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여분의 부처와 천여기의 탑을 이고지고 가는 구름배(雲舟)는 얼마나 고달플꼬
- 운주사 일주문에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탐방객들이 모여 있다 -
- 큰형님 귀가 이렇게 복스럽게 크신 줄은 운주사 와불을 보면서 알게 되었는데 완전 부처님 귀를 가지셨다 -
아름다운 여름날들이 흘러 가고 있다.
경기도 분당에 살고 계시는 큰형님께서 이번에 남도순례를 계획하셨는데, 광주 인근의 명소를 소개시켜 달라고 이메일을 보내 오셔서 어디로 모실까... 궁리를 하다가... 이내 화순의 운주사를 소개 시켜 드리기로 하였다. 모 신학대학교에서 교무처장으로 정년을 하신 큰형님께서는 명경헌에서 일박을 하고 동복-벌교-고흥-보성-장흥 쪽을 순례할 예정이라 하셨다. 당신도 광주 태생이지만 오래도록 서울에 거주하셨기 때문에(근 40년은 계셨을게다)... 정작 당신의 모태지母胎地인 전라도의 비경들은 자주 접해 보지를 않으셨던 까닭이 작용하셨나 보다. 아니면 그리움의 향수병이시던지...
물론 우리 집안의 큰기둥이신 큰형님께서 전라도를 정말 모르실리가 없다. 필자가 자라나던 국민학교 시절에 이미 서울의 대학을 다니셨던 큰형님께서는 등산을 워낙 좋아하셔서... 필자가 그 영향을 많이 받아 지금도 산행을 자주하게 되었으니... 생각해 보면 직간접적으로 큰형님께서 필자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당시에는 군용 워커군화를 신고 각반과 군용수통에 권총밴드 정도는 차야만 제대로 갖춘 등산객 행세를 할 수 있었다. 큰형님은 그런 복장으로 친구분들과 무등산을 자주 가셨기 때문에 어린 필자의 눈에 비쳤던 큰형님의 그 멋진 모습은 동경! 그 자체였다. 6.25 직후의 세대였던지라 그만큼 군용물자가 넘쳐났었고... 대검이며, 항고, 반합, A Tent 등을 파는 광주천변 대교다리 옆 상가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다. 그 상가들이 지금은 모두 철거되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그야말로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큰형님은 또한 애장가이기도 하셔서... 그 시절부터 이미 '들돌장서'라는 고무인을 파 놓고서는... 책을 수집할 때마다 그 도장을 쾅쾅 찍어 두셨기 때문에... 필자는 얼마나 그 장서들을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들돌'은 백형伯兄의 아호이신 야석野石의 한글풀이 이름이다. 마치 세레자 요한처럼 광야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워 담으시겠다는 취지가 아니셨나 이제와서 유추해 본다. 그리고 그런 인연으로 맺었던 큰형님의 초기직장은 대학교의 도서관 사서직이셨으니... 그만하면 책에 대한 열정을 알 수 있으리라...
그당시 필자는 서석국민학교를 다니던 무렵인데... 공부를 꽤나 잘했던 모양으로 중앙도서부원으로 뽑혀서 교무실옆 중앙도서부에서 도서대출 담당을 하였다. 필자와 탁민제, 황경남 이렇게 세명이 도서부원이었는데 어찌나 책읽기를 좋아했는지... 한번 빠지면 점심시간이 끝나는 줄도 모르고서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어 우리는 담임선생님께 주의를 들을 때가 가끔 있었다. 묘하게도 세명이 모두 한반이었던지라 가끔은 '너라도 점심 끝종을 들었으면 알려 주지, 그랬니?'하면서 서로 눈을 흘기고는 했으니... 참 아스라한 추억이 감미롭기만 하다. 그리고 서랍 아래 켜켜히 쌓여있던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어린이' 잡지들을 읽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큰형님이 서울에서 대학 다니던 시절까지는 그 '들돌장서'가 본가本家에 있었기 때문에... 그 덕분으로 필자는 많은 명작들을 접할 수가 있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개안開眼도 그렇듯 자연스레 트이지 않았나 싶다. 또한,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막힘이 없이 척척 대답해 주시던 큰형님은 아마도 그 당시에 광주일고를 다니셨던 무렵이었을 것이며... 그래서도 훌륭한 스승 노릇을 하신 걸로 기억이 된다. 나이차가 15년도 넘었으니 그럴밖에...
