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 망수봉 기슭 새해 맞이 - 광원암 진각국사 원조탑 철야 정진
[ Photo Essay ]
조계산 망수봉 기슭 새해 맞이 - 광원암 진각국사 원조탑 철야 정진
일 시 : 2014년 12월 31(수) ~ 2015년 1월 1일
오늘은 2014년의 끝날이다. 마지막 송년의 밤을 텐트 치고 참선으로 지새우기 위해 조계산 광원암을 찾았다. 광원암은 송광사보다 200여년 앞서 창건된 유서깊은 암자이자, 고려시대의 진각국사 혜심 선사가 [선문염송] 1125칙을 총 30권으로 저술했던 성스로운 곳이다. 그리고 광원암의 암주이신 현봉 스님은 송광사 주지를 역임했던 큰스님이자, 불교대학에서 천수경을 강의 받았던 은사님이기도 하다. 지난 가을에 뵈올 때, 진각국사 부도탑에서 철야정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을 넣었으며 그래 허락까지 받아논 상태였으니 철야정진하는 오늘 하룻밤 비박이 문제될 일은 없었다.
그러니 오늘은 800년 전의 선지식인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진각국사의 문하에 들어, 비록 하룻밤이지만 정진을 굳게 해보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그렇게 을미년 새해를 연다면 얼마나 마음이 상쾌하겠는가? 싶다. 아! 생각만 해도 오늘을 준비했던 마음은 바로 설레임이었고, 내내 함께했던 상쾌함은 참으로 감미롭기까지 하였다. 숙제를 마칠 수 있는 송년의 날이 되어, 정말 상쾌한 마음만 가득차 올랐던 것이다.
지난 가을의 광원암 추색을 보아라
■ 광원암 [廣遠庵] 소개
순천 송광사의 산내암자로, 송광사 적광전에서 600m 정도 산길을 오르면 광원암이 나온다. 514년(백제 무령왕 14) 가규(可規) 스님이 창건한 암자인데 신라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때 창건한 송광사보다 약 250년 먼저 세워진 셈이다. 일명 서암(西庵)이라고도 한다.
송광사 제2세 국사이신 진각국사<진각혜심 眞覺慧諶: (1178~1234)께서 이곳에 주석(駐錫)하시며 1226년에 종문(宗門)의 최고 저서인 섬문염송집(禪門염頌集) 30권을 펴내어 광원유포(廣遠流布)하였다 하여 그 뒤부터 광원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그 뒤로는 1309년에 혜초(惠超)스님이 중창하였고, 1576년에 영윤(靈允)스님의 중건, 1710년에 정열(淨悅) 시습(時習) 기향(起香)스님의 적취루(積翠樓) 창건 및 1713년 중수, 1712년 치순(致淳) 지익(智益)스님의 중수 및 회관(會觀) 망혜(望惠)스님의 단청(丹靑), 1771년에 출징(出澄) 치초(致初)스님의 공루(空樓) 중건, 1890년에 취암경은(翠巖景恩) 용선(龍船)스님의 중수, 1917년 용선· 원명(元明)스님의 남익실(南翼室) 중수, 1936년 향운(香雲) 월고(月皐) 스님이 체실(體室) 조실(祖室) 왕각(王閣)을 중수하였다 한다.
1948년의 여순반란사건과 1950년의 6.25동란의 수난을 겪으면서 큰절 송광사가 대화재로 소실되어 1958년 5월 3일에 큰절 불사를 위해서 광원암을 훼철(毁撤)하였고, 그뒤 30여년간 덤불 속에 묻혀 빈터만 남아 있었다. 그 뒤 1992년(임신;壬申)에 현봉(玄鋒)스님의 원력으로 복원 중창하여 본채와 원조당(圓照堂) 그리고 해우소를 갖추었다.
이곳에 주석했던 큰스님들은 와월(臥月) 봉암낙현(鳳巖樂賢) 우담홍기(優曇洪基) 침연장선(枕淵章宣) 금명보정(錦溟寶鼎) 경붕(景鵬) 경해(鏡海) 원해(圓海) 포우행성(布雨幸性) 화성주흔(華性湊炘) 한운(漢雲) 취암(翠巖) 예운(禮雲) 만성(晩惺) 우송선명(友松善明) 용암진수(龍巖桭秀) 응하학수(應夏學守) 호연(浩然) 서월(西月) 용연두문(龍淵斗文)스님 등등이다.
근대의 1897년에는 금명보정스님께서 이곳에 강원을 열어 학인이 50여명이나 살았다 하며 그뒤에 1935년에 염불당(念佛堂)을 신설하여 대중이 모여 정업(淨業)을 닦았다고 한다.
암자의 바로 뒤에는 1234년에 입적한 진각국사의 사리(舍利)를 모신 부도(浮圖)인 원조탑(圓照塔)이 있다. 이 탑의 탑호(塔號)는 그 때 고려 고종(高宗)이 내렸고 이규보(李奎報)가 쓴 진각국사비명(眞覺國師碑銘)에는 그 위치를 ‘광원사(廣遠寺) 북록(北麓)’<광원암 뒤의 북쪽 언덕>이라 기록 되어 있다.[진각국사의 비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지(月南寺址)에 세웠는데, 지금은 파손되어 비신 하반부만 남아있다<보물313호>]
그리고 아미타여래상과 1823년에 조성한 후불탱화(金魚; 度鎰 勉淳 天如 有定)와 1879년에 조성한 지장탱화(金魚; 雲波就善 妙英 斗三 天禧 琪演 一俊 玲受)는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광원암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여름에는 수련(睡蓮)이 피어난다. 수초(水草)사이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면 망중한(忙中閑)의 무아경(無我境)에 빠져든다.
찾아가는 길은 큰절에서 탑전으로 가서 못미쳐 돌다리<피안교;彼岸橋>를 지나 바로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넓은 편백숲이 나오는데 탑전에서 약 500m쯤 곧장 가면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광원암 廣遠庵]
갑오년의 마지막 노을이 서서히 스러져 간다
오늘 광원암의 원조탑에서 철야정진을 하는 목적은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진각국사 혜심 선사가 수행하러 다녔던 4대 수행처의 답사를 완성짓겠다는 발원을 내포하고 있다. 그 4대 수행처는 구례 오산의 사성암 좌선대, 함양의 금대암 금선대, 지리산 상무주암의 참선대와 이곳 광원암의 원조탑이 바로 그곳이다. 그러니까 혜심 선사는 상기의 수련터에서 참선으로 깨달음을 얻은 뒤, 조계산 광원암에 돌아와 후학들을 위한 총 30권의 선문염송집을 이곳에서 편찬해 냈던 것이다.
둘째 이유는 그 선문염송집을 필자의 스승이신 법흥 선사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새해 을미년에는 수박 겉핥기가 아니라 정말 심도있게 선문염송집을 공부해 보겠다는 발심을 다졌던 일환이었다. 스승님께서 물려주신 [선문염송요론]은 백봉 김기추 거사가 1978년부터 번역을 시작해서 해마다 세상에 내놓곤 하던 책이다. 그런데 아깝게도 총 15권을 펴내고는 적멸에 들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머지 15권을 덜 펴냈던 것이다. 세인들은 그를 깨달은 이라고 불렀을만큼 한학자로써 문장을 날렸던 분이다. 그래 스승께서는 운제선원편 [선문염송]을 당신의 서가에서 다시 내어주시면서, 필자의 공부 보완을 말없이 이르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선문염송] 총 30권의 원저자인 혜심 선사의 사리를 모신 이곳 광원암 원조탑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한편으로, 제대로 된 의식을 치르면서 발심하겠다는 서원 또한 세웠던 것이다. 그렇게 벼르고 다짐했던 비장함을 치르는 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다가오는 을미년에 그 공안을 모두 타파해 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상에 안주하며 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발심을 내어보는 것! 그 자체로만으로도 참 좋은 수행자의 참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길을 걷다 못가면 쉬어갈 망정, 못간다고 처음부터 포기하는 그런 나약한 사람은 아니 되리라 다짐해 본다. 그런 발심으로 오늘 진각국사 혜심의 사리를 모신 원조탑에서 하룻밤 비박에 드는 동안 제대로 된 신고식 또한 치루리라 발원을 세웠던 것이다.
|
| |
더 공부하라며 스승님이 내어 주셨던 [선문염송요론] |
현봉 스님이 광원암의 제반 내력기를 들려 주신다 왼쪽 법흥 스승님, 오른쪽 광원암 암주 현봉 큰스님 |
■ 김기추(백봉거사)
1908년 음력 2월 2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백봉거사의 성명은 김기추이다. 젊은 시절 항일 민족운동을 벌이다 부산형무소에서 1년을 복역하고, 이후 만주 땅에서까지 '불련조선인'으로 끊임없는 감시를 받아가 해방을 맞는다. 광복 후에는 교육 사업을 하다가 오십이 넘은 늦은 나이에 불법을 만나서 무자 화두를 갖고 정진하다가 1964년 1월에 확철대오하였다. 이후 속가에 머물면서 거사풍 불교를 크게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에게 최상승의 법문을 설하였다. 1985년 7월 27일 지리산 기슭의 보림선원에서 마지막 하계수련대회를 주재하실 때 제자들을 시켜 '여하시최초구(무엇이 최초의 구절인가?)'를 걸어두게 하고는 8월 2일 마지막 설법을 하고 나서 78세를 일기로 그 모습놀이를 거두었다. 저서로는 '금강경강송', '유마경대강론', '선문염송요론', '절대성과 상대성', '백봉선시집', '허공법문' 등이 있다.
박배낭을 잠시 내려 놓고 주지 스님과 다담을 나누었다
오늘 원조탑에서 텐트를 치고 철야정진을 해보려고 조계산에 들었는데, 내심 그러한 발원을 존중하면서도 고려의 대시인이신 혜심 선사의 깨달은 게송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발원도 못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것은 선사께서 은연 중에 세상공부를 하는 이들을 독려하기 위한 게송의 뜻이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시詩를 한번 음미해 본다.
知足樂지족락 - 스스로 족함을 아는 즐거움
浮雲富貴奈吾何(부운부귀내오하) 뜬구름 같은 부귀영화, 나에게 무슨 소용
隨分生涯亦自佳(수분생애역자가) 분수 따라 사는 생애, 절로 아름다워라
但不愁來何必酒(단불수래하필주) 근심이 찾아오지 않은데, 어찌 술이 필요하랴
得安心處便爲家(득안심처편위가) 마음 편한 곳이면, 그곳이 바로 집인 것을
- 慧諶(혜심) 字:永乙(영을). 號:無衣子(무의자). 諡號:眞覺國(진각국사)
俗姓名:崔寔(최식) 高麗後期(고려후기)의 僧侶(승려)
근심이 찾아오지 않은데, 어찌 술이 필요하랴(但不愁來何必酒)라는 선사의 자족自足은 필자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해준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참, 우직하게도 살아왔다. 세상사가 내뜻과 맞지 않는다고 그랬지 싶다. 또한, 마음 속으로 사숙했던 은사가 술 속에서 길을 찾아 보려 했다고 한때는 술에 탐닉도 해보았다. 그런데 그게 다 쓰잘데기 없는 우직한 행보였던 것이다.
뜬구름 같은 부귀영화가 참 나를 찾아 공부하는 이에게 무슨 소용이 닿을 것이며, 근심 자체가 마음 속에 없는데 어찌 술이 필요할 것인가 말이다. 그러니 마음 편한 곳이면 그곳이 바로 혜심의 집이 아니었겠는가?
그래 맞다! 오늘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곳은, 바로 나의 집인 광원암의 원조탑인 것이다! '마음 편한 곳이면, 그곳이 바로 집(得安心處便爲家득안심처편위가) '이라고 하지 않던가 말이다.
만일 젊었을 때 혜심 선사를 알았다면 시행착오를 크게 줄일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바로 이 생生이 가기 전에 늦게라도 혜심 선사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뜻으로 혜심 선사가 수행했던 4대 명터를 찾아 순례를 해 왔는데 그게 무려 5년이 걸렸다. 그리고 이제는 선문염송집의 화두 타파를 위한 발원을 세우고서 혜심 선사의 주석터였던 광원암의 원조탑에 오늘 찾아 들게 되었다. 당신의 DNA가 보존된 사리탑 하단에서 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을 하면서 참마음을 일으켜 보리라 서원하고 찾아든 갑오년의 끝날이었던 것이다.
|
| |
광원암의 서가모니불 |
현봉 스님은 맑은 선승이시다 (출가 전에 한자경시대회를 휩쓸 정도로 실력이 출중한 분) |
미리 전화로 말씀을 드려둔 탓에 필자를 보자 현봉 스님은 우선 차부터 나누시잔다. 그래 아래 글을 인용해 광원암의 감원이신 현봉 스님과의 인연을 설명해 본다. 이 글은 지난번에 송광사보에 실렸던 필자의 글인데 보충 설명하기 위해 따온다.
