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반야봉에서 첫 상고대를 만나다 - 신두류록8
일 시 : 2012년 10월 29일 ~ 31일
장 소 :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2박3일간의 일정으로 지리산을 다녀왔다.
아래 사진들은 지리산 반야봉 정상에서 만난 상고대의 사진들이다.
올해 처음 만나는 겨울 손님들을 반가운 마음으로 담아 보았다.
- 노고단을 흘러가는 양떼구름이 이채롭다 -
- 노고단고개의 가을하늘은 유달리 청명했다 -
- 이곳에서 1969년 1월1일에 지리산 첫 종주를 하면서 기념사진을 찍었었다 -
- 바로 43년 전의 이사진(필자 맨 좌측) -
- 현재의 노고단대피소 -
- 노고단대피소 자리는 함태식 옹 이전에 지리산곰할아버지께서 사시던 움막이 있었으며 필자도 하룻밤 유숙했다 -
(연하반 고증으로는 첫 노고단대피소 지붕이 불타서 양철로 임시 개축했다 하는데, 우리는 곰할아버지의 배려로 유숙했었다)
- 노고단을 수호하고 있는 까마귀떼가 예사롭지 않다 -
- 올해 두번째 목표인 노고단(1507m)을 등정했다 -
- 노고단 송신탑 사이로 우뚝 솟아 밝은 기운을 자랑하는 무등산 -
- 석양녘의 차일봉 실루엣 -
- 노고단대피소에 걸린 보름달 -
- 나의 사랑! 무등산이 반겨 주신다 -
- 이튿날 세번째 목표로 올랐던 반야봉(1734m)에서 바라본 노고단(우측) -
- 올해 지리산의 유명 3봉을 완등한 기념사진을 남기는 감회가 나이 때문에 남다르게 다가온다 -
- 반야봉에서 환희심으로 만났던 상고대의 청아한 모습 -
- 빙옥혼골 매화님을 연상시켜 주는 청신함이 가득하다 -
상고대 [ rime ]
대기 중의 수증기가 승화하거나 0℃ 이하로 급냉각된 안개‧구름 등의 미세한 물방울이 수목이나 지물(地物)의 탁월풍이 부는 측면에 부착‧동결하여 순간적으로 생긴 얼음으로 수빙(樹氷)이라고도 한다. 백색 투명의 부서지기 쉬운 얼음으로 바람이 강할수록 풍상 측에 크게 성장하고 새우꼬리와 같은 모양을 한다.
구름 속을 비행하는 항공기에서 발생하는 착빙도 새우꼬리 모양을 한다. 상고대에는 수증기의 승화로 생긴 얼음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나무서리(樹霜, air hoar)와 과냉각의 정도가 강한 물방울의 동결에 의하여 생긴 백색의 불투명한 부서지기 쉬운 연한 상고대(soft rime), 과냉각 정도가 약하고 입자가 큰 물방울의 동결에 의해서 생긴 반투명 또는 비교적 단단한 굳은 상고대(hard rime)가 있다.
참고 - 동의어 : 수빙(樹氷)
- 아름다운 지구별의 맑은 꽃! -
- 어렵게 어렵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사찰이라는 묘향대의 묘향암을 참배했다 -
- 250년 전 개운조사의 숨결이 아직도 깊이 간직된 조선풍수지리의 빼어난 양택, 묘향암! -
- 지금은 화엄사의 호림스님께서 용맹정진 중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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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대 찬가
하늘 아래 이 보다 더 높은 기도터 있으랴
진한 가을, 정성 모두어 찾아 뵈니 천왕봉 열리고 하늘도 열렸다
반야 가득 퍼져오는 환희심 마시려니
적멸에 조는 다람쥐 세월 이우는 흰구름 조요로움만 남았는데
문득, 마음 열리며 하늘가에 펼쳐지는 풍악 소리!
