려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100만부 이상 판매된 최인호 씨의 ‘길 없는 길’ 정찬주 씨의 ‘암자 찾아가는 길2’, 김용덕 교수의 ‘누가 오늘 일을 묻는가?’, 불일 출판사 ‘석사자’, 진각국사 어록, 김달진 역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강건기 교수의 ‘보조국사의 생애’ 등의 서적과 보조국사 입적 800주년 송광사 행사 후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정륜스님은 “국민소득 증대에 의한 활발한 여가활동으로 전국에서 백운산을 찾는 등산객, 관광객, 참배객들이 급증해 참배와 휴식 공간 제공 장소가 필요한 실정”이라며 “그러나 사찰 재정이 열악함에 따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상백운암 보수ㆍ정비에 시ㆍ도가 나섬으로써 민족전통의 얼과 문화 역사 보존 및 관광, 여가문화 활동에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역 주민들의 문화적 자긍심 고취


상백운암 보수ㆍ정비는 인법당을 증개축하는 사업이다. 여순사건으로 불태워져 있던 것을 임시법당을 지어 유지해 오면서 법당 기둥이 썩고 벽이 무너져 경관을 저해하고 있어 전통 목구조양식에 맞게 증개축이 시급한 때문이다.이를 위해 상백운암에서 계획하고 있는 예산은 4억 원(도비 2억원, 시비 2억원)이다.

 

 

 

 

    
▲ 상백운암 주지 정륜스님

 

 

 


광양시는 상백운암 보수ㆍ정비를 위해 도비지원을 요청해 놓고 있다. 그러나 도비지원이 언제 확정될지는 미지수다. 이에 대해 김재무 전남도의회 의장은 “최근 상백운암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지역의 사적이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상백운암이 광양의 문화유산으로 새롭게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시설 복원관련예산 확보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상백운암 복원에 사비를 지원하겠다는 뜻을 전해오고 있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지원으로 사찰을 정비할 것이 아니라 광양시민의 마음과 뜻을 모아 보수ㆍ정비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정륜 스님의 마음이다. 정륜 스님은 “조상들이 남겨놓은 유ㆍ무형의 문화재는 우리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중요할 뿐 아니라 앞으로의 문화발전에 바탕이 되기 때문에 현상대로 보존돼야 하며, 우리가 잘 지키고 가꾸어 후손에게 길이 물려주어야 할 값진 재산”이라고 강조했다.

 

상백운암을 자주 찾는다는 백명현 재향군인회장은 “상백운암 주변 환경개선으로 스님들의 수행생활의 어려움을 개선하고 참배객과 등산객의 휴식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종교를 떠나서 광양시와 시민들은 이러한 역사유적과 불교문화의 원형인 상백운암을 복원 선양하는데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출처: © 광양시민신문 >

 

 

 


상백운암 사적기(1)-상백운암 주지 정륜 스님

 

광양의 진산 백운산은 도선국사가 산문을 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어느 골짜기를 가더라도 도선국사의 사연이 서려있다.

상백운암은 천년이 넘는 암자인데 도선국사가 처음으로 초암을 지어 수행정진한 곳이다. 도선국사는 신라말의 승려로 영암 출신이며 속성은 김 씨이다. 어머니는 최 씨이니 영암의 성기산 벽촌에서 827년(흥덕왕 2년)에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846년(문성왕 8년)에 곡성 태안사의 혜철국사(慧徹國師)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았다.

 

도선이 구례 오산(鰲山) 사성암(四聖庵)에서 수행정진 중 지리산 이인에게 음양풍수를 사도리에서 지도받았다. 옛날부터 구례 오산 사성암은 백운산 머릿자리라고 알려져 왔고, 최근 입적한 청화 큰스님은 오산 사성암에서 두 분의 도인이 더 난다고 하였다. 국사가 역사적으로 더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년)에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고려의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국사가 백운산 상백운암 터를 보시고 가사 장삼을 입고 7일을 춤추었다고 한다.

 

백운산 몸통 복장(腹藏) 삼존불 봉황의 둥지터인 상백운암은 봉황의 기운이 서려 대도를 깨치고 토금 돼지의 기운이 있어 큰 대작불사를 한다고 하였다. 국사는 상백운암에서 3년의 보임을 마치시고 37세 되던 해에 광양 옥룡사에 주석하시면서 입적할 때까지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당시 제자의 수가 수백명이란 점에서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사는 옥룡사에 머문지 35년이 되는 때인 898년(효공왕 2년)에 세수 72세로 입적했다. 


