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향일기 小鄕日記

성지순례의 막바지에 찾아간 서해바다의 성스러운 터

梅君子 2013. 2. 21. 12:23

 

성지순례의 막바지에 찾아간 서해바다의 성스러운 터

 

 

 

 

일 시 : 2013년 2월 11일 ~ 12일

 

장 소 : 전남 영광군 백수면 백수해안 일원과 장성 방장산 휴양림

 

 

 

 

 

섬진강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즐기다 돌아 온지 보름도 안되어 또 병이 도진다.

떠나고 싶은 마음...... 남들은 힐링여행이라고 말하는데, 필자는 숲에서 안식년의 두 해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힐링 보다는 마음의 정화를 위해 떠나는 여행이라 부르고 싶다. 그런데 결국 마음을 힐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광의적으로는 힐링여행이 맞는 말이기는 하겠다.

 

아내와 함께했던 이번 여행은 서해안의 기독교 성지를 둘러 보는 스케쥴로 짜 보았다. 한국 철도청에서 서해안 성지순례로 기획한 이벤트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 종착지는 영광군의 염산교회와 야월교회 그리고 신안군 증도의 문준경전도사 순교지이며, 이곳을 찾기 위해 경향의 많은 순례자들이 프로그램에 의해 호남의 서해바다를 찾아 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 지난번 여름에 증도는 다녀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영광의 서해안을 드라이브하면서 성지를 순례하기로 했고, 숙박은 고창의 국립방장산휴양림에서 하기로 마음 먹고 길을 떠났다.

 

 

 

 

- 영광군 염산면에 있는 기독교순교성지인 염산교회 -

 

- 시골교회치고는 드물게 규모가 커 보였다 -

 

- 한국동란 당시 이곳 신자 77분이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

 

- 합장한 무덤을 보는 마음이 착잡하다 -

 

- 순교하신 분들은 모두다 이 마을 부근의 신자라 한다 -

 

- 오랜 세월 동안 복음을 전파했을 옛스런 종탑 -

 

- 사진 자료를 보면서 불굴의 신앙정신을 느껴 본다 -

 

- 이곳 포구에서 순교를 당하셨단다 -

 

 

 

 

전남 영광은 6.25전쟁당시 라디오 방송에서는 남한이 더 우세하다는 오보로 전쟁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전국에서 가장 큰 전쟁피해를 보았던 지역이다. 그러던 중 7월 23일 갑자기 공산군이 몰려들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군수도 피난을 못가고 피살되었다. 공산군들은 우선 교회를 폐쇄했다. 1939년에 세워진 염산교회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피난을 거부한 김방호 목사가 성도들 집을 오가면서 비밀리에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영광읍내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면서 기독청년들이 우익청년들과 함께 만세 환영대회를 준비하고 주도하게 되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공산당들이 이를 분히 여기고 복수하게 되어 염산교회의 순교가 시작되었다.

첫번째 순교자는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염산교회 23세의 청년 기삼도로 죽창으로 여러번 찔려 순교당했다. 그는 당시 목포성경학교 3학년으로 목사 지망생이었다.

두번째 순교자는 노병재 집사였다. 그들은 노집사를 수문 뚝방까지 끌고가 수장시키려 했으나 노집사는 스스로 물로 뛰어들어 찬송을 부르면서 순교했고 그의 일가족 까지 9명이 순교했다.

세번째 순교자로 10월 13일 염산교회의 1대 교역자였던 허상 장로와 부인이 순교했다. 봉덕산 골짜기로 끌려가 매를 맞고 죽창에 찔러 죽였지만 장로님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염산교회 교인들은 수문통 앞에서 무참히 살해되어 순교하게 되었다.

 

사람을 1m씩 거리를 두고 묶어서 엄지손가락을 십자가 모양으로 해서 가슴에 꽉 조여 매고, 돌도 사람 머리만한 것으로 가슴에 묶어서 그 여러 사람되는 인원을 뒤에서 20명이 동원되어서 한꺼번에 빠뜨려 죽였다. 마지막으로, 장병태 성도 집에 거했던 김방호목사를 가족들이 보는 눈앞에서 창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말았다. 이어서 김목사 사모를 그리고 또 다섯 아들과 8세와 5세 손자를 차례로 죽였다.