- 小鄕 權大雄 ( infol@daum.net ) |
- 법당에 들러 정성으로 준비해 간 맑은 작설차를 헌다로 바쳤다 -
- 지난 9월 1일에 첫번째 목표로 등정했던 지리산 천왕봉(1915m) 인증샷 -
- 완만한 어머니의 상징인 지리산은 항상 다녀 보아도 포근하다 -
- 묘향대를 나와 삼도봉에서 임걸령으로 다시 회귀하여 피아골 계곡을 내려오는 밤길이 조금은 힘들었다 -
- 삼일째를 맞은 피아골대피소의 청명한 가을아침 모습 -
- 민간이 운영하는 대피소라 난방대책이 안 서있어 아쉬웠다 -
- 지리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넘어진 고목에 위령문을 바쳤다 -
'지켜 주셔 고맙습니다.
편히 쉬세요.
나의 러브
- 지리산 -'
- 인간과 자연의 동거가 이래야 하리라 -
- 이름 모를 나무에 단풍꽃이 피었구나 -
- 잠룡소의 맑은 물소리 -
- 지난 가을비로 수량은 풍부했다 -
- 햇빛이 반영되는 맑은 물빛 -
- 피아골에서 가장 유명한 삼홍소(山紅, 水紅, 人紅의 沼)의 가을이 무르익고 있는 모습 -
- 산이 온통 붉으니, 산홍山紅!이요 -
- 몰도 함께 붉으니 수홍水紅이면 -
- 사람들 붉어지니 과연 인홍人紅이로다! -
- 전국 단풍명소로 알려진 삼홍소 부근 -
- 맑은 돌과 물빛이 빚어내는 가을 소나타 -
- 깊은 단풍철이 되었구나 -
- 벌써 지고만 낙엽들 -
- 물속에 잠기거나 혹은 떠내려 가거나 -
- 연주담 부근의 가을은 인생여정과 비슷해 보여 조금은 쓸쓸한 감이 들었다 -
- 피아골에 정녕 가을이 깊이깊이 들어 오고 있었다 -
- 피아골 계곡의 직전稷田마을은 오곡 중의 하나인 피(기장)을 많이 재배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래서 피밭골이 피아골로 변한 것이다 -
- 외곡삼거리에서 바라다 본 섬진강 -
- 섬진강의 은파銀波는 그 수려한 빛이 일품이다 -
- 총 20Km의 산행길이 되었다 -
- 다시 무등의 품으로 돌아 온다 -
- 동네의 당산나무에도 이미 깊은 가을이 와 있었다 -
- 가을은 명경헌에 이미 와 있는데...... 괜스리...... 이리저리 다니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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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1969년 1월 1일 지리산 노고단 외국인별장터 앞에서이고, 똑 같은 자리에서 43년만에 다시 사진을 남겨 보는 감회가 남다르다 -
- 지리를 언제까지 찾아보고 안아볼 수 있을런지... -
신두류록을 엮겠다고 처음 작정한 것이 지리산의 유명한 3봉인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 완등으로 올 해의 첫번째 목표를 삼았다.
이제 3봉 완등의 목표는 달성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테마별로 지리산을 껴안을려면 갈 길이 멀다.
이제는 기록으로 남겨두어야할 싯점이 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신두류록을 엮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는 이제 더 이상 크게 무리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할 수만 있다면 동계등반도 고려는 하고 있지만,
어찌나 국공의 텃세가 심한지 비박이나 야영 그리고 야간산행은 꿈도 못꾸게 엄포를 놓고 있으니...... 여러가지로 불편하다.
유사시를 대비해 비박장비는 그대로 짊어진 체 산행을 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점잖게 대피소에서 2박하는 젠틀맨으로 행세를 했다.
새삼 자유롭게 마음 내키는데로 야영을 하던 지난 날의 지리산이 그립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 노고단의 식생을 복원한 공로나,
아주 좋은 등산로를 조성해 주어 하룻만에 화대종주를 자랑하는 기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또한 국공의 공로가 크기는 하다.