그리고 어느 날 부터인가... 큰형님이 신학에 뜻을 두시면서... 큰형님 장서의 대부분이 신학서적으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지금도 큰형님의 책중에서 '마태복음주해'랄지... '천로역정' 등을 읽었던 기억이 머리에 선하게 남아 있으니... 필자는 어릴 때부터 신神에 대한 문제들을 화두처럼 달고 살게 되었지 않았나 싶다. 그렇듯... 큰형님 덕분으로 비교적 여유롭게 세상을 알아보기 시작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다행스러웠고... 그러한 인연을 만들어 주신 큰형님은 소년시절에 있어서 필자의 정신적 지주였던 점은 거의 틀림이 없다.
아니다! 최근세에 있어서도... 백형伯兄께서는 모범을 보이시면서 필자를 숙연하게 만들곤 하셨는데... 어머니가 아프게 되면서 중풍으로 노환이 깊어지자... 이를 당신 가족이 수용 못할 것을 예감하시고서는... 당신 가족과도 떨어져서 아파트 독채를 따로 얻어 나가셨으며... 늙고 병약하신 노모님을 시골에서 모셔와 홀로 수발하면서... 근 4년여를 곁에서 지성으로 간병을 하셨으니... 필자는 그때부터 큰형님을 달리보고 참! 진짜 성인聖人이시라 생각되어 더욱 더 조심스런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제 부모께 참된 마음을 다하여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모습이라 생각하는데... 세상이라는 탁류 속에서 그래도 모범을 보이신 분이 곁에 계셨으니... 그 어디에서 성인聖人의 궤적을 구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데... 그 모진 인고의 세월을 유추해 보면 정말로 깊은 존경을 드리지 아니할 수 없다. 큰형님은 지금도 한밤 중에 잠을 거의 못이루시고 있으며... 병원진단 결과가 '무호흡 증후군'이라 하여 치료를 받고 계신다는데... 그 원인이 4년동안 노모님을 수발하면서 언제 부를지 모를 노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셨으니... 세상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내하셨던 큰형님의 노고에 깊은 존경의 마음이 다시 들게 되면서, 다만 그런 깊은 희생과 사랑의 저변에는... 당신의 철학을 좌지우지했던 종교의 가피력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보는 눈이 지금도 백형伯兄께서는 언제나 한 수 위일 수 밖에 없으니... 가끔씩 백형伯兄을 생각할 때마다 필자는 든든한 마음과 존경의 예禮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큰집, 작은집 합쳐서 백형伯兄께서 이제는 제일 큰어른으로 계시게 되었다. 그런 큰형님께서도 70 노환줄에 계시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부디 오래도록 천수를 누리시기만을 하늘님께 기원 드릴 뿐이다.
운주사를 찾게 된 동기를 쓰다 보니 그만 집안의 이야기로 깊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차피 필자의 단상을 엮는 글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자리를 빌어 큰형님의 희생정신에 대해 못 다 드린 필자의 감사한 마음을 피력해 본다. 필자는 이렇듯 참된 정성으로 지극하게 노모님을 모시던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가 있었으니... 그래서 이참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백형伯兄께 드리게 된 점을 그래도... 무한다행으로 생각한다.
|
- 민중의 자력으로 조성했다는 민불民佛들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
- 운주사 민불들의 코는 많이 건사해 보였다 -
아무튼 그런 연유로 해서 백형伯兄과 필자는 초여름의 무더운 오후에 운주사를 찾게 되었다. 7월의 운주사는 참으로 청명했고 관광객은 평일에다 맹위 때문에 별로 없어 보였고... 다만 서을의 어느 대학에서 온 문화탐방클래스가 다국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들의 안내를 맡은 문화해설사가 제대로 소화를 해 낼지 그게 저으기 걱정이 되기는 하였다. 그렇게 필자와 그들 일행은 거의 비슷한 시간에 거의 비슷한 코스를 순례하는 인연을 갖게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경력이 많아 보이는 그 문화해설사는 구수한 방언으로 필자가 모르던 이야기도 곧잘 재미있게 해주고는 하였기 때문에 풍문으로 들리는 그의 사적유래기가 또한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러나 필자 나름대로의 시각에서 보자면 운주사는 광주항쟁의 태동 원인과도 궤를 같이 하였다고 생각하며, 또한 광주항쟁 이후에는 정신적인 지주역할로 일조를 하였다고 나름 분석해 본다. 1980년대 초에 필자의 친구들이 주축이 되어서 차려진 '한마당'이라는 출판사에서는 '말콤엑스'나 에밀 졸라의 '드레퓌스' 같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해석의 제3세계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으며... 그러한 이념서적들은 전국적으로는 신선한 반향을 불러 일으킨 대단히 혁신적인 일들이었으며(가령 흑인들을 아프로아메리칸Afro-American이라고 불러 주어야 할 당위성을 그때 처음 알았으니까), 지금은 그 책 이름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무튼 1980년대에 김지하가 평해 놓은 책에서 운주사 이야기를 필자는 처음 접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당시 '인당국악사'의 이춘봉선생과 거문고를 하던 이경준선생과 한마당출판사의 정용화선생과 함께 찾아 온 곳이 바로 이곳 운주사였다. 그러니까 김지하의 책을 출간하고 난 후, 운주사의 내력을 일러준 정용화선생이 바로 이 글의 첫 동기부여를 해준 셈이 된다.