백운산에 소재한 상백운암은 1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고찰이지만 여순사건 당시 소실되어 현재는 함석지붕을 머리에 인 초라한 건물 한 동만이 남아있다. 이곳은 백운산 정상 가까운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신도와 참배객들의 접근이 어렵고, 사찰 건물 역시 참배객이나 등산객 등 절을 찾는 손님을 맞이할 여건도 안되는 실정이다. 이 절의 주지스님인 정륜 스님은“광양시민과 함께 천년을 이어 온 사찰이 옛 모습대로 개축되어 전통문화 진흥과 정신수련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해 온 상백운암은 어떤 사찰인지 정륜스님의 기고를 통해 알아본다.(광양신문 편집자 註)

 

상백운암 사적기 1

 

상백운암의 연혁

 

천하갑 길지라는 상백운암의 터

 

상백운암은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백운산(白雲山) 정상 아래에 있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화엄사의 말사이다. 처음에는 상백운암, 중백운암, 하백운암이 한 사찰의 암자였는데, 지금은 백운사(하백운암)가 중백운암을 겸하며, 상백운암은 현재 인법당과 요사를 겸한 건물 한 동이 있다.

 

상백운암(백운암)의 연혁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수행했다고 전하나 기록이 미미하여 확인할 수 없고 다만 고려시대 1181년 (명종11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상백운암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조선시대 1437년(세종19) 다시 중창하였으나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으로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8년(인조16)에 다시 세우고, 그 뒤 1792년(정조16)에 법운화상이 중건하고, 그 후 1843년(헌종9)에 중수하였으며, 1872년(고종9)에 법운선사가 다시 크게 중창하였다. 이후 1914년 눌암(손치현)이 사재를 털어 다시 재건하였으나 1948년 여순사건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 구산스님이 복구하였다.

 

<정륜 스님/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 연구위원〉

 

 

 

 

- 상백운암의 많은 도자기 파편들이 이곳의 연륜을 대변하고 있다 -

 


 


상백운암 사적기-2

 

▲ 상백운암의 개산조 도선국사(道詵國師)

 

 

돌구유물을 묻어 샘터로 활용되어 온 상백운암의 우물은 수백년동안 상백운암을 지켜온 고승들의 생명수 역할을 했다.

광양의 진산 백운산은 도선국사가 산문을 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어느 골짜기를 가더라도 도선국사의 사연이 서려 있다. 상백운암은 천년이 넘는 암자인데 도선국사가 처음으로 초암을 지어 수행정진한 곳이다. 도선국사는 신라말의 승려로 영암 출신이며 속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최씨이니 영암(靈岩)의 성기산(聖起山) 벽촌에서 진덕왕(眞德王) 말년에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846년(문성왕 8)에 곡성 태안사의 혜철국사(慧徹國師)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았다.

 

도선이 구례 오산(鰲山) 사성암(四聖庵)에서 수행정진중 지리산 이인에게 음양풍수를 사도리에서 지도받았다. 옛부터 구례 오산 사성암은 백운산 머릿자리라고 알려져 왔고(최근 입적한 청화 큰스님은 오산 사성암에서 두분의 도인이 더 난다고 하였다.) 국사가 역사적으로 더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에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듯이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고려의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 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국사가 백운산 상백운암 터를 보시고 가사 장삼을 입고 7일을 춤추었다고 한다.

 

백운산 몸통 복장(腹藏) 삼존불 봉황의 둥지터인 상백운암은 봉황의 기운이 서려 대도를 깨치고 토금돼지의 기운이 있어 큰 대작불사를 한다고 하였다. 국사는 상백운암에서 3년의 보임을 마치시고 나이 37세 되던해에 광양 옥룡사에 주석하시면서 입적할 때까지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당시 제자의 수가 수백명이란 점에서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사는 옥룡사에 머문지 35년이 되는 때인 898년(효공왕 2)에 세수 72세로 입적하였다.