그런데 생각나는 김에 우리 산꾼들에게 한 말씀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고 '달리는 말에서 산을 본다'라는 고사성어를 기억해 달라는 말씀이다.
달리는 말에서 산을 바라다 보고 있으니, 그가 정작 산을 보았다는 것은 경망스런 소치였음을 이르는 말이다.
산을 마라톤식으로 달리면서 그 힘을 자랑해서는 결코 산을 모르는 사람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 분들은 울트라 마라톤의 저력을 한껏 과시하고 싶으시겠지만,
그럴 정열이 있다면 진짜 마라톤을 통해서 국위를 선양하시고......
산에서만큼은 제발 산길만 보지 말고, 산山! 그 자체를 보아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 드리고 싶다.
새삼 말씀 드리지만,
'달을 가르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가르키는 손만 바라 본다!'는 고전이 있듯이......
시선을 아래로 두고 산길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다니지를 말고,
산 전체가 대교향곡으로 연주하는 위대한 합창을 들으시면서 한껏 산을 껴안아 보시라는 말씀이다.
자신의 튼튼한 다리를 자랑삼아 이 계곡, 저 봉우리를 뛰어만 다니지 마시고,
하늘에서 유영하는 낙타떼의 무리와 같은 흰구름의 펼침에 감동하면서,
아침이슬을 방울방울 진주처럼 엮어내는 새벽 여명의 하모니를 껴안으시고,
청명한 하늘을 벗삼아 아름다운 소네트를 노래하는 새들의 맑은 지저귐에 정말 귀 기울여 감동해 보시라는 그 말씀이다.
그러기 위해서 산을 오르지 않으시는가.
산에 감동이 있기 때문에 오르시지 않는가?
- 2012년 11월 1일 완성하다 -
小鄕 權大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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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글은 아래 링크된 블로그에 더 있습니다.
http://blog.daum.net/valeriano
- 지리산에 석양이 걸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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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 조사의 유적을 찿아서...
개운조사는[ 정본 수 능엄경]을 주석 하면서 "내가 스승을 만나 불법을 듣고서 수능엄삼매를 몸소 닦고 실천하여,증득한 공적에 대하여 대강 보여 주어 인연이 있는자에게 믿고 수행하게 하고자 했기 때문에 죄와 벌을 두려워 하지 않고 현묘한 기밀을 누설 하노니 믿지 않고 수행하지 않는 것은 그대들의 허물이노라.".라고 말해 마치 천기누설에 따른 하늘로 부터의 벌을 감수하고 결행했음을 강조 하고 있다..
개운조사의 발자취를 따라 필자는 충주에서 문경으로 가는 이화령 터널을 지나 가은,농암을 지나쌍룡계곡 (쌍룡 터널)에 도착했다..
터널이 뚫려 있지 않았다면 아마 구비구비 재를 넘고 원시림이 우거진 산과 계곡을 뚫고 상당히 오지로 돌아 왔어야 만날수 있는 쌍룡계곡의 원시적 웅장함이 눈앞에 들어 왔다..
심원사 입구가 문경쪽에서 시작되는 계곡의입구이며계곡은 여기서 상주 화북쪽으로 이어진다..
이일대을 용이 놀았다하여 용유리라고 하며 괴산의 선유동 계곡과 차별하기도 하여 문경 용유리 계곡이라고도 한다..
심원사 계곡을 일명 용추(용의 척추)라고도 하는데 입구를 들어서자 원시의 기암 절벽과 청정한 계곡이 펼쳐짐에 이것이야 말로 선경이구나 하고 압도 당하게 된다..
개운조사가 [유가심인 능엄경]주석서를 다 집필하고는 심원사의 천장에 숨겨 놓고 훗날 인연있는 사람에 의헤 중생에게 널리 퍼뜨릴것을 기약하며 여러 마리의 용으로 지키게 하고 떠났는데 이곳이 바로 용이 머물던 곳이다..
용의 등같이 굽이 굽이 솟아있는 기암 괴석을 따라 20여분 올라가면 용소가 나타난다..