그당시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는 길이 비포장으로 엉망이었으며... 승용차로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그런 오지중의 오지였다. 대초리 인근에는 나주군 다도면茶道面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다도茶道가 성행했던 이곳 일대에는 운주사, 개천사, 불회사, 초의선사가 출가했던 운흥사 등 많은 절이 있었으며... 운주사 앞쪽 오리五里 앞에 있는 마을을 중장터라 하여... 스님(중)들이 모여 만든 장터로 유명하여 중장터라 불렀다는 곳인데... 아마도 초의선사가 초발심하면서 만난 인연이 바로 그곳에서 성행했을 다도茶道라고 생각해 본다면... 이곳 중장터는 차와 다구를 많이 팔던 차茶의 집산지가 아니었을까 유추해 보아도 무리는 없으리라 싶다. 그리고 중이 장을 보던 중장터가 있을 정도의 곳이라면 지형적地形的으로도 자생력있게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조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인 불회사(佛會寺)는 나주시에서 27㎞ 떨어진 다도면 마산리 덕룡산 남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가운데 하나로 백제 침류왕 1년(384년) 인도승 마라난타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백제의 불교 전래는 침류왕 때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중국의 진나라로부터 전해 왔다고 하니 가장 오래된 절로 추정할 수 있다.> 상기 글을 읽어 보아도 이 부근이 백제불교 도래지임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인연으로 이곳 중장터 부근 불세佛勢의 규모를 추정해 보자면, 운주사에서 대규모의 불사가 일어난 역사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추정해 본다.
아무튼 그때 읽은 김지하의 지론대로라면, 후백제의 유민들은 갈 곳 없이 방황하다가 신세력에 떠밀려 은둔한 곳이 바로 중장터와 연계되어 있는 이곳 운주사터였으리라 본다. 특히 미륵불의 용화세상을 믿은 백제의 불교도들이, 불교의 최초 전래지인 불회사가 있는 이곳 부근우로 당연스레 귀착을 하면서 새로운 미륵세상을 꿈꾸게 되었으리라 유추해 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후백제를 개국했던 견훤은 당시 미륵불의 현신이라 하여 생불生佛로도 불리웠는데, 불행하게도 아들 신검의 역모로 결국은 왕건을 도와 자신의 나라를 토벌하게 되었고... 자멸에 이르게 된 후백제의 유민들은 생불로 받들던 견훤의 몰락을 보면서 당연히 새로운 구세주를 염원하게 되었을 것이다. 완산주를 굽어보며 앉아 있는 견훤왕릉이 계백장군의 릉보다 못하게 초라한 것은 물론 승자의 논리로 보았을 때 능히 왕건이 그렇게 역사를 만들었겠지만... 유랑민이 된 후백제의 아니, 정통 백가제해百家濟海로(아래 팁 참조) 중국 산동반도와 일본열도를 휘두르며 해상왕국을 자랑했던 백제의 유민들은 당연스레 영화롭던 옛 백제의 부활을 꿈꾸며 미륵불의 도래를 희구하게 되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운주사 부근에 정착하여 재력을 쌓게 되자... 조국의 부활을 염원하며 천불천탑 조성의 대규모 불사장정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유추를 해 본다. 통일신라나 고려국이나 모두 불교를 국시로 하였으므로 이곳 중장터 부근에 정착하여 불교관련 물품을 생산하던 그들에게는 충분한 자생력이 있었으리라 보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차 및 다구의 거래가 이루어 졌으면 이곳 지명을 다도면茶道面이라 불렀을 것인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미륵용화세계의 도래를 믿은 그들은 암묵적으로 천불천탑의 조성에 모든 역량을 기울이면서 백제 재건의 꿈에 빠져 들었을 것이다. 즉, 새로운 참된 세상을 꿈꾸는 후백제 유민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일맥 전라도라는 속성과 부합된다는 것이 80년대 사상의 근저에 흐르던 이 지역의 암묵적인 양해사항이었다. 백제의 옛 영화는 있었지만 그후로 천년간을 차별받고 살아 왔다는 백제의 땅! 전라도의 생각은 그래서 군사독재를 거부하며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를 열망했던 전 국민의 뜻을 헤아리면서 한층 더 승화되어 '광주항쟁'이라는 민주주의 태동의 기폭제 역할을 자임하게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타지역에서는 광주항쟁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을 많이 갖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왜 광주의 그 숭고한 희생정신을 공산주의에 비견하여 깎아 내리려고 하는지 참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광주시민이 무장했던 그 7일간에 단 한 건의 강도, 절도 사건도 없었다는 것은... 자율민주 세계의 새로운 시도가 아니었는가 말이다.