 

<정륜 스님/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 연구위원〉


 

 

 

- 상백운암에는 법당과 요사채의 두동 건물이 있다 (이곳이 인법당인데 지금은 아닌 것 같다 -

 

 

 

 

상백운암의 사적기 - 3


상백운암의 중창주-불일보조국사 지눌


보조국사 지눌 스님(1158~1210)은 지금의 황해도 서흥군 동주에서 당시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자감의 학정 정광우의 아들로 태어나 8세에 출가하여 53세에 입적했다고 비문에는 적혀있다. 지눌 스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심한 병을 앓기 시작했다. 온갖 좋다는 약과 신기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녀도 별 효험이 없어 집안의 근심이 극에 달할 즈음에 부모님이 사찰을 찾기 시작하면서 절실히 기도를 하던 중 부모는 병만 고칠 수 있다면 어린 아들을 출가시키겠노라 부처님께 서원하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지눌스님의 병이 씻은 듯이 낫게 되어 구산선문 중 사굴산 종휘선사의 제자로 출가를 했다. 출가하여 계를 받고 나서는 스승이나 소속 산문 등 어떠한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오로지 도를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다. 좋은 스승이 있는 곳이면 어느 선방이든지 가서 공부하였고 깨달음을 구할 수 있는 모든 경론이나 어록을 배우고 익히는 수행을 쉬지 않았다.


육조단경과 화엄경을 보고 심성의 본바탕을 발견하였고 팔공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문을 발표하고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옮겨 정진을 쉬지 않았다. 상무주암에서 2년 동안 지눌은 바깥 인연을 완전히 끊고 오로지 안으로 관조하는 참선에만 몰두하여 대도를 성취하였다. 불가에서는 지리산 상무주암을 갑천하길지라하고 상백운암은 주천하길지라 한다. 상백운암에서 보임중 국사는 삼존불 형태인 바위절벽을 보고 두 개의 삼존불감을 조성하여 하나는 자신의 원불로 평생 가지고 다녔고 하나는 상백운암에 안치하였다. 국사 입적후 지금까지 원불은 송광사 박물관에 보존해 오고 있다.

 

또 국사는 상백운암에서 멀리 독수리 형상의 산을 보시고 큰 절터가 있겠구나 하시고 산을 영취산(인도 마갈타국 산으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 산)과 닮아 영취산이라 부르고 송광사를 지은 목수들을 데리고 절을 짓고 흥국사라 하시고,(이 흥국사가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국사의 부도는 송광사와 흥국사 일주문 옆 부도전 노송 밑에 있다.


국사는 상백운암을 중창하시고 보임하면서 이곳에서 송광사 2조 진각국사 혜심에게 법을 전하였다.
 

<정륜 스님/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 연구위원〉

 

 

 

 

- 지리산 상무주암의 글씨와 체가 같아 보이는데 나중에 검증해 보리라 -

 

 

 

 

상백운암의 사적기 - 4

 

상백운암에서의 법의 인가-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상백운암 위쪽에 위치한 거대한 사람 얼굴모양의 바위.

 

혜심의 호는 무의자(無依子)라고 하였고, 속성은 최(崔)씨이다.  나주 화순현 출신으로 고려 1021년(신종 4)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가 정진하다가 어머니의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와 시탕(侍湯)하던중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들어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이듬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왕생을 빌기 위해 송광사(松廣寺)에 갔다가 스승 보조를 만나 스님이 되었다.

 

출가한 그는 불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 피나는 고행의 수련을 쌓아 나갔다. 진각은 오상과 지리산 금대에서 수행하여 마침내 깊은 깨달음을 얻어 1208년(희종1) 스승 보조에게 깨달음을 인가받기 위해 억보산(億寶山-지금의 백운산)으로 찾아갔다. 스승 보조를 만나러 가던 진각은 백운산 아래에서 잠깐 쉬다 스승 보조가 시자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시자를 부르는 스승의 목소리는 메아리처 진각의 귀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순간 진각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아이를 부르는 소리 소나무숲 안개 속에 울려 퍼지고

차달이는 향기는 돌많은 길바람으로 스쳐온다.

백운산 밑의 길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벌써 암자 안의 노스님을 뵈었다.