용소는 그 신령스러움이 죄지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대뜸 살려달라고 애원 할만큼 위압적인 광경이었다..
여기 용이 능엄경을지키고 지켜 왔으리라 생각하니 과연그 땅이 그 인물을 만드는구나 하는 감화에 젖어 들었다.
글자그대로 도를 감추고 있다는 산.도장산에 자리한 심원사(문경군 농암면 내서리 산 8번지)는 이곡에서도 한시간 가량 올라가게 된다..
절이라고 하지만 법당과 스님들이 거처하는 방과 주방이 붙은 인법당이고 작은 암자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조계종 산하의 사찰인 이곳에는 현재 진담과 성운 스님 두분이 거처하고 있지만 개운 조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하였다.
개운조사와는 달리 화두 참선에만 열중하는 현재 조계종의 흐름으로 보때 충분히 예상할수 있는 일이 었지만 아쉬움이 들었다.
개운조사가 필생의 작업으로 [정본 수능엄경]을 주석하고 이 보물들을 숨겨 놓았던 심원사..
언젠가는 한국 불교의 성지로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필자는 윤 양성스님(1872~1992)의 제자인 송보살 (송 대원.47)이 살고 있다는 신화산 (상주시 화북면)으로 향했다..
원적사 입구로 들어서 한참을 가다가 절에 조금 못미쳐 새로 생긴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이 신화산이다..
이 일대는 청화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화산이라는 지명이 붙여져 있다.
원적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암자로 지금은 스님들이 공부하는 도량으로 자리 잡아서 일반 신도들의 발길이 뜸한 외진 곳이다..
이곳에서 의상 대사도 오랫동안 설법하신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여기서 구산 선문 최고의 도량인 문경 봉암사와도 멀지 않아서 이 일대는 풍수 가 들에 의해 미래 10승지로 꼽히는 곳이다..
조계종 종정과 봉암사 조실을 지낸 송 서암 스님은 원적사와 봉암사를 항상 걸어서 내왕하셨고 6.25때는 이곳에 피난온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조선조 때는 사화를 피해 이곳을로 낙향한 선비도 적지 않아 그야말로 지상의 선경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한겨울에도 온화한 서기가 엉기어서 한겨울 에도 물이얼지않아 저절로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진다고 주민들은 이구 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소의 배안처럼 사람이 살기에 좋다고 우복동이라고 저마다 주장하고 있다..
청화산이 진산이고 서쪽에 속리산 동쪽에 도장산 (속리산에서 갈라져 나옴)또 청화산이 남쪽으로 뻗어 나와 이곳의 앞산이 된 승무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말하자면 유.불.선.삼세가 삼교 회통을 이루었다고 하여야 할까.범상치 않은 곳이다..
도의 경계는 충북과 경북을 겸하지만 이일대는 속리산 국립 공원으로 묶여져 있는 곳이다..
백두대간이 종정하고 낙동강과 한강.금강이 발원한 명승지 이다..
이 일대와 계룡산을 중심으로 위로는 소백산.태백산 오대산.설악산 아래로는 학가산.지리산 등 심산 유곡에서 수행하는 수백명의 제자들이 마음으로 개운조사를 추종하고 그의 수행법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수행처에는 의례 [정본 수 능엄경]을 볼수 있다고 한다..
송보살은 여기 청화산 자락 신화산에서 농사를지으며 수도를 하고 있다..
전생에 자신이 중이었다고 말하는 송보살은 출가를 하지 않은채로 수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송보살은 개운조사의 [정본 수능엄경]을 심원사 천장에서 발견해 세상에 빛을 보게한 윤 양성 스님의 제자이다..
송보살이 양성 스님을 처음 만난곳은 지금부터 24년전 계룡산 신도안 법정사에서 였다..
그후 양성 스님이 입적하기전 십수년여간 양성스님을 모시고 지냈다..