운주사의 천불천탑 불사를 일으킨 옛 후백제 유민들의 한恨을 유추해 보아도 이곳이 얼마나 타 지역에 비해 냉대를 받아 왔으며, 그러한 천년의 냉대를 승화시켜 '이곳만이 잘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불법으로 투옥되고, 진리眞理를 참 진리라고 무서워서 말할 수 없었던 그 무소불위의 군사독재를 종식시키자고 여러 목숨 바쳐가면서 희생들을 한 것인데, 박정희와 그 칠공자들의 부끄러운 치적이 옳았던 것이라고 누누히 지금도 주장을 해 대면서, 이곳의 인물들은 모조리 빨갱이였다고 몰아 세운다면... ? 참! 환승지로 지나치는 외국의 개들도 그 졸변卒辯을 보면서 웃겟다. 글쎄.
지금도 인터넷상에서 떳떳하게 활동하는 군사독재의 잔재들과 전라도를 빨갱이땅으로 매도하는 한심한 지식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과연 옛 삼국지와 지금의 삼국지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조국의 진정한 통일에 대해서 고민해 볼 때에... 큰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이념적 갈등의 노예가 되어 자기가 옳다고만 한다고 하더라도 후세의 후손들은 운주사의 저변에 흐르던 한恨이 무엇이었는지... 광주정신의 심저深低에 흐르는 아름다운 승화의 향기가 무엇이엇는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진정한 겨레의 심적心的 통일을 조화롭고 슬기롭게 이루어달라는 대원大願을 담고 이 글 운주사 편을 쓰고 있다는 점을 정말 깊이깊이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전라도는 백제의 패망 이후에 백제의 역사가 분서갱유로 말소되면서 함께, 승자의 논리에 의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조작이 되어온 수모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러한 행태는 지금도 빨갱이땅 운운하면서 홀대와 멸시와 냉대를 함께 받아오고 있으나 하소연 할 길이 없다. 심지어 고려의 훈요십조에는 금강이 한반도를 역류하고 있으므로 모반의 지세인 호남의 인재를 등용해서는 안된다 하였으며, 살기 좋은 곡창의 땅 전라도를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불가거不可居라 매도하고 있으니, 위정자들의 권세를 업고 함부로 필筆을 놀리는 그 한자릿 수의 단순한 지식인들의 작태에는 어언 할 말을 잊을 뿐이다.
그러므로 작금의 지식인들이여... 전라도를 논할 때에는 이곳의 한恨을 먼저 생각해 주시기 바란다. 오죽이나 차별받는다는 한恨이 천년을 이어왔으면... 그러겠는가. 그러나 그 천년의 한을 승화시켜 민주주의를 이루자고 외치며 목숨을 바친 그 항쟁의 정신을 전라도가 즈그들끼리 잘 살자고 작당한 일도 아니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전국의 외침을 대신 짊어지고 목숨바쳐 대변했던 것인데 어떻게 빨갱이의 사주를 받은 모반으로 깎아 내리며 전라도를 비하시키려 드는가 말이다. 전라도도 한 겨레!요 한 형제!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제발 공산주의에 결부시키는 식으로 속편하게 함부로 내뱉는 궤변과 고정관념을 중지해 주시기를 바란다.