“옛길을 아시는 게 광원암을 전에도 와보신 것 같소이다.”
“ 예! 전에 불일암 가는 길에 이 길을 눈 여겨 보아 두었답니다.”
송광사의 사계四季를 모두 사진에 담겠다고 다짐하며, 방과 후에 가끔 찾았던 광원암에서 현봉 큰스님을 뵙게 된 것은 실로 행운이었다.
텃밭을 가꾸느라 분주하시던 스님께서 짬을 내시어 평상에 과일을 내 주신다. 껍질을 까기가 무섭게 당신은 다시 일터로 돌아 가신다. 수돗가에 놓아둔 물통이 다 차면 얼른 밭으로 가져 가시고, 다시 오셔서는 한 말씀 해 주시고 또 얼른 창고에 가시고, 그렇게 분주하시다.
가만 뵙고 있으려니, 마치 참선이란 바로 이런 농선農禪 속에 있다고 설법하시는 듯 하다. 정말 감화를 받는 바가 크다. 삶이 이렇듯 진솔하다면 굳이 진리를 찾아 다닐 필요가 무어 있겠는가 싶다. 과일 얻어먹은 죄로 초파일에 다시 찾아 뵙고 연등공양 올렸으니, 필자는 무엇엔가 홀린게 분명하다.
적취루에 있는 염화실에서 다담을 나누는데 모두들 송년의 날을 맞이해서 그런지 마음이 뒤숭생숭함을 느끼고 있던 분위기였다. 부산에서 오신 듯한 신도 몇분과 함께 다담을 나누고는 빠져나와 서둘러 원조탑으로 오른다. 오늘의 일몰시간은 5시 45분이니, 원조탑에 올라가 텐트를 치고 세팅을 하는데 40분이면 정말 빠듯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동지가 지난지 얼마 안되어 유난히 밤이 길기 때문에 서둘러 막영지를 구축하려 애를 썼다. 내일 신년 아침은 오전 7시 45분 경에 새로운 해가 떠오르겠지만, 오늘 저녁에는 많은 눈이 온다고 했으니 내일 새로운 해를 보기는 영 글렀지 싶다.
걱정되는 것은 이곳 조계산에도 오늘밤에는 바람이 10m/s로 매우 강하게 불어온다는 예보 때문이다. 10m/s라는 풍속의 세기는 큰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우산 쓰기가 힘들며, 큰 물결이 일기 시작하는 정도를 말함이니 만일 사방이 트인 정상이라면 텐트가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폭풍 전의 고요처럼 평온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망수봉 기슭에 있는 광원암의 원조탑은 북쪽을 배산으로 두르고 있기 때문에 오늘 부는 북풍에 바람막이가 되어줄 것이다. 그런 판단을 하고서 과감히 찾아든 곳이 바로 이곳 광원암이다.
|
| |
지난번에 천수경의 진수를 엮은 귀한 책을 선물 받았다 |
존경하는 현봉 스님 친필 |
광원암은 마음이 갑갑할 때 가끔 들리던 곳인데, 어느 날 불일학당 졸업생들 모임 끝에 법우님들이 그냥 헤어지기 섭섭해 하여 회장된 죄로 우루루 몰고서 광원암을 찾았던 적이 있다. 일하다 말고 맞아 주시는게, 찾아온 불한당들이 아무런 예고도 하지 않고 찾아왔으니 방해도 될 법했고 무례할 법도 했다.
"독좌대웅봉이시구만."하는 말씀에 "대웅봉원봉현봉大雄峰願逢玄鋒'"이라 받아 칠려다가 참았다. 현봉이라는 이름 속에 내재된 '검은 칼끝'이라는 숨은 뜻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름 한번 더럽게 무섭네......
"스님 광원암 2중대가 차가 고파 찾아 왔습니다."
"보아하니 모다들 어디 날건달 같은데, 아니시우?"
"그러면 앞으로 저희들이 가문의 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모두들 "하하호호!" 박장대소를 했다.
현봉 스님은 배포가 크신 분이다. 온갖 악담에도 눈 하나 꿈쩍 않으시니 말이다. 그러나 한학漢學에 깊은 조예를 가진 정말 존경할만한 분이시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창성비문寶林寺 普照禪師 彰聖碑文을 새롭게 조성할 때 그 비문을 한자로 엮으신 분이라, 모두들 칭송이 자자했던 그런 분이다. 그러니 어찌 존경의 예를 아니 바칠 수 있으랴! 그렇게 필자는 스님의 천수경 강좌를 수강하면서 사제지간이 되었고, 날건달이라 하셔서 *폭계의 대부처럼 헹님!으로 모시게 된 인연을 맺었다.
"연산봉 아래 인월정사에서(지금의 인월암은 옛적에 판와암이라 불렀다) 구산 큰스님을 모시고 시봉하던 어느 날, 큰스님께서는 조계산의 정취에 감흥이 들어 게송을 하나 지으셨어요. 그래 그 게송을 내가 한자로 받아 적었더니 깜짝 놀라시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한학을 인정 받고 그래서 강원講院도 제대로 안 다니고 월반을 해 버리는 바람에 좋은 점도 있었지만, 생각해 보면 제대로 공부를 못하게 된 서운함도 있었어요."
현봉 스님의 말씀이 많은 것을 생각키우게 한다.
재작년 초파일에는 조계산 연산봉(851m)에 올라가 텐트를 치고 하룻밤 명상에 들었었다
(아마 그때의 명상기도 덕분에 지금 송광사 불교대학에 공부하러 다니는게 아닌가 싶다)
작년 초파일에 송광사의 주봉인 연산봉에서 텐트를 치고 명상에 들었노라 말씀 올렸더니, 그곳의 실제 이름은 효령봉이고 그 아래 인월정사라는 초막을 구산 큰스님께서 손수 지으셨으며 사람들을 피해 정진하시던 때가 있었는데, 당신께서 그당시 시봉을 들었노라고 말씀해 주신다. 하룻밤을 연산봉에서 지새웠다고 무용담처럼 자랑을 하려다가 그만 된통 걸려 들고 말았다.
어느날은 법흥 큰스님께 지리산 상무주암에 가서 현기 스님을 뵙고 하룻밤 참선에 들다 오겠노라고 말씀 올렸더니, 참선이라는 것이 십년을 해도 타파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는데 그까짓 하룻밤 거기가서 새고 온다고 별 수가 있겠느냐고 필자의 가벼움을 힐책하시던 말씀이 언젠가 계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옛 선사들의 토굴수행기를 읽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그만 등골이 오싹해 졌다. 진짜 수좌는 삼십년을 높은 산속 외진 토굴에서 보내며 참선에 들지만 그래도 이룰 수 없는 인연이라면 결코 도를 타파할 수가 없다는게 스승님의 지론이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나마 낮은 인연이라도 맺어보려고 하는 필자의 마음만은 분명코 알아 주셨다. 현기 스님과는 월내 묘관음사의 향곡 스님 회상에서 함께 참선공부를 한 적이 있다시면서, 현기 스님 주라고 당신의 저서 [선의 세계]를 내어 주셨으니 말이다. 아무튼 하루살이가 어디 만년을 살려고 준비하는 그 정성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으랴? 싶기는 하다. 하루살이는 내일의 일출도 모르고, 달이 왜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바뀌는지 그 이치도 모를 것이다. 하루를 살면서 한달간 나고짐을 반복하는 달의 이치를 어찌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튼 지난 가을날, 액자로 만든 효봉 스님의 진영을 현봉 스님에게 바치려고 했더니 사양하며 하시던 말씀!
"부처님 한 분이면 되었지, 저는 필요 없으니 다른 좋아하는 분 있으면 갖다 드리세요."
효봉 스님 손상좌가 하시는 말씀이니 그 울림이 사못 크다.
부처님 한 분이면 족하다?
정말...... 대단한 경지다!
그래 광원암에는 다른 부처상이 없는가 보다.
결국 또 한 수 배운다.
그날, 이러저러한 말씀을 해주시고 마지막에 구산 스님의 게송을 시조창으로 읊으시는데, 과연 한 세기의 선량이 바로 저런 분이 아닐까?하는 감탄사만 나올 뿐이었다.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그런 한량이자 선지식!이라 인정해 둔다.
눈을 감고 좌정한체 스님의 시조창을 듣고 있으려니, 문득 현봉 스님께서 강의하시다 갑자기, 감흥에 겨워 목은 이색의 '침계루에서'를 시조창으로 읊던 예전의 정경도 오버랩되어 다가온다. 정말 지독히도 멋을 아는 분이라 싶다. 함께 마주 앉아 연차를 마시는 그 순간이 불쑥 피어 오르는 연꽃 두송이만 같아 새록새록 지금도 그 감흥이 생각만해도 감미롭다. 그 연꽃 두송이는 사제지간이어도 좋고, *폭계의 헹님, 동생 사이여도 좋은 것이다. 맺는다는 의미도 대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싶기는 하지만......
파운일상침계루(破雲一上枕溪樓)
편욕인간만사휴(便欲人間萬事休)
반일등림즉귀거(半日登臨卽歸巨)
명조상마중회두(明朝上馬重回頭)
구름 헤치고 단번에 침계루 오르니
문득 인간만사 허망함을 알겠네.
반나절을 올랐다가 곧 돌아가지만
내일 아침, 말에 오르면 거듭 돌아보리라.
- 목은 이색 ‘침계루에서’
〈목은시고〉中
인간 만사 허망함을 목은 선생에게 일깨워 주었던 송광사 침계루
지난 가을에 거행된 광원암의 진신사리탑 봉안식 (마이크 드신 분이 바로 법흥 스승님)
■ 진각국사 부도탑의 이모저모 ■
|
|
서둘러 박지를 구성하니 이윽고 어둠이 밀려 왔다
유산(遊山) 산에서 노닐며 / 진각국사(眞覺國師)
臨溪濯我足(임계탁아족) 시내에 나아가 내 발을 씻고
看山淸我目(간산청아목) 산을 바라보며 내 눈을 맑히네
不夢閑榮辱(불몽한영욕) 부질없는 영욕을 꿈꾸지 않나니
此畏更無求(차외갱무구) 이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랴
지나간 아스라한 날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40여년 전, 젊은 나이! 그것도 새파란 총각의 나이에 효봉스님의 행적을 따라 순례해 보려고 길을 나서서, 그 순례의 첫 보고를 올리던 곳이 바로 조계산 송광사였다. 이어서 효봉 스님 좌탈입망 성지였던 천황산 표충사 서래각까지 보고 나오던 그런 순진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송광사와 선암사 간의 종권다툼 분규가 연일 톱뉴스로 보도되던 시절이었으니 생각만 해도 아스라했던 40여년 전 일이다. 그야말로 머나먼 시절의 이야기. 그 뉴스를 순천의 어느 여관에서 아침을 먹으며 라디오로 들었던 때가 바로 엇그제 일 같은데 곰곰 생각해 보니, 지금의 백발이 참으로 안스럽고 다만 세월의 무상함만 느끼게 해준다. 그러니 목은 선생이 '인간만사 휴休'라고 했던 뜻이 단박에 들어 온다. 젊은 날에는 지나치던 휴休다. 쉬라는 휴休를 그냥 지나치며 걷기만 했다. 못 보았던 게다. 목은은 보았는데...... 그게 범부와 현자의 차이다.
대저, 이 나이에 이로도록 그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다시금 불쑥 나타나서 '불법의 세계에 새롭게 접근하겠다!'며 조계총림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인가.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고 했는데, 정녕 이 길이 그대가 가고자 하는 마지막의 준엄한 결단이던가 말이다. 그러나 다시금 곰곰 생각해 보아도 그런 결론을 내린 자신에 대해서 한 점 후회도, 일 점 의혹도 아니 일어 나니, 맞기는 맞는 선택을 한 모양이다.
더 늦기 전에...... 인생지대사이자 궁극의 최종중대사를 이제는 해결짓기로 하자. 그런 마음으로 또다시 조계산 연산봉의 축복이 가득 서린 조계총림 송광사에 찾아 들었던 것이다. 이제는 학연의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서, 할 수만 있다면 절마당을 쓰는 행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번잡스레 늙고 추해진 이 마음을 가볍게 내려 놓으리라 작심했던 것이다. 그러면 정말 족하고 행복하겠지 싶다.
원조탑에 맑은 차 공양 올리고, 이내 선문염송 [禪門拈頌]을 펼쳐 본다
■ 선문염송 [禪門拈頌]
조선 중기의 승려 혜심이 편찬한 선문공안집(禪門公案集) 총 30권. 목판본.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저자는 문인 진훈(眞訓)과 함께 선문공안 1,125칙(則)을 불경 또는 조사(祖師)의 어록에서 발췌한 다음 그에 대한 강령의 요지를 제시한 염(拈)과 찬송을 붙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
내용은 제1권에는 석가모니불에 대한 30가지 화제를 수록하였고, 제2권에는 석가모니 직계제자들의 화제 41개를 수록하였다. 제3권에는 여러 불경에 실린 화제와 조사에 대한 화제 32개를 수록하였고, 제4권에는 제6조 혜능(慧能)부터 혜충국사(慧忠國師)까지의 화제 33개를 수록하였다. 제5권부터는 중국 선종의 오종칠가(五宗七家)의 고승들이 남긴 법문 가운데 화제가 될 만한 것들을 모으고, 그 화제 밑에 염·송·법어 등을 채집하여 수록하였다.
