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순례기

尋春海印 7 - 해인사 용탑선원

梅君子 2016. 3. 22. 19:08

尋春海印 7 - 해인사 용탑선원




                                                                                     일 시: 2016년 3월 16일 (수)


                                                                                                                    장 소: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용탑선원





새벽 에불을 끝내고 돌아와 깜박 졸았다 싶었더니 방장 시자 스님께서 토굴에 찾아와 창문을 흔드신다. 새벽 다섯시! 아침공양이 곧 있을 예정이니 어서 준비하고 나오라는 재촉이다. 빙그레 웃음을 띄고 공양 갈 준비를 한다. 아마 시자 스님은 필자가 새벽예불에 참례한 줄 모르는 듯하다. 깊은 잠에 들었으리라 짐작하고 언성이 매우 높다. 젊고 순진한 스님은 마치 여인네를 닮아 미소만 나온다.


스승님과 방장 큰스님과 함께 정성스레 준비한 아침공양을 마친다. 그러고 나서 또 순례에 나서겠노라고 고하였다. 방장 큰스님께서는 '차나 한 잔 하고 출발하지 그러냐?'고 이르셨지만 '갈길이 바쁩니다.'고 아뢰니 미소만 지으신다. '뭐가 그리 바쁜 인생이냐?'는 표정이시지만, 슬그머니 서운한 빛이 도는 것을 느끼니 나도 미소만 나온다.


그렇게 오늘의 순례를 시작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남의 절에 업무방해만 된다.'며 아침 일찍 송광사로 돌아가자 서두르실 스승님을 생각하면 순례일정이 바쁘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홍제암 위편에 잇는 용탑선원. 어제 못다 본 까닭에 서둘러 일별하고 고불암에 가볼 요향인지라 바삐 선원에 들어 선다.


용탑선원은 3.1운동 당시 33인의 민족대표로 추앙되었던 용성 큰스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암자로써, 용성 스님의 사리탑을 수호하고 관리하기 위해 1945년에 창건된 암자다.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 업적은 가히 사명 대사와 같은 반열이라고 하니 그만하면 순례의 충분 조건이 되리라 싶다.





가야산


고암당 상언대종사 부도와 탑지


가야산에 햇빛이 들어 간다


용탑선원 입구


용탑선원




용성대선사 (龍城大禪師)


백용성(白龍城, 1864년 5월 8일[1] ~ 1940년 2월 20일)은 한국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백상규(白相奎)이며 용성은 법호이다. 법명은 진종(震鍾)이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출생하였으며, 16세에 출가하여 해인사로 들어가 선종과 교종을 함께 공부하였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또한 불교를 발전시키려면 농사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함양에 화원과 과수원을 만들었으며, 북간도에도 농장을 만들었다. 저서로는 《수심론》, 《어록》 등이 있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에서 불교 대표는 2인이었다. 용성과 용운이다. 용성은 깨달은 스님으로 한용운의 사형이었고, 용운 스님은 독립운동에 사형인 용성 스님을 끌어들이려고 그렇게 노력하였으며, 님의 침묵의 님은 부처님이라는 뜻인데, 독립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간청에는 침묵한 채, 참선만 하고 앉아 있는 깨달은 사형에 대해 쓴 것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전라북도 장수 출생으로, 16세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불문에 입문했다. 해인사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깨달은 스님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교계에서는 조선 후기의 불맥인 지안 조사가 135년 만에 용성 스님으로 환생하였 다고 전해진다.[3] 1917년경 어느날, 단군왕검의 현몽을 꾸고 그무렵 박성빈에게 금오산 지역으로 적을 옮기도록 조언했고 태기가 있는 백남의(白南義) 여사에게 아이를 잉태하게 하니 훗날 그 아이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일설에는 님의 침묵의 님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0년“사자(獅者)뱃속에 충이 생겨 사자가 쓰러지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곧 열반에 들 것을 예고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1990년 은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한국역사에 호국불교(護國佛敎)로 대표되는 고승에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더불어 용성대사도 들어가야 할 것이다.

1919년 2월27일에는 한용운으로부터 3·1운동의 계획을 전해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신의 인장을 한용운에게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 날인하게 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 불교계 대표로 참가했다. 그무렵, 천도교와 기독교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자 자기 몫을 고집하지 않는 無我(무아)의 사상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人(인)을 결속시키는데 앞장섰다.[2]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3·1 운동 이후 동북아 국제정세를 운용하는 높은 안목을 발휘해 독립운동의 의지를 더욱 높였다. 불상, 불교에 관련된 유물을 가장해 상해임시정부로 꾸준히 독립운동자금을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감옥에서 한글 성경을 가지고 있던 목사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4] 1921년 한국 불교 사상 처음으로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했다.

1928년 '조선글 화엄경'을 펴냈다. 당시의 언론은 '세종대왕도 못했던 일'이라고 하였다.

1930년 대각사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3귀 5계를 주어 불자로 삼은 후, 항일운동을 위해 샹하이(上海) 임시정부로 보냈다.

1932년 윤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후, 중국에서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이루어졌다.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장제스(蔣介石), 장쉐량(張學良), 마오쩌둥(毛澤東)을 차례로 만나 대한의사군 무장진격작전을 피력, 지원을 요청했다. 귀국하여 대한의사군을 모집하던 중 안모라는 일제 밀정에 의해 스님의 원대한 계획이 들통나 북간도에 마련했던 독립군의 거소가 완전 파괴됨으로써 21만명의 조·중 무장진격전이 무산되고 말았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일제가 사회 문화 전반에 왜색을 도입하면서 불교에서도 대처승을 인정하는 정책을 펴자 자신이 세운 대각사(大覺寺)를 중심으로 왜색불교 추방 운동에 앞장섰다. 1924년 잡지 《불일(佛日)》을 박한영과 함께 창간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건백서를 두 차례 제출했다.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사원 경제의 자립을 위해 1929년 경상남도 함양에 자급형 농장인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하고 선농불교(禪農佛敎) 운동을 펼쳤으며, 여기서 나온 수익금을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보내기도 했다. 《화엄경》 등 경전의 한글화 작업과 일요 어린이 법회 개설, 거리 포교 및 찬불가 도입 등으로 불교 대중화와 포교 방법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양복을 입고 금광도 개발하는 등, 절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크게 힘썼다.





상자당


칠불보궁


7불과 함께 용성 선사의 열두제자 진영을 모셨다


인자하신 부처님


고암 스님이 세운 삼층석탑과 미타굴 법당


미타굴 부처님


위패를 모신 법당


연무늬가 싱그럽다


부처님 모든 영가를 제도해 주소서!


용탐선원을 빠져 나온다 (저 길로 마애불에 오를 수 있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