아무튼 운주사 기행을 계속하자면, 후백제의 유민들이 하룻동안에 천여기의 석탑과 석불만 조성해 낼 수 있다면... 바로 영화롭던 백제가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자의 말만을 믿고서... 사력을 다해 대불사를 조성하고 있던 와중에 불행하게도 그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동이 트기 전의 새벽 무렵에, 일에 지친 불량한 누군가가 꾀를 내어 새벽닭이 우는 '꼬끼오!' 소리를 모성模聲하므로 해서 모두들 공사를 포기하고 뿔뿔히 헤어지게 되었다는 그렇게 슬픈 전설이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운주사인 것이다.
|
- 독특한 후백제탑의 조형미를 보아라 -
- 루이뷔똥의 트레이드 마크가 이미 후백제 때 유행했다는 말인가? -
- 운주사 초입부터 위용을 드러내는 기이한 탑군들 -
- 필자는 30여년 전에 이 탑 앞에서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
-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민불의 친근하고 온화한 모습이라니 -
- 탑군들의 행렬이 지금은 주변의 엄청난 정화공사 덕분에 그 위용을 과시하게 되었다 -
Tip : 구름배가 지켜주는 화순 운주사雲舟寺 소개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만 하여도 석불 석탑이 일천기씩이 실존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 후 조사한 기록을 보면 석탑이 22기, 석불이 213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어 역사 속에서 끝없이 유실되어온 뼈아픈 세월을 살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차례의 발굴조사와 두차례의 학술조사를 하였으나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혀내지 못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또한 운주사 석탑들은 모두 다른 모양으로 각각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쩍하고 둥근 옥개석(지붕돌)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벽돌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 탑들의 재료로 쓰인 돌은 석질이 잘 바스라져서 오히려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불모(석공)님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석질로 빚어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싶다. 운주사 서쪽 산능선에는 거대한 두 분의 와불(미완성석불)님이 누워있다. 조상 대대로 사람들은 “이 천번째 와불님이 일어나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말을 전해왔다. 아마도 운주사 천불천탑은 우주법계에 계시는 부처님이 강림하시어 하화중생의 대 설법을 통한 불국정토의 이상세계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조성한 대불사가 아닐까한다. (인터넷 운주사에서 발췌)
************* * **************
운주사(運住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도선(道詵)이 세웠다는 설과 운주(雲住)가 세웠다는 설, 마고할미가 세웠다는 설 등이 전해지나,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법당과 석불, 석탑이 많이 훼손되어 폐사로 남아 있다가 1918년에 박윤동(朴潤東)·김여수(金汝水)를 비롯한 16명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채, 종각 등이 있다. 1942년까지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기만 남아 있다. 크기는 10m 이상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우 투박하고 사실적이며 친숙한 모습이 특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 좌우의 산등성이에 1,000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80년 6월에는 절 주변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소장되어 있는 문화재로는 연화탑과 굴미륵석불, 보물 제796호인 9층석탑, 보물 제 797호인 석조불감, 보물 제798호인 원형다층석탑, 부부 와불(臥佛) 등이 있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우리 국토의 지형을 배로 파악한 도선이 배의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하고 이곳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잘 알려진 부부와불은 천불천탑 중 마지막 불상으로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의 조각이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1,000년 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한다.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발췌)
|
- 어느 산하에나 있게 된 똑같은 양식의 한옥에 질려... 필자는 옛 운주사를 그리워 한다 -
- 운주사여! 운주사여! 그대 바람과 함께... 구름과 함께... 떠나 버렸단 말인가 -
- 운주사는 예전에 쇠락한 대웅전과 요사채가 전부였던 적이 더 운치가 있었다 -
- 원구형석탑 양식은 대한민국 어디를 가 보아도 없을 독특한 창작품이다 -
- 명당탑이 있는 이곳은 조선 3대 길지 중의 하나란다 -
- 부스러지기 쉬운 암석으로 표현하는 석공의 석예기법이야말로 최고의 경지라 한단다 -
- 운주사 민불의 최고 백미라고 보는데 더 이상은 훼손이 안되었으면 좋겠다 -
아무튼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이곳 화순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천불골은 천불산 운주사에 있으며, 천탑골은 애초에 천태산 개천사에 있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단다. 그러나 지금 확인해 보면 천태산의 개천사는 사격이 운주사 보다 훨씬 낮고 그 산세로 보아도 석탑의 조성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들을 하고 있는데... 어디 이집트의 사막에 돌이 많이 있어서 피라미드가 조성되었겠나.