 

진각은 마침내 상백운암에 올라 스승 보조를 만나 깨달음을 인가받고 그 인가의 증표로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건너 받았다. 부채를 받아 법을 전수받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전에는 스승의 손에 있더니

지금은 이 제자의 손에 왔구나

만일 더워서 허덕일 때면

마음대로 맑은 바람을 일으키리다

 

진각은 마침내 국사가 되어 고려의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高宗)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그는 뛰어난 선기(禪機)와 문학적 재능으로 탁월한 선시를 수없이 남긴 무애자재한 자유인이었다. 1234년(고종20) 월징사에서 57세의 나이로 열반하였다.

 

<정륜 스님/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 연구위원〉

 

 

 

 

- 이곳이 법당 겸 요사채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다 -

 

 

 

 

상백운암의 사적기 - 5  
 
상백운암의 대장군-회은장로 응준(悔隱長老 應俊)

 

 

 

 

상백운암 얼굴바위 인근에 위치한 약수터

 

 

 

 

응준장로(1587∼1672)는 호는 회은이고 속성은 기씨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송천사 옥섬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대사는 영민하고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 송천사(松川寺) 산내 암자인 상백운암에서 수행정진할 때 한 걸음에 억불봉을 갔다 오고 산행을 갈 때는 백운산 호랑이가 길을 안내했다 한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병(義兵) 승대장(僧大將) 벽녑대사의 참모로써 활동하였고 큰 공을 세워 절충장군과 자헌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스승 벽암 각성이 남한산성의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맡았을때 스승을 보좌하였고, 그 후 각성스님의 뒤를 이어 팔도도총섭(승려로써 최고 품계)과 승병대장을 역임하면서 군무에 30여년간 종사하였다. 1672년 86세로 성부산(星浮山)의 천주봉(天柱峰) 아래에서 입적하였다.

 

응준 이래로 광양 지역의 승려들은 국가가 어려운 상화에 처했을 때 마다 분연히 일어나 국가를 수호하는데 앞장섰고, 이러한 흐름은 구한말 의병활동과 더불어 면면이 이어오는 광양시민의 애국애향심이 되었다.

 

<정륜 스님/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 연구위원〉

 

 

 

 

- 상백운암의 조망은 일망무제로 트여 있어 누구나 수도하면 해탈이 가능하겠다 싶다 -

 

 

 

 

상백운암의 사적기 - 6 
   
상백운암에서 도를 깨친 호암체정(虎巖 體淨)선사

  

호암 체정스님(虎巖 體淨, 1687~1784)은 1687년 전라북도 고창 흥양에서 태어났다. 스님의 법호는 호암(虎巖), 법명은 체정(體淨), 속성은 김 씨다. 1701년(숙종 27) 15살의 나이에 출가한 스님은 명산대찰을 두루 다니면서 여러 선지식을 친견하고 도를 물으며 정진하기를 10여년, 그럼에도 화두 한 생각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백운산 상백운암에서 밤낮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 대분심으로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화두에 몰입하던 스님은 해우소에 앉았다가도, 또 걸어가도, 화두삼매에 들어 온종일 꼼짝 않을 만큼 100일간의 용맹정진(勇猛精進) 끝에 홀연히 마음광명이 열리면서 그동안 참구해오던 화두(話頭)공안(公案)이 타파되어 대도(大道)를 깨쳤다. 깨친 바를 환성지안 선사에게 점검받고 인가를 받았다. 이로써 지안의 법을 이었다.

 

선사는 선암사(仙巖寺)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크게 중창하여 지금도 선암사 중창주로 호암체정 선사에게 팔정례를 하고 있다. 선사는 청봉거안(靑峰巨岸) 연담유일(連潭有逸) 설파상언(雪坡尙彦) 등 수많은 제자를 길러 선맥을 이었다. 또 대흥사(大興寺) 13대 강사로 자리를 옮긴 스님은 이곳에서도 많은 제자를 길렀다. 이어 스님은 장구산에 들어가 53불을 조성한 뒤 곧바로 금강산(金剛山) 표훈사(表訓寺) 내 원통암에 1748년 세수 62세, 법납 47세로 열반에 들었다.