이 책은 일찍부터 우리나라 선문의 기본학습서로 채택되어 선종의 승려들은 반드시 이를 공부하였고, 선종선(禪宗選)에서도 이 책에 대한 공부는 반드시 점검하도록 되어 있었다.
초간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몽고의 전란으로 초판이 불탄 뒤 1244년(고종 31)에 대장도감(大藏都監) 남해분사(南海分司)에서 개판하였다. 그런데 이 때 새로이 347칙을 더하여 1,472칙을 수록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개판되어 현재는 1568년(선조 1)의 법흥산 법흥사(法興寺) 간행본과 1634년(인조 12)의 수청산 용복사판(龍腹寺板), 1636년의 천봉산 대원사(大原寺) 개판본, 1682년의 대원사 간행본, 1707년(숙종 33)의 팔영산 능가사판(楞伽寺板) 등이 있다.
이 책에 대한 우리나라 고승의 주석서로는 각운(覺雲)의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 30권, 일연(一然)의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유일(有一)의 『선문염송간병(禪門拈頌看柄)』 1권, 의첨(義沾)의 『선문염송기』 1권, 긍선(亘璇)의 『선문염송사기』 5권 등이 저술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불교찬술문헌총록』(불교문화연구소, 동국대학교출판부, 1976)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선문염송[禪門拈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갑오년의 끝밤이다
원조탑에서의 야밤이 깊어지면서 선문염송요론에 빠져들자니, 더욱더 아득한 경계가 또 나타나고는 해서 정말이지 아득하다. 그러니 화두를 어떻게 들 것인가?하는 의문에 쌓인다. 옛 조사들은 스승이 내려준 화두 하나 들고 밤이나 낮이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로지 그 화두 타파에만 매달렸다. 그래 서산 대사는 천년을 윤회하면서 천만번 염송하는 것이 저녁밥 드는 시간 만큼 공안 타파에 드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다던가. 천만번 염불이 한시간 참선보다 못하다는 소리이니, 그 진가를 과연 알겠지 싶다. 만일 돈오돈수할 수만 있다면 바로 지금 죽어도 정말 족하리라.
공안公案!의 백과사전적 의미를 들여다 본다. 선불교, 특히 임제종(臨濟宗)에서 선(禪)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정진(精進)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간결하고도 역설적인 문구나 물음으로 선가(禪家)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깨침을 얻도록 인도하기 위해 제시한 문제. 인연 화두(因緣話頭)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해를 쉽게하기 위해서 시심마(是甚摩)라는 화두를 들여다 보도록 하겠다. 그냥 쉽게 풀어 쓰기 위함이다.
시심마(是甚摩)
'이뭣고'에는 의정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정疑情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스스로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의정이 없는 '이뭣고'는 화두라고 말하기 전에 하나의 관법(觀法)입니다. 관법을 닦는 사람들은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고 있으라고 하기 때문에 의심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관법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항상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가 따로 있다고 설정하여 수행하므로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의심을 말하여 주체나 객체를 설정하지 아니하고 생각 속에 어떠한 가설도 짓지 않고 원인을 생각해 본다면 마침내 스스로의 생각의 한계를 타파할 수 있게 됩니다.
또 회광반조는 자신의 생각을 자세히 살펴보라는 뜻으로 돌이켜서 비추어 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 내외가 없는 데서 내관(內觀)을 찾고 외관(外觀)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회광반조가 밖을 향하거나 안을 향하는 것이라고 또한 할 수가 있습니까? 무릇 <이뭣고>라면 주관과 객관을 떠나 있어야 이뭣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정해서 변치 않는 나(我)란 없다>고 하셨으니 '이 뭣고'의 답 또한 이미 파악이 되리라 싶다. 삼라만상이 유정有情의 씨앗을 잉태하고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윤회로 진화되고 있으니, 그렇다면 윤회 또한 설명이 되었으리라.
그러므로 시심마是甚摩는 대단한 명제라 아니할 수 없다. 너가 나의 인연사이클에 공명하면서 파장을 증폭하여 서로 끌리게 해 주는데...... 과연 이게 무슨 현상인고? 어찌하여 희노애락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우주 에네르기의 일부분인 기운을 형성하며 맴도는고? 보이지 않는 바람이 열기熱氣를 잠재우기도 하고 더 키우기도 해대니 이 기이한 조화를 무엇이라 정의할 것인고?
유정有情 가운데 무정無情을 지목하는 것 또한 지독히도 힘든 일이 아닐까 싶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고, 살고, 간다는 것' 자체가 유정이자 무정이라 할 수 있다.원래 한 물건도 없다 한다면 무정이요, 삼라만상이 두 눈에 보이는데 어찌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고 우긴다면 유정이다. 따지고 보면 유정이나 무정 또한 없다 한다니...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고?
'도둑이 내 마음에 들어와 주인이 되어도 우리 아버지인 줄 알고 따라 가는 꼴이 되었읍니다.' 이 말 또한 필자에게 와 닿는 바, 그 파장이 매우 크다.
젊어서 문학청년의 꿈을 키울 때에 필자는 보들레르와 이상과 시인 고은의 사상을 한없이 존경하면서 따르고 있었다. 특히 현존하는 작가로서 시인 고은이 주는 파장은 그당시 젊은이들에게는 매우 남다르게 다가 왔다. 어린 나그네가 주었던 구도행각(화엄경을 소설로 쓴 작품)과 많은 시어詩語들은 유신독재가 진리인양 행세하는 당시 사회에서 돌파구를 열어주면서 목마름에 대한 갈증해소의 구실을 하기에 한 점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던 1978년의 겨울에 필자는 외국에서 일 년을 머물러야 하는 숙명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서울 화곡동에 있는 시인 고은 선생의 집을 친구 두 명과 함께 갑자기 방문한 적이 있었다. 화곡동 골목길의 그 집은 대문과 현관이 모두 열려 있어서 그대로 거실까지 들어갈 수가 있었다.
"스승님! 급습하였습니다!"
대청마루에서 손님 한 분과 담론을 나누던 고은 선생께서는 매우 놀라는 양으로 그 말을 듣더니, 촌각도 다툼없이 벌떡 일어나 옆에 있던 북채를 집어 들었다.
"급습이 뭐야! 도대체 급습이 뭐야!"하시던 스승의 대로大怒 속에는 철없는 젊은이에 대한 막막함과 함께 어떤 두려움도 어렴풋하게 교차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삶과 죽음의 화두가 촌각에 달려있다는 법거량法擧揚의 순간과 함께, 시세時勢를 마주했던 불판단도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필자는 목례만 하고는 두 말 없이 다시 나와 버렸고, 친구들도 바로 따라나왔던 적이 있었다. 그 치열했던 유신 시절에 '급습!'이라는 부적절한 단어는, 선생을 감찰하던 시퍼런 눈들에 시달리시던 고은 선생에게 결코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비록 무지몽매해서 반가움으로 튀어나왔던 말이었지만...... 지금은 거두라면 거두리라......
다시 말해서, "태어나서 부모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자라서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책을 읽으면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친구가 장에 가면 똥거름지고 장에 가는 일도 있습니다. 그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무슨 책을 보고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도둑이 내 마음에 들어와 주인이 되어도 우리 아버지인 줄 알고 따라 가는 꼴이 되었읍니다."라는 말이 된다는 그 경고를 말하고자 멀리도 돌아온 셈이다.
오죽하면 시인 고은이 일 년에 소주 일천 병씩은 마신다는 자평의 글을 읽고서 그대로 따라하기까지 했겠는가 말이다. 그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는 일 년에 소주 일천 병 마시기가 유행하기도 했으니, '달을 보라고 가리키니, 달은 안 보고 가리키는 손만 바라 본다.'는 우행을 우리가 저질렀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니 도둑이 들어와서 내마음의 주인이 된 격 아니겠는가!
이런 예제를 들어 가면서 스승이셨던 고은 선생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진짜 공부를 하려는 이들이라면 제 마음 속에 도둑을 들이지 말고 참주인인 나를 바로 모셔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임을 절대로 알아야 한다. 필자는 그당시에 어느 곳에도 스승을 모셔두지 않겠다는 건방진 객기를 부리고 있었으나, 고은 선생의 가르침만큼은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이며 선생을 사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도 실존하는 스승을 모신 적은 없다. 그래도 고은 선생의 스승이셨던 효봉 대선사만큼은 정신적 지주가 되어 이날 이 평생 가슴에 모시고 살아왔던 셈이니, 따지고 보면 진짜 큰스승을 가슴에 묻고는 살아온 셈이다. 아무튼 실존의 스승은 나에게 지난 40년간 없었다!
그런데, 법흥 큰스승을 만났더니 대번에 그러시는 것이다.
"이런 둔한 것 같으니......"
세상을 살면서 둔하다는 소리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 말은 우뢰와 같이 한 정신을 그만 넋놓게도 아프게 하며 때렸다.
참 우습다. 그 말 한마디에 그만 무릅을 꿇고 말다니...... 천상천하유아독존 격으로 결코 스승을 들이지 않겠노라던 대大 대웅이의 그 아만我慢이 스르르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마치 설화雪花가 용광로에 뛰어든 격이라고나 할까? 그만 스르르 녹아 버린 것이니, 참 묘한 일이었다. 누구나 괴팍하다며 또는 노인네라 고집스럽다며 실실 피하기만 하던 그 스승 앞에서 그만 무너져 버리다니, 지금도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것도 모자라 법흥대종사의 전집인 도연총집 세 권을 완성해서 스승께 회향하기까지 했으니 무엇에 홀리기는 분명 홀린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것도 시절인연이리라...... 효봉 대선사의 직계제자라는 그 한 말씀에 그만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은 혹여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인연법을 장황하게 펼쳐 놓기에는 갈 길이 너무나 멀다.
그래서 주체성이 불확실하게 이런 저런 진리를 섭렵하다 보면, '물을 마신 독사가 독극물을 침샘에 고이게 하듯이 스스로 오염이 될 수도 있다'는 그러한 경지를 절대 조심할 일이라 여겨 다시금 강조해 보는 것이다. 시심마(是甚摩)의 참주인을 바로 알고 바로 모실 줄 알아야만, '마치 산삼뿌리가 물을 흡수하여 최고의 명약을 만들어 내듯이 자신만의 참 자아를 구축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남기고 싶다. 거기에 스승님은 부합이 된다. 요즘은 오로지 스승님의 맑은 새암물을 훔쳐낼 생각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 눈에는 선지식으로 거기 계시는 것이다. 적어도 똥장군 지고 거름 밭에 가다가 친구말에 꼬여 똥장군 그대로 지고 강남에 가는 못난 판단은 아니하게 되었다는 자평은 하고 산다. 누구는 그런 나를 또 우둔하다 이른다면 똥장군 짊어진 체 또 그 사부를 따라갈 수도 있다!고 말하리라. 그러니 얼마나 편한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뭐가?
"스승님, 시아본사是我本師의 진짜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면 내려오는 답은 이렇다.
"그걸 어찌 알어? 나도 몰라!"
기본적인 일로 시간낭비 말라는 말씀이다. '직솔하게 바로 때려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두 치매가 소꼽놀이하며 놀고 있는 기분이다. 80 치매와 60 치매는 오늘도 옥신각신하며 살고 있다.
밝음이라는 미명 아래 무수히 쏟아져 내리던 그 학문의 다양성과 궤변들은, 바로 도둑이 내 마음에 들었는데 모두들 내 아버지라 말들을 해대니, 분별없이 그냥 마음의 아버지로 내가 그만 도둑을 모시고 사는 것과 하등 다를게 없다는 학설들은 혹여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 보자. 그대는 시아본사를 정녕 시원하게 가르쳐 줄 아버지를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가? 아니면 도둑님을 모시고 사는가?
머뭇거린다면 틀림없이 도둑님이 그대의 마음 속에 틀어앉아 주인행세를 하면서 그대를 부리고 있음이니 필히 이를 경계할 일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새삼 그리운 생각이 드는 몇몇 스승들의 건강을 빌어 본다. 너무 리얼하고 강하게 살아 오신 스승이기에 많이 쇠약하셨을 사대육신을 요즘은 어찌 감당하시는지 우선 걱정들이 앞서기만 한다. 감히 존엄한 유신에 맞서다니...... 죽을라고?