전설처럼 내려오는 민초들의 구전口傳도 새겨 들을 필요는 있다. 두 곳의 산山이 모두 천불산과 천태산으로 천자가 들어간 걸 보면 지명으로 보아도 구전의 신빙성을 입증해 주는 셈이 아닐까. 그렇다면 천탑골이 있던 개천사의 탑들이 언제부터인지 백제의 부활을 바라지 않던 세력권에 의해 파괴 되었으며, 그래서 일부는 이곳 운주사로 옮겨 왔다는 말도 될 수 있다. 상상은 자유이다. 사학자가 아닌 다음에야 유추해 보는 상상도 제지 받아야 할 필요는 없으리라. 역사는 가설假設 아래서 진실이 되었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폼페이라는 도시가 있었다는 가설(구전)이 없었다면 화산재에 덮여 있던 고대도시 폼페이의 발굴은 불가능했으리라.
아무튼 광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이슈는 군사독재의 종식이었으며, 그들은 진짜 민주주의의 부활을 꿈꾸며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 저변에는 '천년간을 차별 받아 왔던 전라도의 분노가 일순간에 폭발한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 본다.
운주사의 천불천탑 조성이 후백제 유민의 한풀이였다면... 광주항쟁은 차별받던 전라도가 유일하게 외칠 수 있었던 억압에 대한 자유! 불평등에 대한 평등사회의 희구를 부르짖는 민주주의 대장정의 신호탄 또는 분수령이 었다고 보아야 한다. 내 자식이 믿었던 우리군인의 총검에 의해! 곁에서 죽어가는데... 빨갱이들이 총을 들어라!해서 총을 들 의식없는 광주사람이던가 말이다. 원! 역사를 매도해도 유분수지... 그렇게 천년을 당해왔다면 이해가 되시는지...
그런 의미에서 광주항쟁은 운주사의 천불천탑 조성 동기와 그 궤를 같이하면서... 조국의 민주화에 진짜 공헌을 한 셈이 되었으니... 그로인해 이곳 운주雲舟의 정신은 조국의 질서유지라는 대국적인 견지에서 풀이하자면, 광주항쟁을 빌어 비로소 완성된 아름다운 의로움이 아닐까 나름대로 분석을 해 본다.
광주의 정신은 많은 피를 요구하였지만, 어느 정도는 주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뿌리를 내리게 했던 자양분이 되었으며, 오늘날 조국의 발전된 근대화에도 그 정신적 혼을 새기게 되었으니... 천년 기다림의 염원으로 불사리가 영글어지듯 승화되어 온 운주의 정신도 광주항쟁의 정신과 면면히 그 궤를 같이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는 답이 나온다.
전라도 정신! 새로운 용화세계를 바라던 후백제 유민들의 그 정신이 올곧게 승화되어 이 조국 민주화의 초석을 이루게 하는 분수령으로 의로운 몸을 살라 기꺼이 희생을 하였으니... 후대의 역사가들은 운주용화 정신과 함께 조국의 민주화에 일조한 광주항쟁의 정신도 깊이 분석하여 함께 새겨 두어야 하리라... 소망해 본다. 그래야 천불천탑을 조성환 고혼古魂들과 민주화를 열망한 義魂들의 정신이 어우러져 재조명될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
- 경사진 암석에 석탑을 올린 저 정교함을 보아라 -
- 와불 보러 가는 길에 만난 칠층석탑과 민불들 -
- 드디어 운주 미르기의 핵심인 부부와불을 만나게 되었다 -
필자가 찾았던 80년대에 비해서 지금의 운주사는 화순군의 대표문화축제로 자리할 만큼 그 위상이 커졌으며, 전국적으로도 알려지게 되어 사격寺格이 이루 말할 수도 없이 비대해 졌다. 그 당시의 석탑들은 논두렁 밭두렁 사이에 있거나 길도 없는 산속에 쓸쓸히 방치되어 있었다. 대웅전과 요사채도 쇠락하기 그지 없었으며, 그 당시 기억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만 있던 이곳이 아마도 대처승의 수도도량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때 그 절의 느낌이 더 좋았었다. 이름 그대로 민불民佛들이 그렇듯 소박하게 펑퍼짐하게 퍼져 있을 때가 더 민초들의 대변자다워 보였다.