 

<정륜 스님/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 연구위원〉

 

 

 

 

- 정륜스님의 배려로 인법당에서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었다 -

 

 

 

 

상백운암 사적기 - 7  
 
상백운암의 도인-송광사 초대방장 구산선사(九山禪師)  
 

1909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스님은 27세 때 우연이 병을 얻어 시름하던 중 진주에 사는 한 거사(居士)의 본래 청정한 자성(自性)자리인데“어디에 병이 붙겠는가?”라는 한 마디 말에 홀연이 발심 지리산 영원사를 찾아가 백일기도를 함으로 병도 낳고 불법에 비로서 눈뜨게 되었다. 그 후 29세 때 입산 출가하여 효봉선사를 은사로 송광사 삼일암에서 득도하였다. 1946년 가야산 총림이 개설되고 효봉선사가 방장으로 가자 총림에 들어가 소임을 보다가 이듬해 가야산 토굴에서 수행중 견처가 생겨 대중의 요청으로 처음 법상에 올랐다. 스님은 보임하기 위해서 1960년 초 불타버린 상백운암을 지어 여러해 동안 수행하였다. 스님은 상백운암에서 9년을 수행하셨기 깨문에 법호가 구산(九山)이 됬다고 전해진다.

 

상백운암에서 스님의 일화가 두 편 있다.

하나는 전 송광사 주지 현호화상이 곡성 도림사로 출가하려고 갔는데 상백운암에 도인이 있다고 해서 겨울에 찾아가다가 심한 눈보라에 길을 잃고 헤매는 중에 상백운암에 구산스님과 두 분의 스님들이 수행하는 가운데 구산스님이 갑자기 일어나서 쇠종을 처서 현호스님이 종소리를 듣고 찾아왔다고 한다.

또 하나는 구산스님은 암자에서 하루 한끼만 공양했는데 그 때마다 당신이 먹을 밥에서 한두숟가락씩 산짐승들에게 나눠 줬다고 한다. 새나 산토끼가 와서 먹고 가곤 했는데, 어느 날 눈이 많이 내려 산길이 끊어져 버렸다고 한다. 산길이 계속 막히자 스님이 드실 양식도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백운산 아랫마을에 사는 할머니 신도가 스님의 양식을 조금씩 머리에 이고 다녔는데 눈이 많이 내려서 눈 덮인 산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할머니 앞에 산토끼 한 마리가 나타나서 산길을 찾아 앞서가며 상백운암까지 안내했다는 동화같다는 이야기다.

 

1969년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설립되자 초대 방장스님으로 추대되었다. 1973년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선원을 개원하는 등 말년에는 외국으로 다니면서 이 땅의 불교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1983년 12월 16일 득도 수계했던 송광사 삼일암에서 가부좌하신 채 세수 75세, 법납 47세로 입적하셨다.

 

<정륜 스님/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 연구위원〉

 

 

 

 

- 아미타불이신 것 같은데 체體가 월출산 상견성암의 부처와 비슷하다는 뉘앙스를 받았다 -

 

 

 

 

상백운안 사적기-完 
  
상백운암의 수행자-활안(活眼) 큰스님 
  
스님은 1926년 병인(丙寅)생이다. 담양에서 태어나 20대에 출가하여 지금까지 수행자 본분을 지키는데 한 치 흐트러짐없이 살았다. 50여년전, 오대산 북대에서 정진하면서 본인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게으름’에 있어서는 단호했다. 그 모양이 어찌나 무섭던지 호랑이띠인 스님은 자연스럽게 ‘오대산 호랑이’로 불렸다.

 

여러 제방에서 치열하게 수행하던 활안스님은 상백운암에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삼년동안 피나는 고행을 하였다. 한해 여름장마가 끝나고 무더운 날씨에 음식과 반찬은 곰팡이가 피어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어느 날 낮에 일을 하던 중에 낫에 뼈가 보일 만큼 베어 많은 피를 흘리고 손을 천으로 묶고 배고픔에 냉수를 마시고 지쳐 쓰러졌는데 비몽사몽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서 많이 힘이 드는가? 묻고 나도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힘이 든다고 하면서 자신을 안아주었다. 하는 몽중가피력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 후 송광사 구산 방장스님의 요청에 의해서 천자암으로 가서 불사를 하고 제방 납자들을 지금도 제접하고 계신다.