 

1951년 2월 24일 교인의 3분2가 순교를 당한 염산교회의 살아남은 성도들은 다시 모여서 땅 속 항아리에 숨겨 놓은 성경책과 마루광 항아리에 숨겨둔 찬송가를 꺼내어 새롭게 교회를 세워나갔다. 1997년부터 순교기념 사업을 추진하여 2,000여평의 종교 용지를 마련하고 순교 공원을 조성, 순교자료 전시관과 순교 교육관을 개관하여 200여점의 자료 및 유물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77인의 순교비를 완공하여 교회 앞에 세워 두었다. 또한 ‘77인의 순교사’ 책자와 DVD를 제작해 이들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해 두고 있다.

 

출처: http://goodnewsusa.org/index.php?document_srl=3033

 

 

 

- 교회에서 바라본 염산 해안 -

 

- 오직 예수만 증거하다가 차라리 죽음을 택한 신앙심은 그 기개가 선비의 정신과 닮았다 느껴진다 -

 

- 모나리자님의 마음도 숙연해 보였다 -

 

- 문화유산해설사를 자청한 분 -

 

- 두번째로 들린 기독교 순교지인 월야교회 -

 

- 스테인드글라스가 무척 옛스러웠다 -

 

- 대한예수교장로회 광주노회가 건립한 순교탑 -

 

- 미국남장로교의 선교는 1898년 목포 상륙을 그 기원으로 한다 -

 

 

 

 

야월교회는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471-1에 소제한 교회로써 1908년 4월 5일을 기하여 유진벨선교사에 의하여 설립된 교회이다.

야월리교회의 초기 명칭이 염산리교회였고 현재의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소재 염산교회는 사실상 1939년 군남면 옥실리 교회로 출발 1947년 봉남리 현 소재지로 옮겨 염산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야월교회가 단일교회 순교자 숫자가 영광에서 염산교회 77명보다는 작지만 온 교인이 당시 교회 다니며 사신 분 중에서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순교하였고 교회가 불태워졌다. 1952년 공산당이 백수로 철수한 후에 한번에 80 여구를 매장한 시체들을 발굴할 때 호크와 쇠스랑으로 시신들을 들추어 모습을 알 수 없어서 입은 옷으로 확인하여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공산군이 이들을 처형하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공산군이 야월리 마을 유지들을 공개재판으로 처형하려 하였는데 야월교회 출신 김성종 영수가 칼칼한 목소리로 그들은 흉년이 들었을 때 쌀을 나누어주고 법없이도 살 사람들인데 어찌 그들을 처형하겠는가고 주장하면서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자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옳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먼저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 후 염산면과 백수가 가장 늦게 수복되면서 1952년 4월 그들이 백수로 퇴각할 때 까지 야월교회 성도들을 분주소에 끌어다 죽어라고 패고 허리에 돌을 매달아 물속에 넣어 처형했던 것이다. 야월교회는 여러 경로로 추적한 끝에 65인의 순교자 명단을 정리하였고 광주노회의 도움으로 순교자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출처: http://cafe.naver.com/rkcia/50

 

 

 

 

- 십자가를 지고 계시던 순교의 예수님 -

 

- 신안군 증도의 순교지를 찾아가던 지난 여름의 운무에 휩싸인 증도대교 모습 -

 

-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

 

- 문준경전도사께서도 한국동란 당시 순교하셨다 -

 

- 그분의 순교는 호남노회의 밀알이 되었다 -

 

- 뜨락에 피어있던 송엽국 -

 

- 지난 여름에 찾았던 바닷가에 면한 순교묘지 -

 

- 그분의 희생은 수많은 거목을 배출하는 불씨가 되었다 -

 

- 여자의 몸으로 서해의 섬들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던 그분의 삶이 거룩해 보인다 -

 

 

 

 

문준경(文俊卿·1891∼1950) 전도사는 한국이 낳은 여성순교자 중 으뜸으로 꼽힌다. 신안 암태도 수곡리 출신인 그녀는 1908년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매결혼을 했다. 서로 원치 않은 결혼을 한 탓에 신혼 첫날부터 소박당한 그녀는 시부모를 모시고 살다 목포로 건너간다. 그리고 북교동성결교회에서 부흥사인 이성봉 목사(당시 전도사)를 만나 크리스천이 된다.