'누구 없는가'라는 법전 스님의 책을 다시 펼쳐 들고서 새삼 수도암 불사를 하던 스님을 그려보며, 우직한 황소처럼 살아오신 그분의 생애에 존경의 마음을 바치던 생각도 난다. 법전 스님은 벌써 몇 주전에 영원한 적멸에 들었으니, 이제 남아있는 글은 그분의 맑은 혼인가. 아니면 찌꺼기인가?
어쨌거나 어려운 명상 줄기 하나 진짜 산삼처럼 캐어 들었으니, 오늘은 망수봉 가슭에서 법리法理를 초청하여 논죄를 해 보리라 싶다. 그가 죄인 아니면 내가 죄인 아니겠느냐는 비장한 각오로 한번 맞붙어 보리라 각오를 다져 본다. 금새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새벽이 트이고 있는 것을 바라다 보면서, 그 무심한 내 마음에 존경을 보낸다. 쉽게 찾아오지 않았던 경계가 열린 듯 하다.
밝음을 안으며 경이로움으로 바라보았던 눈밭 을미년 세상
어제 올렸던 우전차가 꽁꽁 얼어 버렸다
백설의 담묵에 그만 황홀한 경지가 찾아 온다
|
| |
MSR 위스퍼라이트는 액출식이라 화력이 좋다 |
꽁꽁 언 다구들 |
새해 첫 아침, 맑은 차 한 잔! 공양으로 올리나이다
얼마나 추운지 우전차가 조금 지나니 얼어 버린다
그렇게 수많은 명상 줄기 속에서 반야심경을 외다가 천수경을 바치다가 명상 줄기 하나 잡고 늘어지게 놀다 하며 지내려니, 어느새 그 춥던 동토의 밤이 물러가고 먼동이 트기 시작한다. 문득 바라보던 함박눈의 세상은 이제 솜털처럼 하이얗게 세상을 수놓으며 온통 하얀 마음만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기어코 갑오년은 물러갔다. 하얀 마음은 그렇게 내마음을 을미년으로 채우면서 점령헤 들어 왔다.
아! 새해! 새아침인 것이다!
2015년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새하얀 세상을 만나니 어제의 갑오년이 이제 그만 아스라히 머나먼 꿈 속에 남아있는 일만 같다. 생각해보면 아쉽기도 한 갑오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갑오년을 열심히 살리라 각오했으면서도 결국은 도연총집 3권밖에 못만들고 애석하게 끈을 놓아버렸지 싶다. 마음만은 한 다섯 권 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갑오년이었는데...... 말이다.
- 아래 책들은 작년 12월 2일 완성해서 법흥 스승님께 회향했던 도연총집 전3권의 앞 뒷면 표지 -
도연총집1권 [법흥대종사 일대기] - 450 Page
도연총집2권 [법흥대종사 비망록] - 294 Page
도연총집3권 [법흥대종사 서화집]- 458 Page
(위 도연총집 전 3권은 교보문고 자회사인 퍼플출판사 간행으로 금년 1월에 출간될 예정이다)
공부에 보완하라며 스승님이 서가에서 내어 주신 책들
1. 선문염송(16권부터 30권의 공안을 앞으로 추가 보임하라는 뜻으로 주심)
2. 선의 세계 (행정가 고 건 총리의 부친인 고형곤 저서 전 2권)
새벽 차공양을 올리기 위해 MSR 액출버너에 주전자를 올린다. 우선 우전차 한 잔 올리고 그 다음에 나도 한 잔 음미하면서 을미년 새해를 열리라 생각해 본다. 마침내 진각국사께서도 마음을 내시고 이 우직한 제자에게 선문염송 줄기 또는 이파리 하나라도 내 주시겠지...... 하는 생각이 드니, 정성이 더 들어가야겠다 싶다. 그런 마음으로 차를 끓이면서 새하얀 조계봉 라인을 바라 보려니 지난 시절에 진각국사의 행적을 순례했던 기도터들이 아스라하게 파노라마처럼 펼쳐 온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은 3년 전에 올랐던 구례 사성암의 좌선대이다. 그곳 오산의 비봉들에서 텐트를 치고 2박3일을 났는데, 어찌 그리 망망대해 같이 펼쳐지는 지리산 연봉들이 좋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백운산 옆 섬진강으로 떠 오르던 환상적인 일출의 황홀함이라니! 연 이틀을 신선의 세계에서 노닐고 왔던 그런 날이었다. 신선의 세계라하니 정말 그렇다. 원효대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가 수도한 곳이어서 사성암四聖庵이라고 부르는 곳이니 말이다. 그 다음으로 진각국사가 수행했던 금대암이나 상무주암도 얼마나 조망이 빼어난 곳이었는지 모른다. 듣기로 의상대사는 조망이 빼어나지 않으면 결코 암자를 창건하지 않았다고 한다. 진안 팔성사가 그 좋은 예이다.
□ 진각국사 혜심 선사의 유명 수행처 1 - 구례 오산 사성암 □
|
| |
구례 사성암 산왕전 위 편에 진각국사가 참선했다는 좌선대 |
사성암에서 내려다 본 구례읍 |
사성암의 좌선대는 그 형상이 정말로 평평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천하를 굽어보며 선정에 들기에 너무도 좋은 좌대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천하지명당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좋은 참선터가 사성암 곳곳에 있었으니, 문명과 유리된 이 척박한 절벽에서 시도했던 선사들의 맑은 고행이 눈으로 읽혀지는 듯 하다. 어찌 바위를 깎지 않고 위대한 조각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며, 어찌 자신의 마음을 갈지 않고 대오각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사는 이와같이 정성으로 이루어져야만 그 과보가 빛나게 영근다는 동서고금의 진실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그 참선터에 걸터 앉아 궁둥이의 궤를 선사들과 같이한다는 생각으로 원효와 의상과 진각과 도선 그리고 보조 지눌의 생각을 읽어 본다. 그리고 그 훨씬 이전에, 지리산 천왕봉 밑의 법계사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또한 지리산 화엄계곡에 화엄사를 창건했던 연기조사의 뜻도 헤아려 본다. 그 이듬해인 서기 544년에 연기조사는 오산에 이르러 암자를 창건하게 되니 그곳이 바로 사성암의 시원이 된다.
필자가 가장 비중을 두는 한국초기불교계의 거목으로 두 분을 생각하고 있으니, 신라의 자장율사와 백제의 연기조사가 바로 그 분들이다. 해동海東의 8보처八寶處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던 그분들의 정성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기운이 오늘날 이렇게 융성하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이는 정성을 말하고자 함이고 다른 뜻은 없다.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사자산, 태백산, 영축산, 지리산 등지의 수승한 명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던 그 지극한 정성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런 정성 없이 어찌 한겨레의 시원과 미래가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가. 불교라는 종교 자체를 논하고자 함이 아닌, 그 정성을 말하고자 함이다.
마치 여름날 하오에 평상에서 낮잠을 자는 아기가 모기에 물리지 않게 해주기 위해, 어머님! 당신은 모기에 물리셔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면서, 하염없이 아기의 피부에 부채질만 해 주던 그러한 지극 정성을 말하고자 함인 것이다. 어찌 그 정성 앞에 산천초목들이 감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1,500년 전의 그분들 정성 앞에 조국의 천지가 감동하지 않으랴?
건너편의 부처님진신사리탑도 백설 화관을 쓰셨다
□ 진각국사 혜심 선사의 유명 수행처 2 - 함양 금대산 금대암 □
|
| |
금대암 나한전 |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금대암에서 참선에 들었다 |
금대암은 일찍이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도를 닦았고, 고려시대에는 보조 지눌과 진각 혜심이, 조선시대에는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정진했다고 한다.
보조 지눌의 법맥을 이은 무의자(無依子) 진각 혜심(1178~1234, 鎭覺慧諶)은 금대에 앉아 눈이 이마에 닿을 때까지 고목처럼 움직이지 않고 정진, 생사를 초월하여 육체를 버린 수행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竹尊者 (대나무 어른이 좋아)
我愛竹尊者(아애죽존자) 내가 죽존자를 사랑하는 것은
不容寒暑侵(불용한서침) 추위와 더위를 타지 않음이라
經霜彌勵節(경상미려절) 서리 겪을수록 절개 더욱 굳세고
終日自虛心(종일자허심) 세월 깊을수록 마음은 비는구나
月下分淸影(월하분청영) 달빛 아래 맑은 그림자 만들어내며,
風前送梵音(풍전송범음) 부처님의 말씀을 바람에 전하고,
皎然頭載雪(교연두재설) 머리에 하얗게 흰 눈을 이고
標致生叢林(표치생총림) 숲속에 빼어난 자태 드러내기 때문이라
-진각혜심, 무의자-
이제 떠날 준비를 하리라
셀카놀이를 해보면서 안 추운 양 하지만, 춥기는 무지 춥다
冬 겨울
澈寒淸入骨(철한청입골) 사무치는 추위가 싸늘히 뼈에 스미는데
更深坐兀兀(경심좌올올) 밤 깊도록 오똑이 앉았네.
絶界心如何(절계심여하) 경계를 끊은 마음 어떠하던가.
潔愈雪中月(결유설중월) 눈 속의 달보다 더 깨끗하다네.
法號:慧諶(혜심). 號:無衣子(무의자). 諡號:眞覺國師(진각국사)
주지 스님이 아침공양하라고 성화시다
법당 왼쪽 상부쪽으로 철야정진했던 텐트가 보인다
현봉 큰스님이 국을 떠 주신다
담백한 초하루 밥상을 오직 둘이서 마주했다
상좌들이 지난밤 할머니 초상 치룬다고 모두 떠나 버린 광원암의 을미년 새해 아침
암주 스님과 나, 진각국사와 부처님 이렇게만 살았던 새해 아침
상부 쪽에 보이는 진각국사 원조탑과, 그 아래 내 살림집인 녹색 블다텐트
피안으로 가겠다는 설명을 말없이 표현해 준 연지蓮池의 징검다리
魚龍在水不知水(어룡재수부지수) 물에 사는 고기는 물을 알지 못하고
任運隨波遂浪遊(임운수파수랑유) 물결치는 대로 자유롭게 헤엄치네
本自不離誰得失(본자불리수득실) 본래 잃어 버리지 않았거늘 득실을 말하지 말라
無迷說悟是何由(무미설오시하유) 미혹함이 없는데 구태여 깨달음을 강조하는가
온통 눈밭을 이룬 광원암
참 아름다운 절이다
창틀에 매달린 연씨자루
여름에는 이곳 정자에서 한 철을 나 볼까?
멀리 조계봉이 안개를 뚫고 기지개를 펴는 중이다
어때? 뭐, 한소식 좀 얻었어?
다시 눈보라가 몰아치니 하산할 일이 걱정이다
큰스님, 이제 내려 가서 진짜 공부 좀 하렵니다!
□ 진각국사 혜심 선사의 유명 수행처 3 - 삼정산 상무주암 □
|
|
※ 효봉학눌(曉峰學訥) 스님의 <不落二邊去(불락이변거)>
不落二邊去 到無着脚處
忽逢無爲人 正是本來汝
(불락이변거 도무착각처
홀봉무위인 정시본래여)
분별과 시비에 빠져들지 않고
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
차별 없는 참사람을 만나면
그것이 바로 본래의 너다
효봉학눌(曉峰學訥), 송광사에 주석할 때 친필한 <시중법어(示衆法語)>
마당가에는 아주 작은 삼층석탑이 있다. 이 탑이 유명한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이다. 각운스님은 이곳에서 스승인 혜심 진각이 지은 <선문염송>에 주해를 붙인 <선문염송설화〉30권을 저술했다. 저술을 끝마치자, 붓통 속에서 사리가 갑자기 떨어졌다. 그 사리를 봉안한 탑이 바로 이 탑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필단사리탑’이다. 필단사리탑은 저술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붓 통 속에 사리가 갑자기 떨어졌다"라는 건 과장이다. 이것은 어쩌면 저술을 끝마친 각운 스님이 그 힘듦 때문에 병을 얻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필단사리탑의 전설은 민중의 공동창작물이다.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스님(1158∼1210)은 상무주암에서 〈대혜어록〉의 “선이란 고요한 곳에도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 하는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는 구절을 보고 적극적인 보살 행을 지향했다. 고려 고종(1213~1259)때 각운스님 역시 상무주암에서 〈선문염송설화〉 30권을 저술했다. ‘진리의 등불’이 면면히 이어진 현장에 상무주암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상무주암은 보조국사 지눌(1158∼1210)과 그의 제자인 혜심 진각선사(1178~1234)의 불심이 깃들인 곳이다.
“승안(承安) 2년 무오년(戊午年) 봄에 몇 사람의 선려(禪侶)와 함께 삼의(三衣) 일발(一鉢)만 갖고 지리산을 찾아가 상무주암에 은거하였으니, 경치가 그윽하고 고요하여 천하에 제일이며 참으로 선객(禪客)이 거주할 만한 곳이었다. 스님은 여기서 모든 외연(外緣)을 물리치고 오로지 내관(內觀)에만 전념하였다.”