그래서 적어도 윤양성 스님의 도를 가장 가까이에서 배운 사람중에 한사람이라 할수 있고 그렇다면 송보살을 통해 개운 조사를 좀더 알수 있지 않을까 하였다..
-양성스님께서는 평소 어떠 셨어요?
"스님께서는 평소 계율을 강조 하셨고 탐진치에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흔히 계율은 기초로 간과 하기 쉬운데 대부분 하근기의 사람에게는 이것을 철저히 한후 그 다음 단계로 넘어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그래서 스님 께서는고기도 먹지 않고 식생활에서 부터 철저히 하셨어요..
오신채.즉 파(양파).마늘 달레 부추 홍거(담배)를 철저히 금했어요.이런것을 먹으면 음욕이 생기게 되죠.."
-수도의 핵심은 무엇이었나요?
"결국 마지막에는 관심(觀心)의 문제로 귀결되는것 같아요..
자기 마음을 보면 만사가 끝나는데 그것이 어려운 것이거든요..
마음이란 쉽게 고요해질것 같으면서도 항상 흔들리고 혼탁해지고 음욕의 발동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거든요..
마음이 고요해지면 호흡은 저절로 이루어 지고 일부러 힘들여 호흡을 하면 오히려 곤란해 져요.병을 고친다던가 방편으로 일부러 (힘들여)호흡을 할수는 있지만 이건 일시적인것에 지나지 않아요.."
-관(觀)이 되면 그 다음은 ?
"관이 이루어지면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호흡이 되기 시작하는데 관을 하는것을 문(文)이라 하고 그 다음 기를 채취.운행하거나 음양으로 바꾸는것을 무(武)라고 합니다..요즘 수도장 같은 곳에서는 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것 같은데요 실은 원래 문을 위주로 했던것 같아요.."
-국내에 개운조사 -양성스님의 계보에 속하는 수도자는 얼마쯤으로 추산 되는지?
"저는 잘 몰라요..전국 산중에 많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어요..그러나 제가 정확히 아는분만 말하면 현재 삼각산에 도력이 높은 홍모 스님이 있다고 해요..일제 시대 함양에 운해 스님이 있었는데 일제 패망을 예언 하셨고 일본 경찰에 의해 한달간 모진 고문을 당하셨고 굶었는데도 괜찮았다고 하세요..
또 현재 도를 일찍 깨우신 20대 젊은 청년이 선산.상주.문경을 무대로 거처하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해인사 석경스님(화봉.90).이양성 스님과 친하셨고 김해 수능엄사에서 정본 수능엄경을 함께 편찬한 한재찬(태봉)김상묵(두봉)문봉.입봉등 봉자 돌림 몇분이 있고 혜강스님.동성스님.청량거사.삼득 스님이 있고 돌아간 서울 삼각산의 원명 스님이 생전에 가까 웠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필자는 이날 송보살과 평소 친분이 두터운 범어사의 심연스님을 만나는 행운도 가졌는데 그도개운조사와 양성스님을 따르고 있었다..그는 전국 사찰과 암자에 개운-양성스님을 따르는 문도가 상당할것이라고 귀뜸을 해주었다..
개운조사는 태어난 연대는 알아도 돌아간 연대는 현재 까지알지 못하고 있다..
개운 조사가 아직 살아 있다면 현재 211세가 된다..
양성스님은 살아 생전 개운조사를 세번 친견했다고 한다.
당시 양성 스님을 16년간 모시고 살았던 자비심 할머니 말에 의하면 충북 영동군 매곡면 매곡리에서 조그마한 암자 (현재의 효창 선원)을 짖고 살때 개운조사가 찿아 왔다고 한다..
월간신시 93년4월호에 게재된 내용을 보면
"벌써 20년도 넘었지요..봄인데 막 설걷이를 끝낸 늦은 이었어요..절아래 산 모퉁이에서 어떤 사란이 오는데 길도없는 산으로 온단 말이제..마당에올라선걸 보니 얼굴이 벌개서 술먹은 사람인줄 알고는 길이 없으니 저 뒤로 돌아 길로 가시오 했더니 앞에 있는 산을 가르키며 저산 이름이 뭐냐 물어요..'모릅니다'햇더니 스님 만나러 왔다고 하길레 스님을 불렀지요..그때는 모르고 봤는데 나중에 양성 스님이 개운당 스님이라고 해요.."