 


맺음말

 

상백운암(上白雲巖)은 천년의 한국불교 역사와 문화를 함께 하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선(道詵), 보조(普照), 진각국사(眞覺國師), 회은(悔隱), 호암선사(虎巖禪師), 구산(九山), 활안(活眼)큰스님 등 수 많은 고승대덕의 수행처로 그 법등을 밝히면서 사상과 신앙, 그리고 전통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해 왔으나, 해방 후 민족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비극적 여순사건으로 불태워져 폐사된 것을 임시법당을 겨우 지어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제 종교를 떠나서 광양시와 시민들은 이러한 역사 유적과 불교문화의 원형인 상백운암을 복원 선양하는데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정륜 스님/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 연구위원〉

 

 

- 예불을 끝내자 정륜스님께서 반갑다며 보이차를 내오셨다 -

 

- 스님과 두시간이 넘도록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 주로 보임하려고 오는 스님들이 묵어 갔을 명상터 -

 

- 이제는 산문을 나서야 한다 -

 

- 속세의 내일을 우리는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

 

-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정륜스님은 대자유인이시라 매우 부러웠다 -

 

- 조금만 내려가면 만나는 중백운암터 -

 

- 월출산 중견성암과 어찌 그리 맥이 같아 보이는가 -

 

- 중백운암에서 문득 지리산 반야봉 묘향대의 호림스님을 떠 올렸다 -

 

- 모두들 천하에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이시자, 대장부들이시다 -

 

- 모나리자님도 수행에 걸림이 없으시니 대자유인이 틀림없다 여겨진다 -

 

- 그렇게 다시 옛 하백운암터인 백운사에 도착하였다 -

 

 

 

 

성불사를 찾아 가다

 

- 성불사는 한재 지나 도솔봉 아래 계곡에 있다 -

 

- 천왕문 입구는 코끼리가 지키고 있다 -

 

- 사천왕 -

 

- 요사채 -

 

- 범종각과 사천왕문이 2층으로 함께 있는 구조다 -

 

- 대자보전 -

 

 

 

 

성불사 [成佛寺]

 

전남 광양시 봉강면 조령리 859

 

대한불교용화종에 속한다. 창건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때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주위에 많은 암자 터와 기와, 돌절구확 등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960년에 빈터만 남아 있던 곳을 초가삼간으로 복원하면서 불사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경내에는 대웅전·관음전·극락전·사천왕문을 겸한 범종각·일주문,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오층석탑 등이 있으며, 범종각에는 무게가 1,870㎏인 종이 있다.규모가 작은 절이지만 절 위쪽으로 고로쇠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경칩 때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출처] 성불사 | 두산백과

 

 

 

- 배롱나무가 매끄럽다 -

 

- 5층석탑 앞의 두 달마대사가 익살스럽다 -

 

- 사자상 -

 

- 쉼터 -

 

 

 

 

백운산휴양림에서 잠이 들다

 

- 해송 가득한 백운산휴양림에 찾아 들었다 -

 

- 오늘은 숲의 힐링을 받으며 잠 드리라 -

 

- 솔잎 나린 대지가 무척이나 포근해 보였다 -

 

- 늦은 저녁을 들고 숲의 정령들과 노니는 밤을 여유롭게 즐긴다 -

 

- 아름다운 숲의 봄날 밤 -

 

- 굿모닝 숲! -

 

- 약수터 -

 

- 철수준비를 끝냈다 -

 

- 제2 야영장 부근 -

 

- 서울대 연습림 속에 있다 -

 

- 이곳에서 힐링 중인 텐트들 -

 

- 서울남부학술림을 광양시는 되찾고 싶어 한다 -

 

- 아름다운 봄날 -

 

 

 

 

광양 백운산의 1박2일 여정은 힐링이 주제가 되었다.

백운사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내내.......

상백운암에서 정륜스님과 다담을 나누는 내내......

성불사에서 선정에 드는 내내......

그리고 백운산자연휴양림에서 포근한 봄밤을 맞이하는 내내......

힐링의 정령들은 우리 부부를 반갑게 찾아와서 지친 심신을 어루만져 주었다.

 

주어진 이 생生은 왜 이리도 아름다운가?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의 나이는 짙어가고 있다.

그러니 아름다운 날들의 연속이다.

 

이 생명 주심에 고마운 마음뿐이다......

 

 

 

 

 

- 2013년 5월 8일 완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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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鄕 權大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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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돋움체-필자 글(녹색), 궁서체-인용 글(검은 회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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