- 조계산 송광사 보조국사비에서 (출전: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4(1997).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198년 상무주암에 머물게 된 보조국사 지눌은 <대혜보각국사어록>을 읽다가 “선이란 고요한 곳에도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 하는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禪不在靜處 亦不在?處 不在日用應緣處 不在思量分別處)라는 구절을 보고 나서 홀연히 깨달았다고 한다.
출처: 인터넷 상
이제 걸림없이 속세에 내리리라
육조께서 인가하신 현각 영가 스님 또한 <증도가(證道歌)>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노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배움도 구하지 않나니
무명의 참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법신이니라
중국 선종사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노방(老龐 : 방거사라 불림. 상당한 부호였으나 재물은 탐욕을 부른다며 전 재산을 버리고 돗자리를 팔며 궁핍하게 일생을 마쳤음)의 게송으로 씁쓸한 마음을 달래보자.
但願空諸所有 愼勿實諸所無
好住世間 皆如影響
다만 온갖 있는 바를 비우기 원할지언정
온갖 없는 바를 채우려 하지 마라
즐거이 머문 세간
모두 그림자와 메아리 같나니
출처: 인터넷 상
나는 이름이 없다.
나는 산맥의 신선한 산들바람과 같다.
나는 은신처가 없다. 나는 떠돌아 다니는 물과 같다.
나에겐 어두운 신들같은 성소가 없고
나는 깊은 사원의 그림자 속에 있지도 않다.
나는 높은 제단의 향속에도
장려한 예식속에도 없다.
나는 조상(彫像)속에도 없고
선율 좋고 고귀한 송가 속에도 없다.
나는 교리에 묶이지 않고
신앙에 속박되지도 않는다.
나는 종교의 노예나 성직자들의 경건한 고뇌에도 갇히지 않는다.
나는 철학의 덫에 걸리지 않고
그들 학파의 힘에 갇히지도 않는다.
나는 높지도 낮지도 않으며
나는 예배하는 자이며 예배받는 자이다.
나는 자유다.
나의 노래는 열린바다를 희구하는 강의 노래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이름이 없는
산맥의 신선한 산들바람과 같다.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이 분의 시詩야말로 현재의 무애자재無碍自在한 내마음을 대변해 준다)
무애자재無碍自在를 얻었다
무설설무심심無說說無心說 또한 얻었으니 이제는 내려 가리라
대저 바람이 머무는 곳은 그 어디인가?
바람이 머문다는 뜻은 바람이 없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머무는 바람은 공空한 것인가? 공空하지 않은 것인가? 공空은 색色의 차원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불가에서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한다. 금강경의 유명한 구절인데, ‘응당 머물住 곳을 없이 하여 그 마음을 나오게 하라'는 뜻이다. 즉, 어느 곳에도 마음을 멈추지 않게 하면서 그대 마음을 한번 일으켜 보아라’하는 뜻인데 쉬운 듯 하면서도 실로 어려운 구절이 아닐 수 없다.
만일 바람이 머물 수만 있다면 그것은 역으로 바람이 없다는 뜻이 되듯이, 마음을 일으켜 온갖 사념에 젖지 말고 그냥 그 마음을 잠재워 본다면?
그것이 바로 '선정의 깊은 경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마음을 일으키는 마음작용을 잠재우게 하려면, 눈에 보이면서 공의 반대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색깔도 지워버려야만 마침내 진공眞空에 이를 수 있듯이, 일으켜진 마음과 존재하는 색을 함께 지움으로써 서로 같게 될 수도 있다는 경지를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이 멈춤을 볼 수만 있다면, 그는 마음의 작용 또한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고 최상의 적멸 또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바람을 멈추게 한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말이다. 1초에도 수만가지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나며 천변만화한다는 마음! 또한 스스로의 능력으로 잠재울 수 있다면 그가 바로 깨친 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어려운 듯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실로 쉽고 간단할 수도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라는 녀석이 화병에 꽂아 놓은 갈대를 흔들리게 하는데...... 무심히 바라보던 어느 한 순간, 갈대잎이 흔들거림을 멈추는 때를 우리는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바람이 멈추는 절대절명의 순간이라 할 수 있는데,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니 '바람을 볼 수 없다.'고 다들 푸념하고 있는 것이다. 갈대가 흔들림을 멈추는 순간! 바람 또한 멈춤의 순간!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마음 속에 바람이 불어 오면 갈팡질팡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마치 광야에서 배고파 우는 늑대처럼 좌불안석이 되었던 우리 중생심 또한 잠재울 수 있는 이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본래면목은 바람 자체도 없다고 이르는 것이다. 그대의 눈이 잠시 흔들린 게지, 바람이 흔들게 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면 결코 틀렸다고들 하겠지...... 미쳤다고만 안하면 다행이리라. 그러나 마음이 흔들린 것이 맞는 말이다!
아무튼, 마음 속의 바람을 잠재워 보자! 그래 맞아, 할 수 있겠는데?하는 자신감이 든다면 그것은 바로 참선의 길로 들어가는 편안한 입구가 될 것이다. 참선이 별겐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만 하면 되는 게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려면? 그럴러면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된다. 실로 간단하다.
마음 속의 바람을 잠재우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참선의 궁극적인 경지가 되리라......
응당 내놓을 바도 없는 마음을 안다는 것! 그 경지를 찾기 위해 우리는 명상에 들고, 계정혜를 깨닫고, 선지식을 찾아가 도를 점검받고 그러는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런 결론을 내리고서 하산을 서두른다. 눈 때문에 길이 매우 미끄러워 노심초사 걱정해 주시는 현봉 은사님께 새해 큰절도 못 드리고 그만 허둥지둥 내려 오고 말았다. 진정으로 고요한 참 정靜에 들었다가...... 결국은 세상사 핑계대며 어지러운 동動의 색깔에 내마음은 다시 물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참 부질 없는 짓이다. 명상이라는 놈도...... 참선이라는 놈도...... 조계봉 눈밭으로 낙타 세마리가 미소를 띠며 지나 간다!
너만 우습냐? 나도 우습다!
돌아와서 어느 날 을미송乙未頌을 난초와 함께 붓으로 놀려 보았다
三 駱 (낙타 세마리)
德山 權 大 雄
過日看寂世稱悟 과일간적세칭오
어제 고요함을 보았더니 세상은 이를 깨달음이라 하더라
今日思煩世稱妄 금일사번세칭망
오늘 번잡함을 생각했더니 세상은 이를 망상이라 하더라
本無悟妄亦何求 본무오망역하구
본래 깨달음도 망상도 없다는데 또 무엇을 구하랴
雲遊三駱笑促參 운유삼락소촉참
구름을 노닐던 낙타 세 마리 미소로 함께 가자는구나
- 乙未 正初
- 2015년 1월 8일 완성하다 -
德 山 權 大 雄 쓰다
++++++++++++++++++++++++++++++++++++++++++++++++++
상기 본문의 내용 중에서 사진이 안 나올 경우에는 아래 영문 주소를 누르면 바로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blog.daum.net/valeriano <--- 여기 영문을 눌러 주세요 (안 눌러지면 복사해서 주소창에 붙여넣기 해 주세요)
++++++++++++++++++++++++++++++++++++++++++++++++++
< 무단 사용시, 그 출처를 꼭 명기 바랍니다 >
註 : 돋움체-필자 글(녹색), 궁서체-인용 글(검은 회색)
*************************************************************************************************
*************************************************************************************************
- 참 고 -
고려 시단(詩壇)의 이채(異彩), 무의자의 선시
- 이 상 미
1.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무의자(無衣子)가 활약했던 무신집권기까지 이어져 온 불교 한시의 전통이 매우 오래된 것에 비해, 남아 전하는 작품은 영성(零星)한 편이며 더욱이 문집은 고려 전기 의천(義天)에게서 처음 발견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불교 시단의 상황은 승려 중에 시를 잘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승려들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불도에 뜻을 두고 주로 은거하여 구도에만 정진한 반면, 문학을 소홀히 생각하여 평소에 시명(詩名)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치 않은 불교적 풍토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1)1) ?柏思, 《佛敎的文化思想與藝術》(新文豊出版公司, 中華民國七十年), pp.231∼232 참조.
특히 불교시의 한 영역으로서의 선시(禪詩)는, 선종이 전래되어 통일신라 말에 크게 유행하면서 여러 선승들에 의해서 선지(禪旨)를 직접 표출한 게송[禪偈]이나 선미(禪味)를 띠는 선시가 창작되었을 것이라 추정되지만 자료의 인멸로 구체적인 실상은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사회가 일찍부터 송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양국의 승려가 왕래하고 전적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고려 시단에 이미 선시가 정착되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현전하는 자료상 의천의 문집에 남아 있는 작품 중 그가 선승들에게 준 〈사원연대사방산문(謝圓演大師訪山門)〉2) 시 등을 통해 교승으로서 교선일치(敎禪一致)의 입장에서 사변적으로 이해한 선지를 직접 표출한 선시가 창작되었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무신집권기에 무의자가 자신의 선적 오경(悟境)을 선시로 꽃피워냄으로써 최초의 선시집인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을 남겨 놓음에 이르러서야 질적·양적으로 발전된 선시의 면모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2) 義天, 《大覺國師文集》(韓國佛敎全書 第四冊, 동국대출판부, 1983), p.564. “接物唯應闡敎門 潛光多是味禪源 行藏進退皆由道 山世誰言靜與喧”
무의자가 활동했던 고려 시단은 국내외의 영향을 크게 받아 불교문학이 새로운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였다. 먼저 외적으로는 고려불교가 송나라에서 성행하던 선종의 영향을 크게 받아 한국 선사상의 확립을 보게 된다. 또한 문학적으로는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한산시(寒山詩)가 수입되고, 다양한 서적이 들어오면서 선시의 체재와 격조를 익힐 수 있는 문학적 풍토가 성숙되었다. 또한 내적으로는 무신란으로 인해 문인들 중 일부가 무신란의 화를 피해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승려가 됨으로써 불교문학의 발달을 촉진시켜 불가시풍(佛家詩風)이 형성되면서 선시도 발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때에 무의자가 당대 선현들로부터 받은 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규보(李奎報)는 〈진각국사비명(眞覺國師碑銘)〉에서 “(국사는) 천성이 온화하고 충실하였다. 이미 유(儒)에서 석(釋)으로 갔으므로 모든 내외의 경서를 널리 통달하였다. 그런 까닭에 불승(佛乘)을 담론할 때나 게송을 지을 때에 이르러서는 마치 능숙한 재인(宰人)3)이 여유 만만하게 칼을 놀리듯 자유자재하였다.”4)라고 하여, 그의 인물됨이 유불에 정통하고 원숙한 시재(詩才)를 지녔음을 극찬하였다. 3) 음식을 관장하는 관리.4)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卷35, 〈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韓國文集叢刊2, 民族文化推進會, 1989), p.66. “沖和碩實 旣自儒之釋 凡內外經書無不淹貫 故至於談揚佛乘撰著偈頌 則恢恢乎游人有餘地矣”
그리고 최자(崔滋)는 《보한집(補閑集)》에서 “무의자가 태학생(太學生)이 되었을 때 지은 〈야행(野行)〉이라는 시에 이르기를 ‘뽕 바구니 옆에 낀 여인에게 봄빛이 무르익고, 삿갓 쓰고 도롱이 걸친 노인은 빗소리를 머리에 이고 있네.’(臂筐桑女盛春色 頂笠퍌翁戴雨聲)”5)라고 하여, 그가 태학생 시절(24세)에 지은 〈야행〉시 가운데 특히 기와 말이 함께 살아 있는 ‘비광(臂筐)’의 구절을 들어 그의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상으로 당시 신진사인(新進士人)의 중심인물이었던 이규보와 최자가 무의자에 대해 평한 글을 볼 때, 시에 뛰어난 시승으로 당시 문인들에게 크게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초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는 무의자의 시가 한 수도 실려 있지 않다. 이것은 《동문선》이 숭유억불(崇儒抑佛)을 이념으로 하는 조선사회에서 유자(儒者)들에 의해 편찬된 시문집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오히려 그의 선시가 유가적인 관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운 만큼 진정한 선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무의자는 명종(明宗) 8년에 전라도 나주(羅州) 화순현(和順縣)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인 부친 최완(崔琬)과 모친 배씨(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휘[法名]는 혜심(惠諶),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이름은 식(寔)이었다. 그가 스스로 무의자(無衣子 : 본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라고 부른 것은 가(假 : 옷)를 벗어버리고 본래면목인 진성(眞性 : 佛性)을 찾아 살고자 한 자신의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찍 부친이 죽자 모친에게 출가의 뜻을 청하여 불연(佛緣)을 찾아 살고자 하였는데,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고 유업(儒業)을 힘쓰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불경을 외우고 주문을 읽어 오랜 후에 득력(得力)하였다. 이처럼 그는 청년기에 모친의 뜻을 받들어서 유학을 공부하는 한편, 불경 공부에도 전력해서 유불의 학문적 토대를 이룩하였다.