자비심 할머니에 따르면 당시 개운 스님은 옥양목으로 만든 중의 적삼차림으로 약간 짧은 머리에 나이는 35에서 40살쯤 되어 보였고 얼굴은 납작한데 잘생겼으며 키는 작달만 했다고 한다..
양성 스님과법당에서 몇마디 이야기를나누고 나서 마당 밑으로 내려 서는것을 보고서 '그쪽은 길에 이슬이 많으니 뒷길로 가시오'했더니 몇자국 걷는듯 하다가 종적이 묘연해 졌다고 한다..
양성스님은 이에 앞서 상주 남장사 중궁암에 있을때도 만났는데 '지리산으로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양성스님이 산에간 큰딸(윤 재영 스님)을 만나보고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가면 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지금 해가 한발정도남았는데 내가 사는 지리산에 당도하면 해가 반발정도 남겠구나 '하고는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양성스님은 그후 제자들에게 '내가 세연이 깊어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면서 그때 함께 가지 않은 것을 늘 후회 했고 또 개운당 스님이 다시 나타나길 고대하면서 수행을 계속 하였다고 한다.
입적하기 전에도'내가 공부를 못하니 스승님이 않 보인다'고 했다고 한다..
현재 개운조사가 살아 있다는 측도있고 열반 했다는 측도 있다..알수는 없다..
혹 그가 만약열반하였다 해도 그가 남긴 불멸의 공적을 추종하고 흠모하기 때문에 생긴 전설로 보면족하리라..
필자는 다음날 상주시 화북면 우복동 에 있는 동천 (洞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를 찿았다..
동천이라는 뜻은 신선이 사는 마을 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늘과 함께 산다라고 할수도 있고 또한 하늘과 통한다라고 할수도 있을것이다..어느쪽이든 신선이 사는곳을 말한다..
'동천'이라느 글자는 정본 수능엄경에서 개운 조사가 직접 밝혔듯이 51세가 되던 경자년 8월에 읊은 게송에 "주먹으로 동천(洞天)을 쓰고 손톱으로 한좌(閑坐)라는 글귀를 새기니 돌이 물렁한 흙처럼 부드러워서 나의 유명한 글귀를 받아들여 잘나타내 주네..(후략)"에나오는 글자이다..
개운조사가 아라한과 바로 밑의 아나함과를 성취한뒤 후세의 중생들에게 과위(果位)를 성취하면 반드시 증험이 있다는것을 밝힘으로서 중생들의 의심을 풀기 위해 쓴것인데 초서체로 폭 2미터 길이 5미터의 화강암에 쓰여있다..
이 글씨의 전체 길이가 바위의 전체 둘레와 같다는 전설이 전한다..
동천이라는 글씨가 쓰여있는 바위 밑 팻말에는 양사언이 쓴것으로 적혀 있다.
아마도 그의 모습이 신선의 풍채를 보이는 데다가 일마다 기적을 일으킴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양사언이라고 이름을 붙인데서 유래한것 같다..
이 글씨는 획이 끊어지고 멈춘 자리가없다.
또 파인 흠의 상태나 흐름이 너무 자연 스러워서 분명 힘들지 않게 단숨에 써내려 간것임에 틀림없다..
이 글씨가 진정 주먹으로 쓴것이 분명 하다면 이는 개운조사가 실질적인 도력을 지닌 인물임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필자는 내친김에 한좌라는 글씨도 찿아보려고 송보살 심연스님과 함께 선유동 계곡을 뒤졌다..
그러나 낙서만 간혹 나올뿐 글씨는 나오지 않았다..
한좌라는 글씨를 발견하면 더더욱 개운 조사의 전설은 확고 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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