이어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문 전도사는 증도로 돌아와 이 섬, 저 섬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한 해에 고무신이 9켤레나 닳을 정도로 선교에 앞장선 문 전도사가 개척한 교회는 신안 일대에 100여 곳. 그 중 증도에서 모두 11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증도 대초리와 화도를 잇는 1.2㎞ 길이의 노두는 문 전도사가 화도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고무신 몇 켤레가 닳도록 걷고 걸었던 바닷길이다. 노두(露頭)는 개펄 위에 돌을 놓아 건너다니던 일종의 징검다리로 물이 차면 사라지고 물이 빠지면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자동차가 달릴 수 있도록 시멘트 포장을 했지만 사리 땐 노두 바닥이 찰랑찰랑할 정도로 바닷물에 잠긴다.

문준경 전도사의 고무신행전 길로 불리는 노두 저편의 섬은 화도. 화도(花島)는 해당화가 많이 핀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드라마 ‘고맙습니다’에서 영신의 집으로 등장했던 민박집은 화도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문 전도사가 개척했던 화도교회가 마을을 정겹게 굽어보고 있다.

 

문 전도사가 신학생 시절인 1935년에 증도에서 처음으로 개척한 증동리교회는 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다. 우전해수욕장과 드넓은 개펄이 한눈에 들어오는 바닷가 언덕에 세워진 증동리교회의 담임목사는 김상원 목사.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 목사는 문 전도사가 신도들과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 1장과 무덤을 이장할 때 발견한 돋보기 1개를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다. 돋보기는 문 전도사가 성경을 읽을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증동리교회 앞마당에 위치한 낡은 시멘트건물은 문 전도사가 순교한 후 피로 범벅이 된 바닷모래를 실어와 건축한 옛 증동리교회.

 

일제강점기 때도 박해를 받았던 문 전도사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4일에 교회 앞 바닷가에서 59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으로 서울이 수복(9월 28일)되고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10월 1일)하자 후방에 남은 좌익세력들은 당황한다. 국군이 증도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문 전도사와 양민들을 증동리교회 앞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끌고 가 학살을 자행한다.

문 전도사의 죄목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으로 그녀의 고무신행전을 의미한다. 그녀는 수양딸인 백정희 전도사를 살려달라고 부탁한 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총탄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8일 동안 양민들과 함께 바닷가 모래사장에 버려졌다.

 

순교지 앞 개펄은 짱뚱어가 뛰어노는 곳으로 몇 해 전 은빛 모래로 유명한 우전해수욕장과 증도면 소재지를 연결하는 470m 길이의 짱뚱어다리가 놓여지면서 증도의 명물로 등장했다. 썰물 때 드넓은 갯벌이 드러나고 물이 차면 바다를 가로지르는 낭만의 다리로 변신하는 짱뚱어다리에서 맞는 해돋이와 해넘이, 그리고 별빛 쏟아지는 야경은 한 폭의 그림.

 

순교 1년 만에 장례식을 치른 문준경 전도사의 시신은 교회 뒷산에 묻혔다 2005년 순교 현장으로 다시 유골을 이장했다. 그녀의 전도와 순교가 밀알이 되어 현재 증도는 주민 1700여 명 중 90% 이상이 크리스천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고무신행전이 3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이다.