그가 24세(1201) 되던 해, 모친의 뜻에 따라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태학(太學)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외적으로는 모친의 뜻을 따라 유업에 힘썼으나, 실제 그가 어렸을 때 지은 〈고분가(孤憤歌)〉와 이에 스스로 답한 〈대천지답(代天地答)〉을 보면 내적으로는 이미 불교의 평등관이 확립되었다. 또한 어머니가 병중에 계실 때, 부처를 관상하는 삼매[觀佛三昧]의 경지에 들어 어머니의 병을 고쳤다7)고 하는 기록을 통해 그가 20대 중반에 이미 상당한 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李奎報, 앞의 글, p.64. “母病 〈中略〉 斂念入觀佛三昧 母夢諸佛菩薩 遍現四方 覺而病愈”
그가 태학생이 된 그 이듬해(1202)에 모친마저 죽자, 이 때 송광산(松廣山)에서 수선사(修禪社)를 새로 개설하여 도화(道化)를 한창 왕성하게 펴고 있는 지눌(知訥)을 급히 찾아가 참례하고 재(齋)를 올려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를 청하고 나서, 지눌의 허락을 받고 비로소 출가의 뜻을 이루게 된다. 이 때 지눌은 무의자를 만나보기에 앞서 꿈에 설두현(雪竇顯)8) 선사가 사원에 들어오므로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튿날 무의자가 와서 참례하였다고 한다. 즉 그에게 모친의 죽음은 자연스럽게 외적 제약에서 벗어나 출가할 수 있는 시절인연이 되었고, 이에 그는 지눌과 사제[師資]의 인연을 맺고 비로소 출가의 숙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8) 설두현(980∼1052) 선사는 송대(宋代)의 선승(禪僧)으로 설두산에서 운문종(雲門宗) 중흥에 크게 힘썼으며, 공안집인 《송고백칙(頌古百則)》을 지었다. 뒷날 무의자가 공안집인 《선문염송(禪門拈頌)》 30권을 편찬한 것을 보면, 설두현 선사와의 깊은 인연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출가 후 그의 수행에 대한 기록으로는 비명에 “그가 일찍이 오산(蜈山)에 거하면서 한 반석 위에 앉아 주야로 항상 선정을 닦고 5경이 되면 매우 큰 소리로 게송을 읊었으며, 또 지리산 금대암(金臺庵)에 거할 때는 대 위에서 연좌하여 눈이 이마가 묻힐 정도로 쌓였으나 오히려 우뚝하게 앉아 마치 고목처럼 움직이지 않고 각고의 수행을 하여, 그 결과 도(道)와 함께 정신이 응결되어 생사를 도외시하고 형체[육체]를 잊어버렸다[凝神忘形].”9)고 했다. 9) 이규보, 앞의 글, p.65. “蜈山 坐一磐石 晝夜常習定 每至五更唱偈 〈中略〉 又居智異山金臺庵宴坐臺上 雪積沒頂 猶兀坐如枯?不動 〈中略〉 其刻苦如此 非夫與道凝精 外生死遺形骸者 孰至是哉”
이 글을 통해 그가 신명을 아끼지 않고 정좌하고 묵념해서 심성을 구명하는 연좌라는 참선수행을 통해 구경에 심경(心境)이 양망(兩忘)한 무심합도(無心合道)의 높은 선적 경지에 이르렀음을 볼 수 있다. 즉 출가 후에 그가 스승인 지눌의 지도로 대오한 것이 아니고, 오산과 지리산 등 깊은 산에서 실참실오(實參實悟)를 통해 독자적인 경지에 도달한 오도자(悟道者)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근고(勤苦)의 선수행을 한 결과 28세(1205) 가을에 억보산(億寶山)에 있는 스승 지눌을 찾아뵐 때, 게송을 지어 보이고 지눌로부터 첫 번째 인가를 받게 되었다. 또한 떨어진 신을 놓고 주고받은 선문답과 조주의 구자무불성화두(狗子無佛性話頭)를 놓고 주고받은 선문답 등 모두 두 차례의 선문답을 통해 지눌로부터 자신의 대오를 인증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눌로부터 장래를 부촉받게 되었다.
31세(1208)에 지눌이 그에게 사석(師席)을 물려주고 안규봉(安圭峯)으로 물러가려고 하니, 그는 굳이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깊이 은둔하여 수년 동안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종문(宗門)의 명예를 초연히 버리고서 심요(心要)를 닦는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33세(1210)에 지눌이 입적하자, 무의자는 출가한 지 8년 만에 임금의 칙명으로 부득이 수선사 2대 사주(社主)가 되어 공식적으로 지눌의 법석을 이어 개당(開堂)하고 교화를 폈다. 이 때 사방의 학자 및 도속(道俗)의 고인(高人)들이 모두 구름처럼 모여들어 법당이 매우 좁게 되었다. 이에 강종(康宗)은 이 소식을 듣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증축하게 하였으며, 또한 사자를 보내어 만수가사(滿繡袈裟)와 마납(磨衲) 각 한 벌과 다·향·보병 등을 내리고, 법요(法要)를 구함에 무의자가 〈심요(心要)〉라는 글을 지어 바쳤다. 이를 통해 당시 그의 덕망이 이미 세상에 크게 알려져 승속의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당대의 선지식(善知識)으로 수선사를 중심 행화지(行化地)로 삼고 전국의 여러 사찰들에 두루 머물면서 반평생을 대중교화와 홍법(弘法)를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 삶을 살았다. 실제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을 보면, 그가 승속불이(僧俗不二)의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선교(禪敎) 승려는 물론 왕가(王家)·최씨가(崔氏家)·관리·일반백성 등 재가신자 등과 교유관계를 맺고 수기응설(隨機應說)한 내용이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어, 당시 선도(禪道)가 널리 성행하였음을 볼 수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그를 더욱 특별히 대우하여 선사(禪師)를 제수하고 다시 대선사(大禪師)를 제수하여, 그는 불교사적으로 39세에 승과(僧科)를 거치지 않고 승계(僧階)의 최고위직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38세에는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선사 지눌의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과 합간하였다. 그는 〈구자무불성화간병론〉에서 조주(趙州)의 구자무불성화를 대표적으로 들어 간화선 수행의 지침을 제시하였다.
49세에는 진훈(眞訓) 등 여러 문인들과 함께 선종의 이치를 깨닫고 도를 토론할 자료가 절실히 필요함을 인식하고, 불조(佛祖)가 염송한 고화(古話) 1,125칙과 이에 관한 선사들의 문답과 게송 등을 모아 《선문염송(禪門拈頌)》 30권을 편찬하였다. 이후 《선문염송》은 고려시대 선종 대선(大選)의 시험출제 내용이었으며, 또한 간화선(看話禪)의 대표적인 교과서로, 선문의 필독서로 중시되었음은 물론 선시문학의 보고로서 여러 권의 해설집이 나왔다.
54세(1231)에는 몽고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그는 선법의 선양으로 전쟁의 종식을 기원하는 진병도량(鎭兵道場)을 설치하여 국태민안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56세(1233) 겨울에 병을 얻어, 그 다음해 제자 마곡(麻谷)이 지켜보는 가운데 월등사(月登寺)에서 입적하니, 향년 57세이고 승랍 32년이었다. 고종은 매우 슬퍼하여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를 원소탑(圓炤塔)이라고 사액하였는데, 현재 송광사 광원암 북쪽에 있다. 무의자의 사법제자로는 몽여(夢如), 진훈(眞訓), 각운(覺雲), 마곡(麻谷) 등이 있다.
이상으로 그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실천적 삶을 산 대승적 인물로서 세상에 명망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삶은 그의 시세계에 그대로 투영되어 심오한 선시를 이뤄 내게 된다.
3.
선시는 선이라는 사상과 시라는 문학의 만남으로 일반 시인들의 시와 크게 다른 점은, 창작 주체가 승려이든 일반 시인이든 상관없이 먼저 선정의 깊은 사유에 들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불지견(佛知見)을 얻은 뒤 자신의 선적 깨달음을 바탕으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뜻을 시로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적 깨달음은 고도의 정신수양을 요하기 때문에 그 작가 층이 주로 선승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선적 직관의 세계를 시로 형상화하는 데는 상당한 문학적 수법이 요구되므로 창작 실천을 위해서는 선승이라 하더라도 문학적 소양을 갖춘 시승(詩僧)이어야만 수준 높은 선시를 창작할 수 있다.
한편 교승(敎僧)의 경우는 문학적 시재(詩才)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선오(禪悟)를 깊이 체득하지 못한 한계성으로 인해 고차원의 선시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며, 다만 교학의 입장에서 이해한 선사상을 시로 표출하는 차원의 선시를 기대할 수 있다. 그 외에 일반 시인의 경우 시의 사상적 깊이를 더하기 위해 선사상을 함축하거나 또는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작품 자체에 선취(禪趣)가 묻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에 선시를 광의의 의미로 해석하여 선과 시의 관계를 대별해 보면, 주로 승려들이 선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시의 형식을 차용하는 경우와 그 외에 일반 시인들이 시의 사상성을 위해 선사상을 함축하거나 또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연 시 속에 선취가 풍부한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찍이 원호문(元好問)이 〈증숭산준시자학시(贈崇山雋侍者學詩)〉에서 “시는 선객(禪客)에게 있어 비단에 꽃을 더한 것이고, 선은 시가(詩家)에게 옥을 다듬는 칼이다.”10)라고 한 것처럼, 선과 시의 상보적인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특히 선이 시에 새로운 영향을 주어 시의 면모를 보다 풍부하고 다채롭게 한 선의 작용이 높게 평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10) 袁行?, 《中國詩歌 藝術硏究》(북경대출판부, 1987), p.107 참조. 元好問說 : “詩爲禪客添花錦 禪是詩歌切玉刀”
즉 선승들의 선시는 주로 선의 시에 대한 침투로, 자신의 선적 오경을 자연스럽게 한시로 읊어 내는 협의의 선시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며, 오직 선의 사상성과 시의 문학성을 함께 겸비한 시승이라야 궁극에 시와 선이 본질적으로 합일되는 시선일여(詩禪一如)의 경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무의자는 일반 문인의 소양을 갖춘 선승으로서 자신의 선적 깨달음을 자연스럽게 시화(詩化)하여 선리(禪理)나 선취가 풍부한 성공적인 선시를 시집으로 남겨 놓은 시승이란 점에서 후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무의자의 경우, 자신의 선사상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독특한 선적 사유가 심미의식과 창작관념 등에 영향을 미쳐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선의 이론화보다 실수(實修)를 통해 깨달음을 촉구한 것처럼, 시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이론의 전개에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독자적인 선적 깨달음을 이룬 대선사답게 단편적이나마 주체적인 시인식을 지녔다.
먼저 그는 성령(性靈 : 각성의 영묘함)의 참된 경계를 추구하여 직관적(直觀的)인 심미의식을 중시하였는데, 이러한 시의식은 창작과 비평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창작에 있어서는 천진자성(天眞自性)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묘취(妙趣)를 추구하여 철저히 인공적인 수식을 배제한 무기교(無技巧)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비평에서는 오미(五味)의 감관 밖에 초월한 담박무미(淡泊無味)한 정신미를 높은 예술 경계로 삼았다.
또 다른 측면으로 대중의 오리견성(悟理見性)을 위해 선지(禪旨)가 풍부하면서도 평이한 시를 중시하는 효용론적 시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식은 높은 선적 깨달음과 시적 역량을 갖춘 선시인(禪詩人)으로서 궁극에 선과 시가 차별 없이 근원적 합일을 이룬 시선일여의 경계를 추구한 결과이며, 그가 참신하고 개성적인 선시의 세계를 개척하여 당시 문단의 독자적인 위치를 점유할 수 있었던 원천이라 생각된다.
실제 그의 시집과 어록 등에 남아 있는 작품 중 어렸을 때 지은 〈고분가〉 와 〈대천지답〉 2수를 뺀 나머지 작품은 모두 출가 후 선사로서 자신의 선적 자각을 토대로 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삶을 폭넓게 형상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의 선시는 무의자의 삶 자체가 시적 융화를 통해 잘 형상화된 것으로 곧 그를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4.
무의자는 행주좌와 일체가 다 선11)인, 무위자재한 대선사였다. 여기서는 상구보리 측면에서 그의 시에 나타난 오경의 내용을 내심(內心)과 외경(外境)의 성령의 경계에 따라 입정관조(入定觀照), 심경양망(心境兩忘), 무심자재(無心自在)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1) 무의자가 헌양 객사에서 당에 올라 말하기를 “가면서도 선을 하고 앉아서도 선을 하니 (즉 행주좌와가 모두 선이니) 어묵동정 그 자체가 편안하다. 모든 사람들은 안연한 이 일체를 아는가?(?陽客舍上堂云 行亦禪坐亦禪 語默動靜體安然 諸人要識安然底一體)”고 하였으니, 그가 이미 사위의(四威儀)가 모두 자유자재한 대선사였음을 알 수 있다. 《曹溪眞覺國師》
먼저 입정관조의 시를 살펴보자. 〈청담(淸潭)〉은 입정관조의 경지를 맑은 연못으로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寒於味釋氷 녹은 얼음 맛보는 것보다 차고,
瑩若新磨鏡 맑기는 새로 닦은 거울 같아라.