말을 보태자면, 요즘의 절들은 반성을 해야만 한다. 어느 절에나 똑같은 양식의 한옥을 짓고 똑같은 양식의 단청을 해 댄다면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이조의 구분이 없어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필자는 단청을 안하고도 방부처리가 잘 되어 있는 일본 왜옥倭屋을 대비시켜 제발 그 모습 그대로 방부 처리를 하면서 보존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의 국보 1호인 숭례문에 아무리 좋은 금강송을 써서 지어본 들... 어찌 조선 대목들의 그 솜씨가 나오겠는가 말이다. 신단청을 하고 당당하게 자랑거리로 나올 국보 1호 숭례문을 생각하면서... 외국관광객들이 그 역사물에 600년 세월의 혼이 묻어 있다고 인정해 줄지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지금 전국의 절들은 그 역사성을 모두 말살시키면서 신식 대한민국 신생 절로 씩씩하게 거듭나고 있으니... 그러면서 우리 후손들에게 조국의 역사를 소중히 지켜내고... 물려 주었노라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무튼 백형伯兄께서는 연거푸 탄성을 내면서 필자를 따라 다니셨다. 이렇게 기이한 형세의 석탑을 본 적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시니... 그러고 보면 이 절의 꾸밈새는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독특함이 묻어나온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의 전세계 여성들이 자랑스럽게 매고 다니는 루이뷔똥 문양의 핸드백을 우리네는 천년 전에 이곳 운주사의 칠층석탑에서 이미 표현해 내었으니... 어디 한번 상표권에 대한 논쟁이라도 국제적으로 벌여 볼까.
드디어 우리는 운주사 마지막 작품이라 칭하는 운주와불雲舟臥佛에 도착하였다. 흔히들 운주와불을 부부불이라 칭한단다. 그리고 이 와불이 일어나면 용화세상이 올 것이라 하였으며, 어떤 글에는 천년간의 새로운 개벽세상이 열린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역사는 어차피 연속해서 씌어지는 끝이 없는 드라마와 같지 않겠는가. 이제는 온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이 와불을 일으켜 세워 보는 것은 어떨까. 완공이 덜 된 미완의 운주사에 완공이라는 마침표를 찍어 보면 어떨까.
그렇게 해서 조국의 통일이 완성되고... 국운이 융성해질 기회만 온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제발! 이 시대의 절대 강대국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그 기개를 우리도 가져보면 어떨까. 그렇게 해서 자잘한 독도 가지고 논할 것도 아니고... 동북공정도 한 귀로 대범하게 흘려 버리고... 잃었던 실지회복의 꿈을 키우는 대국적인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그런 그림을 그려도 부족할진대... 독도나 거론하면서 좁은 마음을 내어서야 쓰겠나.
옛날옛적 우리의 조상들은 시베리아와 만주, 산동반도, 일본 구주를 호령하였으니... 어찌 그런 기상을 우리 후손들이 가져야 한다고 훈육을 하려하지 않는 것일까. 이조 때는 사대事大에 빠져 그랬다지만... 고구려, 백제는 틈만 나면 중국과 한판씩 붙었고... 고려때는 중국을 치려고... 나서려던 기상이라도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러므로 위화도 회군은 우리 민족의 처절한 자기 항복 역사의 시작이었다고 말하면 궤변일까.
왜 좁은 반도 땅덩어리 안에서 형제들끼리 으르렁거리며 부대껴야 하는 것일까. 뙤국, 왜국 형제들과 함께 으르렁거리면 얼마나 그 기상이 크게 살아날까. 세계는 하나라는데 모든 형제들이 사이좋게 살자고 포효하면 어떨까. 그러한 세상이... 운주와불이 입불立佛이 되는 용화세상 아닐까.
필자는 이곳에서 가까운 나주 철천리 미륵사에 있는 높이 6미터의 석불입상(하단 팁 참조) 처럼... 12미터의 거불인 이곳 운주와불이 운주입불雲舟立佛로 거듭 나기를 꿈꾸어 본다.
그러므로 해서 국운이 왕성해 진다면 시도해 볼 일 아니겠는가. 다른 종교들이 싫다한다면 불교도 차원에서라도 시도해 봐야 하지 않을까. 호국불교가 무엇이었던가? 지금 와서 시도를 아니해서 그렇지...
말을 아니해서 그렇지... 모두들 갖고 있는 간절한 열망이 아닐까. 실지失地 회복! 적어도 그러한 기개와 그 기상이라도 간직하면서 살아야만 대한국인大韓國人이 아닐까!