<관련기사 모음>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착공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060558&cp=nv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 드라마 같은 삶 드라마로... CBS TV 첫 자체 제작 '시루섬'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1660852&cp=nv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 일생 그린 영화 <남도의 백합화>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2768

 

‘고무신행전’ 바닷길서 밀알을 찾다… 신안 증도로 떠나는 성지순례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2353200&cp=nv


출처: http://boshow.com/954

 

 

 

 

- 이곳이 거룩한 성지이다 -

 

지도면 증도를 비롯한 천사의 섬에는 이분의 복음흔적이 많이 남아 있단다 -

 

 

 

  

불교와 천주교 그리고 천도교와 원불교의 성지들을 전국적으로 두루 둘러 보며 순례를 마감하려고 했는데, 이 시대의 아픔인 한국전쟁 당시의 순교지는 기독교가 많았기 때문에 이번 여행을 통해 [한국의 성지순례]가 거의 종례하는 의미가 될 것 같다. 물론 천주교와 기독교는 한 뿌리이기 때문에 여기에 차별을 두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기독교 고유의 순수성을 따로 보완하는 이유는 거기에 삶의 진실이 애절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해바다 순례기는 보다 더 경건한 마음가짐을 갖게 해 준다. 삶 자체를 사랑한다면 진리 자체도 숭고한 자세로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30여년에 걸쳐 틈틈히 참례했던 정성들이 이제는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기 때문에 이 자료들을 모아 후학들을 위한 인문도서를 엮어 보려고 마음은 먹고 있으나,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라 여겨진다. 30여년 전에, 불교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오대산 상원사 중대의 적멸보궁을 찾아 나섰던 여행길이 차츰차츰 범위를 넓혀 가면서 한국5대종교의 성지순례로 변모해 갔는데, 필자의 속좁은 단견으로는 모든 성지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지 않게 다가 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그를 번복하느니 차라리 주검을 택했던 선조들의 선비정신은 한국에 상존한 여러 종교들에도 깊게 남아 있었으며, 이곳 성지들에서 모두 일맥상통하였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필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성지순례는 다만 걸림이 없고 항상 경건한 자세로 일관해 왔다고 생각한다.

 

진리를 찾아가는 여행길에 무슨 종교의 걸림이 필요할까. 그 걸림에 걸려 십자군은 이슬람을 괴롭혔고, 이슬람은 현대에 이르러 미국 뉴욕에서 9.11 테러를 일으켰지 않는가 말이다. 이는 신께서 원하는 영역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걸림이 야욕으로 남아서 증오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이로 인해 토출된 지극히 우매한 행위일 뿐이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증오는 신성神性의 영역이 아니다. 대저, 신성神性은 진리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살육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신神을 들먹이며 거침없이 살생을 자행하고 있으니 이는 자기 모순에 빠진 우매행의 결과일 뿐이다. 자기가 깎아서 조각해 놓은 신神에게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질량불변의 영원한 신성神性을 진리로 삼고 의지한다면 어찌 쉽게 살생을 할 수 있으랴. 그러니 이제는 자기가 조각해 놓은 신神의 영역에서 걸림없이 빠져 나와 신성神性으로 다시 복귀해야 한다. 전자의 영역에서는 또다른 양상의 9.11이 암존할 뿐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어떤 명분으로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진리가 아니다.

 

 

 

 

- 다시 영광의 서해바다를 담아 보려고 길을 떠난다 -

 

- 쨍하게 추운 겨울날의 갈매기 떼 -

 

- 영광 백바위를 찾아 갔다 -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 두우리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두우리해수욕장이라고도 한다. 고운 모래와 넓은 백사장·푸른 소나무숲과 흰 바위가 조화를 이룬다. 많이 알려지지 않아 찾는 사람이 적고, 파도가 잔잔해서 한가로운 휴식을 취하기에 적합하다. 어촌계에서 숭어잡이·낚시·대파밭 김매기·염전체험·해수욕·조개잡이·갯벌체험 등을 경험할 수 있는 체험학습장을 운영한다. 주변 명소로는 가마미해수욕장·법성포·불갑사·송이도 등이 있다.