只將一味淸 다만 일미(一味)의 맑음 가지고서도,
善應千差影12) 수많은 그림자 잘 응하는구나. 12)
無衣子, 《無衣子詩集》(韓國佛敎全書 第六冊, 동국대출판부, 1983), p.55.
1구는 맑은 연못의 물이 차기가 마치 녹은 얼음을 맛보는 것보다 차갑다고 하여 선정에 든 냉철하고 깨끗한 정신상태를 상징적 심상으로 형상화하였다. 2구는 새로 닦은 거울의 맑음에 입정하여 얻은 직관적 깨달음의 청정한 지혜를 비유하였다.
3구와 4구는 다만 일미(一味: 一味禪, 頓悟頓入한 선)의 맑은 맛을 가지고서도 수많은 그림자 잘도 조응한다고 하여, 돈오(頓悟)로 인해 생긴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청정보리(淸淨菩提)로 세상의 천변만화에 조응하는 직관적 관조의 묘용(妙用)을 형상화하였다. 즉 이 시는 그가 선적 사유를 통해 자증(自證)한 직관적 깨달음의 묘오(妙悟)와 묘용을 평범한 자연현상의 하나인 청담(淸潭)의 체용(體用)에 대비시켜 형이상학적 체계로 읊어 내어 내면의 철리적 깊이가 두터운 작품이다.
다음으로 심경양망의 시를 살펴보자. 〈우후송만(雨後松巒)〉은 비 온 뒤에 소나무 산을 보고 읊은 시이다.
嵐凝翠欲滴 남기가 엉기니 푸르름이 방울질 듯.
熟?發情吟 오래도록 바라봄에 정감 일어 읊조리니,
渾身化寒碧13) 온몸이 차고 푸르게 변한 듯하네. 13) 無衣子, 같은 책, p.53.
1, 2구는 비가 온 뒤 소나무 산의 모습[境]이 마음에 따라 변화된 경계[境從心變]를 촉각적 심상과 시각적 심상을 통해 참신하게 묘사하였다. 이어서 3구는 그러한 산을 오래도록 바라봄에 정감이 일어 읊조린다고 하여 마음이 경계에 따라 변하는 경계[心隨境轉]를 말하였다. 끝으로 4구는 온통 내 자신도 차고 푸르게 변한 듯하다고 하여, 즉 심경이 양망하여 온몸을 통해 진실을 체득하게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선적 경지를 ‘물화(物化)’로 형상화하였다. 특히 이 시는 심경양망의 선리를 시절 인연에 따른 자연현상 즉 비 온 뒤의 소나무 산의 청신한 모습으로 표상해 내어 절로 선취가 풍부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무심자재의 시를 살펴보자. 그는 무심무사한 한경(閒境)을 특히 백운(白雲)의 상징적 심상으로 읊은 것이 돋보이는데, 〈천거 스님이 비 온 뒤에 산을 바라보며 지은 시에 화답하다(和天居上人雨後看山)〉에 잘 나타나 있다.
雨後春山勢萬般 비 온 뒤에 봄 산의 형세는 만 가지인데,
最憐?翠白雲閑 푸른 숲 백운의 한가로움 가장 사랑스럽네.
白雲散處頭頭露 흰 구름 흩어진 곳에 물(物)마다 모습 드러내고,
望盡遠山山外山14) 멀리 먼 산을 바라보니 산 밖에 또 산이로다. 14) 無衣子, 같은 책, p.63.
기구와 승구는 한가로이 떠다니는 백운의 양태에 무심무사(無心無事)한 가운데 한가로이 소요자재(逍遙自在)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읊어 내어 절로 묘미가 있다. 이어서 전구는 흰 구름 흩어진 곳에 산마다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이 때 흰 구름은 승화된 번뇌를 상징하며, 그것이 흩어진 곳에 산마다 그 모습이 드러난다고 한 것은 승화된 번뇌가 사라져 보리가 되는 그 순간 적조(寂照)의 경지에서 사물마다 그 완전한 실체를 바로 알게 됨을 비유한 것이다.
끝으로 결구는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를 멀리 먼 산을 바라보는 것에 절묘하게 비유하고, 그러나 산 밖에 또 산이 있다고 하여 끝없는 깨달음을 따라 일어나는 방외(方外)의 맛을 ‘산 밖에 산[山外山]’이라는 언어 밖에 두어 끝없는 선미(禪味)를 남기고 있다. 특히 이 시는 선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백운이란 평범한 제재를 사용하되 무심무사한 경지를 최대한 온축하여 담박하게 읊어낸 수작으로 무의자 선시의 한 특징을 보여준다 하겠다.
5.
무의자는 반평생을 수선사의 사주(社主)로서 대중이 근기에 따라 앓는 선병(禪病)에 마땅한 약이 되는 방편을 인연 따라 수시로 시설하여, 대중이 자신의 근기와 인연에 맞는 수행방편을 찾아 불법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도록 다양하게 개오기연(開悟機緣)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그는 선각자로서 각타(覺他)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근기에 따른 선병을 치료할 수 있는 선리(禪理)나 선지(禪旨 : 藥)를 폭넓게 시로 담아 냈다. 여기서는 무의자가 하화중생의 측면에서 대중교화를 목적으로 지은 시를 시제(詩題)에 현저하게 드러나는 작가의 의도에 주목하여 시법시(示法詩), 잠계시(箴誡詩), 찬경시(讚經詩), 염송시(拈頌詩)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시법시는 법(法)을 현시하여 대중을 교화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불법(佛法)을 보인 시와 수심법(修心法)을 보인 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상당(上堂) 법회에서 대중에게 선적 자각을 바탕으로 불법의 실상(實相)을 보인 시를 들어보자.
法法無根不自生 모든 법은 뿌리가 없어 절로 못 자라니,
不生之法若爲明 자라지 못하는 법이 분명한 듯하네.
明明向道元無事 밝고 밝은 도를 향하는 건 원래 무사한 것,
無事何勞强着精15) 무사하니 어찌 수고롭게 억지로 정신을 쏟겠는가? 15) 眞覺國師, 《眞覺國師語錄》(韓國佛敎全書 第六冊, 동국대출판부, 1983),
이 시는 임오년 시월 십사일에 하동(河東) 양경사(陽慶寺)에서 상당하여 지은 작품이다. 기구와 승구는 무시 이래로 본래 뿌리가 없어 생멸(生滅)이 따로 없기 때문에 오히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우리들 눈앞에 분명히 실재하는 불법의 실상을 간명하되 함축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어서 전구와 결구는 우리 앞에 역력하게 분명히 존재하는 무상무위(無相無爲)한 불도(佛道)를 구하는 방법은 멀리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무사(無事)한 자기 마음에 있는 것임을 드러냈다. 즉 불도는 원래 무심무사(無心無事)한 것인데 사람들이 억지로 유심유위(有心有爲)하여 수고롭게 정신을 낭비하여 도를 찾기 때문에 오히려 천만리 도와 어긋나게 되는 것을 반어법을 통해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참으로 불도를 향해 구하고자 한다면 마음의 조작[有爲]을 억지로 지어 마음 밖에서 따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무심히 번뇌 망상을 일으키지 않아 무사하면 곧 무심합도(無心合道)하여 단번에 자신의 불성을 보고 불도를 깨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무의자가 대중에게 불법의 실상은 무위무사하여 생멸이 따로 없기 때문에 무심하면 되는 것이니, 헛되이 도를 구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안으로 자신의 불성을 찾아 각성(覺性)을 수순할 것을 현시한 것이다.
다음은 수심법을 보인 시로, 특히 그가 좌선의 진정한 선수행적 의미를 역설적 표현을 통해 완곡하게 담아낸 〈종민 스님에게 보인 시(示宗敏上人)〉이다.
坐坐坐非坐 앉고 앉고 앉는다고 해서 앉은 것이 아니고,
禪禪禪不禪 선하고 선하고 선한다고 해서 선하는 것 아니네.
欲知坐禪旨 좌선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看取火中蓮1 저 불 가운데 연꽃을 취해 봐라. 1 眞覺國師, 같은 책, 〈示宗敏上人〉, p.25.
본래 진정한 선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사위의(四威儀)가 모두 선으로 일상의 기거동작 어느 때든지 닦아야 하는 것이며, 참선하여 깨닫고 나면 따로 입정(入定)하지 않아도 항상 사위의가 선의 무심무위(無心無爲)한 경지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근기가 낮은 수행자들은 수시수처(隨時隨處)에서 곧바로 선정에 들 수 없기 때문에 먼저 환경이 조용한 곳을 찾아 경계를 고요하게 한 후, 좌선을 통해 마음의 고요한 경지를 추구하게 된다. 이 때 앉아서 닦는 것[坐禪]이 들뜬 마음[浮心]을 가라앉히고 입정하여 고요한 가운데 자성(自性)을 밝히기에 가장 좋은 수행 방법이므로 선수행자들에게 좌선을 제시하는 것이다.
기구와 승구는 참선하는 자들이 좌선이라는 문자상(文字相)에 집착하여 단지 좌(坐)를 몸이 앉는 행위로, 선(禪)을 참선하는 행위로만 인식하여 좌선의 행위 자체에 집착하다 보니, 좌선이란 방편이 도리어 심득(心得)에 장애가 되어 실참실오하지 못하는 당시 선수행인들의 선병(禪病)을 지적해 냈다.
특히 좌선이라는 문자를 반복하여 사용하면서 심층적 역설을 통해 수행자들로 하여금 문자성(文字性)이 본래 공(空)함을 깨달아서 좌선이라는 문자를 여의고 그 본뜻을 취하여[離文取義] 진정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올바른 좌선의 참 뜻임을 드러냈다. 이어서 전구에서는 좌선의 뜻을 바로 알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정하고, 그 대답으로 결구에서는 저 불 가운데 연꽃을 취해 보라고 상징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연꽃은 본래 진흙 속에서 피는 꽃으로,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처염상정(處染常淨)한 불성을 의미하는 상징체로 사용된다.
그러나 무의자는 진흙 속의 연꽃이 갖는 이러한 관념적 상징체로서의 의미를 사용하지 않고, 저 불 가운데 연꽃을 취해 보라고 하여 고통의 생사관문[火]을 뚫고 얻은 깨달음[연꽃]이란 개인적 상징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잠계시는 후학들이 특히 참선수행에 있어 경계해야 하는 내용을 담아 교화한 것이다. 무의자는 계(戒)·정(定)·혜(慧) 삼학 중에서도 특히 계율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자신의 선적 자각을 바탕으로 직접 계(誡:戒)의 선적 의미를 시화(詩化)하였다.
〈譯誡〉
?殺團캿 심히 원만한 것이로되,
磨?碎石 자꾸 갈아 쇄석을 만듦은,
읖在手端 손끝에 달려 있는 것이라.
將謂是軍是馬殺害念 장수가 말하기를 군대와 말을 죽일 생각,
牢畜於心肝 심장과 간에 길러서 새겨두네.
時乎負則莫涯憂惱 때에 지면 끝이 없는 근심과 번뇌,
時乎勝則無限喜歡 때에 이기면 무한한 기쁨과 즐거움.
貪嗔嫉妬我慢埋頭 탐진과 질투 아만에 머리를 묻어서
不覺日盡夜閑 낮이 가고 밤이 가는 줄도 모르네.
噫敗他世出世間 아, 저 세간과 출세간에 패해야 하리니,
惡賊無以過乎遮般17) 악한 도적이라도 이보다 지나칠 것 없네. 17) 무의자, 앞의 책, p.51.
불교에서 계란 특히 수도자가 계율을 지켜[持戒] 범해서는 안 되는 금계(禁戒)를 의미한다. 수도자는 먼저 계를 수지(受持)해야 참다운 선정[眞定]에 들어 갈 수 있으며, 다음으로 진정(眞定)에 의거하여 적정(寂靜)한 가운데 정념관찰(正念觀察)하여 바야흐로 지혜를 증득할 수 있다고 한다. 만약에 선도(禪道)를 닦고자 하는 자가 계를 범하게 되면 선정에 장애가 됨은 물론 인과(因果)에 떨어져 영원히 생사윤회를 면치 못하게 된다. 따라서 선수행자가 반드시 청정범행(淸淨梵行)을 닦아 참된 선정을 통해 보리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계(持戒)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먼저 1∼3구는 일체중생의 불성은 본래 원만한 것이나 범행(梵行)을 닦지 않고 계를 범하면 무명에 가려 미혹하게 됨에 자꾸 갈아서[계율을 지켜 점차 수행하여] 마음을 쇄석(碎石)18)처럼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의 손끝[實修]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였다. 18) 쇄석은 방장산(方丈山)에 있는 돌을 가리킨다. 습유기(拾遺記)에 “방장산에 쇄석이 있는데 거리가 10리나 된다. 인물의 그림자가 마치 거울과 같이 비춘다.(方丈山 有細石[碎石] 去石十里 視人物之影如鏡爲)”고 하여, 쇄석의 조각조각이 거울처럼 모두 사람을 비출 수 있다고 한다.