......
민족의 아픈 마음이 치유받고 일어설 수만 있다면... 누군가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지 않을까.
만일 '북한이 침몰하면 중국이 접수한다'는 가설도 있는데... 왜 우리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 왜 두려워만 하는 것일까.
북한은 5천년 전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우리의 땅이다. 그러니 소유권 운운하지 말고 얌전히 있기 바란다! 113만의 수나라 군사가 을지문덕에게 패퇴하였음을 기억하라!
누군가 한마디는 해 주어야 경제파국을 염려하는 중국이 재고해 보지 않을까. 이 시대의 최강국인 미국도 대비해 놓지 않을까. 완충지대를 원하는 일본도 대비하지 않을까. 경제교류를 지키려는 러시아도 대비하지 않을까.
100년 후를 내다 보는 지혜가 우리에게는 필요한 싯점이다. 그러한 지혜가 없다면 영원한 위화도 회군의 역사가 반복될 뿐인 것이다. 우리는 대국에 맞설 힘이 없다는 상실감은 5000년의 역사 중에 600년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도 먹혔지 않는가.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지켜야할 일이다.
최근에 누군가가 외쳤다. '우리는 정치, 경제, 문화에는 모두 다 열성적으로 한 마디씩 해 대는데... 정작 우리가 지켜야 할 안보에 대해서는 모두들 유구무언이다!'라고 말이다.
누군가가 우리의 안보를 대신해 주겠지 하는 생각 그 자체가 바로 사대事大!인 것이다!
|
- 와불 조망대에서 바라본 운주사 일대 -
- 와불을 친견하고 돌아서는 귀로에 북두칠성을 새겨 놓았다는 칠성바위를 만날 수 있었다 -
- 건너편 산등성이에 단아한 오층석탑이 앉아 있다 -
- 그 오층석탑을 당겨 보았다 -
- 대웅전 뒷편인데 산 중턱 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와 불사바위가 보인다 -
- 자애로우신 백형伯兄께서 모처럼의 나들이가 흡족하신 듯 포즈를 취해 주셨다 -
- 뒷편의 부처들은 운주축제 때마다 하나씩 운주민불로 조성해서 봉안한단다 -
- 열세분이 봉안되어 있으니 운주축제가 햇수로 13년이 되었나 보다 -
- 귀로에 바라본 운주사 초입 -
운주사를 둘러보고 나오는 마음이 오랫만에 개운하다.
필자의 친구 중에는 80년대 당시에 오로지 운주사의 석탑과 민불만을 그리던 친구가 있었다. 도불渡佛하여 새로운 화업을 승화시켜 이어 가기까지... 그 친구(김혁정교수)는 오로지 운주사의 석물들만을 테마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미륵불이 현생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기가 일쑤이다. 그래서 그는 호도 미르기라 하였다. 대단한 신념이다.
이렇듯 미르기의 도래를 기원하는 마음들이 전라도의 마음일진대... 그 마음에다 대고 진실성 운운하는 것은 전라도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순수했던 그 마음이 우리 겨레 형제들의 가슴 속에서 아름답게 인정받는 세상이 오기를 꿈꾸어 본다.
너, 나 없이 우린 한 형제!
한 핏줄!
한 얼!이라고 진정 믿을 수 있는 용화세상을 꿈꾸며...
2010년 8월 5일
小 鄕 權 大 雄 書
****** *** ****** *** ****** *** ******
다녀 온 날 : 2010년 7월 5일 (월)
장 소 : 전남 화순군 도암면(道岩面) 대초리(大草里) 천불산(千佛山)
|
++++++++++++++++++++++++++++++++++++++
관련 글은 이곳 카페에 더 있습니다.
http://cafe.daum.net/valeriano
P.S: 배경음악은 " 물 소 리 "
'심경순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우러진 비틀림으로 팔백년을 지켜왔던 천자암의 쌍향수 (0) | 2010.07.22 |
---|---|
단정하게 백운산과 의논하며 살고있는 아름다운 광양 성불사 순례기 (0) | 2010.07.10 |
심청전의 원류인 관음사의 주지스님이 우려내던 햇차에 빠지다 (0) | 2010.07.01 |
마음을 쉬게하는 치유의 숲에 자리한 세심원과 휴림 (심경순례36記) (0) | 2010.05.13 |
초춘탐매기 4 - 정도리 구계등-배씨묘-미소공원-수목원-해신編 (0) | 2010.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