이어서 4∼7구는 군대를 통솔하는 장수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도자에, 적군(敵軍)과 적마(敵馬)는 마음속의 번뇌 망상을 비유하여, 즉 장수가 적군과 적의 말을 살해할 생각을 심장과 간에 길러서 새겨 둔다는 것은 실제 선수행에 있어 지나치게 계율에 얽매이는 집심(執心)으로 인해 도리어 번뇌 망상을 일으켜 양단에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이는 뜻을 펼칠 수 없는 때를 만나 전쟁에 지면 근심과 번뇌로 가득 차고, 반대로 때를 만나 전쟁에 이기면 한없는 기쁨에 집착하는 양단에 떨어진 경우를 절묘한 대구를 통해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8∼9구는 그러한 탐착심(貪着心)으로 인해 탐진(貪嗔)과 질투, 아만(我慢)에 머리를 싸매고 수고롭게 생각하다 밤낮으로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일생을 허비하게 되는 선수행자들의 과실을 지적했다. 끝으로 10∼11구는 특히 삼독(三毒)을 세간과 출세간에 반드시 패해야 할 것으로 경계하여 수행에 있어서 삼독의 병폐가 악한 도적보다 심하다고 하였다. 즉 이 시는 선수행자들에게 지계가 진정(眞定)에 들어가는 방편임을 강조하여 허송세월로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정진할 것을 권면하는 한편, 방편인 계율에 속박되면 마음이 각성을 수순할 수 없기 때문에 참선수행에 도리어 장애가 되어 끝내 중도(中道)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선리(禪理)를 특히 율격(律格)에 얽매이지 않는 고체시 11구를 사용하여 격외의 격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시정신으로 표현하였다.
셋째, 찬경시는 부처의 교법(敎法)을 담은 불경(佛經)을 찬양하는 내용을 한시의 형식에 담아 중생을 교화한 것이다. 불경은 중생들을 저 피안의 세계인 불과(佛果)에 실어 옮기는 불승(佛乘)인데, 그 속에는 흔히 게송으로 부처의 공덕과 교리를 찬미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의자는 게송 대신 주로 한시의 형식을 원용하여 불경의 유현(幽玄)한 내용을 간명(簡明)하게 함축적으로 담아냄으로써, 선수행자가 그 본의(本義)만을 쉽게 기억하고 항상 명심(銘心)하여 참선수행의 방편으로 삼도록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그가 선승이면서도 출가 전에 익힌 풍부한 한문소양을 바탕으로 찬경의 내용을 한시로 즐겨 읊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소자금강경찬(小字金剛經贊)〉 시를 들어보자. 시에 아우른 서문에서, 그는 《금강경》을 사경(寫經)한 지극한 정성과 교묘한 지혜를 갖춘 경연을 위해 시를 짓게 되었다고 작시 동기를 밝히고 있다.
實相無相 실상은 무상이니,
體自圓虛 본체 절로 원만하고 텅 빈 것.
虛不失照 비었으나 비춤을 잃지 않고,
照無遺餘 두루 비춰 남겨둠이 없어라.
隨緣萬別 인연 따라 만 가지로 다르나,
不?一如 폐하지를 않아서 한결 같네.
大悲大智 큰 자비와 큰 지혜로서,
於焉起予 이에 나를 일으키누나,
洗足敷坐 발을 씻고 가부좌하니,
空生?破 공생이 보고 알아차렸네.
因而請益 인하여 더 배우길 청하니,
乃爾注下 이에 쉽게 가르쳐 주셨네.
雖度四生 사생을 제도한다 하나,
亦本無我 또한 본래부터 무아인 것.
今此小輪 지금 이 작은 원에,
具三般若 삼반야를 모두 갖추었으니,
於文字中 문자 가운데에,
着得箇眼 개개 눈이 붙어 있구나.
乘筏超流 뗏목 타고 물 건너가면,
便登波岸19) 곧 피안에 오를 것이라.19) 무의자, 앞의 책, p.58.
이 시는 사언 고시로, 의미상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1∼8구는 《금강경》의 대의를 평이한 표현 속에 실상(實相)과 연기(緣起)의 오묘한 이치를 대비적으로 설명하여 깊이 있게 드러냈다. 즉 실상은 무상(無相)한 것으로 그 체가 본래 원허(圓虛)하여 제상(諸相)을 비추고, 머무름이 없이[無住] 인연 따라 삼라만상을 두루 비춰, 그 결과 항상 체용이 일여(一如)한 것이라 하고, 그리고 이러한 《금강경》의 설법을 통해 중생으로 하여금 오리견성(悟理見性)케 한 부처의 대비대지(大悲大智)가 자신의 깊은 신심(信心)을 일으킨다고 그 감동을 고백하였다.
둘째 9∼14구는 부처의 《금강경》의 설법이 사상(四相)을 여읜 부처의 무상보시임을 말하였다. 즉 부처가 발을 씻고 가부좌하고 입정하여 무념삼매(無念三昧)에 들어 밀음전법(密音傳法)을 한 뜻을 공생(空生 : 須菩提)이 알아차리고 인해서 더 배우기를 청하니, 이에 물을 위에서 아래로 쏟아 붓듯 쉽고도 확실하게 현시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비록 《금강경》을 설법하여 사생(四生)을 제도한다 하셨지만 실제는 본래 무아(無我)의 무상보시일 뿐이니, 이 《금강경》을 사경한 경연 또한 이러한 부처의 무아의 가르침을 명심해서 사경한 공덕을 바라지 말 것을 경계한 것이다.
셋째 15∼20구는 경윤이 사경한 《금강경》을 칭찬하였다. 즉 《금강경》을 쓴 작은 원에 삼반야인 문자반야(文字般若), 관조반야(觀照般若), 실상반야(實相般若)가 다 갖추어져 있고, 문자 중에 다 눈이 붙어 있어, 문자로 인해서 관조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방편[뗏목]을 이용하여 이 고해의 바다를 건너가면 곧 저 깨달음의 피안에 오르게 되리라는 상승각로를 제시하여, 경연으로 하여금 심목(心目)을 일치시켜 사경한 정성에 자만하여 아상(我相)을 내지 말고, 반드시 금강반야의 무상의 이치를 마음으로 터득하여 피안에 오를 것이라는 진리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갖고 정진할 수 있도록 교시한 것이다.
넷째, 염송시는 화두(話頭 : 公案)를 한시의 형식에 담아 교화한 것이다. 무의자는 《선문염송》 가운데 약 1,125 고칙(古則) 중 24개의 고칙을 송한 작품이 《진각국사어록보유(眞覺國師語錄補遺)》에 전재(轉載)되어 있다. 그런데 선가의 고덕(古德)들이 학인의 집착을 깨고 사람들의 심성을 계도하기 위해서 집어든 화두는, 그 표현 방식이 매우 독특하여 선수행자들 스스로 그 함축된 뜻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무의자는 교화적 의도 하에 난해한 화두를 시의 형식에 담아내어 대중들 스스로 참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삼환화(三喚話)〉를 살펴보자. 시의 제목 아래 실린 삼환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충(忠) 국사가 하루는 시자(侍者)를 부르니, 예하고 응답하였다. 이와 같이 세 번 시자를 부르니, 세 번 응답하였다. 충 국사가 말하기를 “장차 내가 너를 저버리는 허물을 지면 도리어 네가 나를 저버리는 허물이 되겠구나.”라고 했다.
竹籬茅屋?溪斜 대울타리 띳집은 시냇가 따라 비껴 있고,
春入山村處處花 봄 찾아든 산촌에는 곳곳마다 꽃 피었네.
無像太平還有像 무상 태평이 도리어 유상(有像)이니,
孤烟起處是人家20) 외롭게 연기 이는 곳 바로 인가로다. 20) 진각국사, 《眞覺國師語錄補遺》, p.49.
기구와 승구는 대나무 울타리 띠 집이 시냇가를 따라 자연스럽게 비껴있고 봄 찾아든 산촌에는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꽃이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고 피는 자연의 무상(無像 : 無相)에 불법의 무상(無相)을 담박한 풍격으로 읊어 내어 자연스럽게 선취가 묻어난다.
전구는 자연의 무상 태평이 도리어 인간사의 유상(有像 : 有相)이라고 역설하여,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원융한 불법의 이치로 보면 자연의 무상 속에 또한 인간의 유상이 융섭해 있음을 형상화하였다. 따라서 결구는 외롭게 연기 이는 곳이 바로 인가라고 하여, 불도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유상함이 바로 무상한 불법의 현현임을 아는 데 있다는 도리를 표상해 내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삼환화의 문답 속에 내재된 도리를 자연의 무상과 인간의 유상의 대비를 통해 극명하게 교시한 작품이다.
즉 충 국사가 상을 내지 않고[無相] 무심하게 시자를 불렀는데, 시자는 밖으로 자신을 부르는 언어에만 집착하여 그 근원이 무상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한마디 말임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도리어 상을 내어[有相] 유위로 예 하고 대답하는 데 머물렀다. 이에 충 국사가 다시 자상하게 세 번이나 불러 시자의 심득(心得)을 촉발시켜 주었으나, 끝내 시자는 충 국사가 자신을 부르는 도리를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였다. 이처럼 난해한 삼환화의 도리를 무의자는 자연의 무상과 인간의 유상이란 평범한 진리로 시화하여, 선수행자 스스로 목전에 현현한 자연의 이법을 통해 불법의 현리(玄理)를 심득할 수 있도록 하였다.
6.
이렇게 볼 때, 무의자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삶 그 자체가 시적 융화를 통해 잘 형상화된 다수의 시는 선적 자각을 바탕으로 하는 본질적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입정오도(入定悟道)한 성령의 경계에서 자아와 우주의 본질인 진리를 직관한 오경(悟境)을 읊어내는 것을 창작의 중심으로 삼아 시선일여(詩禪一如)의 경지를 드러냄으로써 심오한 선시의 세계를 이룩하였다.
이처럼 그의 선시가 성령(性靈)의 경계를 읊어내었다는 것은, 당시 유가의 시가 선진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일상 생활적인 주제가 주류를 이루고, 아직 성리학의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읊은 철학적인 시의 새로운 경지를 마련하지 못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음을 고려해 볼 때, 한국 한시사상 최초의 형이상학적인 시인 선시를 개척한 것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러한 선시의 특징은 전대 불교시가 사변적 인식활동을 통해 이해한 불법의 교의(敎義)를 시를 원용하여 압축한 것이나 불교적 깨달음을 읊어내던 것과 크게 다르며, 또한 일반적으로 시인들이 자신의 칠정(七情)을 인연해서 사물에 감동하여 뜻을 읊어내는 것과도 크게 변별성을 갖는 새로운 면모라 할 수 있다. 한편 대중교화시는 시교(詩敎)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시법시·잠계시·찬경시·염송시 등 다양한 선지를 시화하여 시의 의의(意義)를 확대시켰다.
이처럼 그가 선시의 체제를 갖추면서부터 이전까지 불가에서 유가의 시를 배우려던 경향이 일변되어 그의 선시가 문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쳐21) 그 결과 시선일여의 길을 걸었던 문인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무의자의 선시가 당시 시선일여를 추구하는 새로운 시문학 경향을 낳을 만큼 고려시단에 이채(異彩)를 더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무의자 선시는 한국 선시의 한 표본이 되어 고려의 원감충지(圓鑑沖止), 백운경한(白雲景閑), 태고보우(太古普愚), 나옹혜근(懶翁慧勤) 등에 의해 계승되어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승·발전되면서 한국 선시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21) 崔滋의 《補閑集》 下卷에 散見됨.
나아가 무의자 선시는 진정한 구도자로서의 자신의 선적 깨달음을 바탕으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대지(大志)를 진실하게 담아낸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현대의 독자로 하여금 심오한 깨달음을 새롭게 경험하여 선시의 문학적 가치를 향수하게 한다. 실제 선의 높은 성령의 경계는 고도의 정신수양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것인 만큼, 시선일여의 경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문학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독자가 선적 세계를 새롭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선시만이 획득할 수 있는 문학적 가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 이상미
성신여자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에서 문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신여대와 숭의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논문으로는 〈구봉의 문학관과 시세계〉 〈무의자 혜심의 문학관〉 〈무의자 선시고〉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송구봉시전집》
[출처] 고려 시단(詩壇)의 이채(異彩), 무의자의 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