 

[출처] 백바위해수욕장 | 두산백과

 

 

 

- 두우리해수욕장은 시설이 깨끗해 보였다 -

 

- 다시 길을 떠나 백수해안 도로에 이르렀다 -

 

- 아름다운 노을빛의 황혼으로 유명한 백수해안도로 -

 

- 그곳에는 유명한 해수온천이 있다 -

 

- 온천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

 

- 유명환 황혼을 관람하는 포인트인 노을전망대 -

 

 

 

 

백수해안일주도로는 영광 칠산 앞바다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멋진 길이다.(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백암리~대신리) 길이가 17㎞에 달하는 서해안 최고의 드라이브 길로 다른 서해안 해안도로들이 바다를 바로 접하고 있는 데 비하여 이 길은 산언덕을 따라 만들어져 있어 제법 높은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 시원한 풍경이 동해안의 바닷가를 달리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굽이굽이 도는 길이 오르락내리락 하니 바다가 가까워지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해안도로 중간쯤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전망대까지 오르는 계단을 오르내리면 365일 건강하다 이름하여 건강365계단이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는 드라이브도 좋지만,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해질 때의 풍경이니 길 끝까지 갔다가 해넘이 시간에 맞춰 전망대로 돌아와 칠산 앞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감상해 보자. 전망대 근처에는 영화 「마파도」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동백마을이 있다. 바닷가 쪽으로 자리한 마을인데 입구에 차를 세우고 걸어 내려가면 작고 아담한 마을이 나온다. 영화가 개봉된 지 꽤 오래 지났지만 영화의 내용이 재미있어 그런지 아직도 이 마을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동백마을 외에도 길 아래 바닷가 쪽으로 답동마을이 있는데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긴 하지만 마을로 내려가면 200년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석구미 해수찜이 있어 예약을 하고 해수찜을 즐길 수 있다. 함평의 해수찜이 대중적으로 쉽게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면 이곳의 해수찜은 바닷가에 있는 암반을 깎아서 만든 탕으로 찰랑거리는 파도를 앞에 두고 자연 속에서 즐기는 해수찜인 것이다.

 

출처: 네이버 http://terms.naver.com/entry.nhn?cid=680&docId=948348&mobile&categoryId=1403

 

 

 

 

- 코발트빛 하늘과 잔잔한 바다가 좋았던 날 -

 

- 백수해안도로를 끼고 돌아 영광굴비로 유명한 포구, 법성포에 이르렀다 -

 

 

 

 

 

법성포

 

 

 

 

차라리

보지 말았어야

발길 돌렸어야 했다

 

포구에 들러

해장국에

술 한 잔 하더래도

듣지 말았어야 했다

 

오래 전에

佛法 들어 왔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람

 

삶은 고달프고

어깨는 무거운데

어쩌자는겐가

 

어찔하게 취해

포구 나서려는데

비상하던 갈매기들

끼룩끼룩 웃는다

 

허전한 마음 채워 보렴

싫다고 피해갈 삶이더냐

그냥 모두 받아 들이렴

 

그순간

숲정이에 펼쳐지는 오로라

부처님 맨처음 오셨던 빛!

맞아, 법성포로구나

 

 

 

- 小鄕 權大雄

 

 

 

 

- 법성포 숲쟁이 해변에 불교최초도래지 기념관이 최근 건립되었다 -

 

- 법성포 해변을 지키던 숲쟁이로 유명한 곳이다 -

 

 

 

 

숲쟁이

 

 

 

오래 세월

숲쟁이는

비바람 참으며

서 있었습니다

 

모진 세월 흐르자

거목들로 자라나

풍성함 뽐내니 

 

그제서야 사람들

환희심으로

시선을 줍니다

 

숲은 언제나처럼

태고적 향기

간직하고 계시는데

 

모르는 건 사람들 뿐

답답한 이는

숲쟁이였답니다

 

무엇이 그리 바빠

아프던 사람들

눈길 한번 안 주는지

답답했답니다

 

이제 서로 인정해 주니

숲쟁이 안도하며

함께 싱그런 향기

주고 받곤 한답니다

 

 

 

- 小鄕 權大雄

 

 

 

 

- 산책로가 너무나 잘 정비되었다 -

 

- 산책로에서 바라본 법성포구 -

 

- 이곳이 인도인 마라난타 존자께서 불법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최초 상륙하였던 지점이다 -

 

 

 

 

전남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 좌우두 일원에 위치해 있다.

 

법성포 좌우두는 인도승 마라난타가 A.D 384년에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하면서 최초로 발을 디딘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관광명소로 개발하고 있다.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가리킨다. 한반도 불교 전파는 삼국시대 고구려(소수림왕 2년 전진의왕 부견)와 신라(눌리마립간때 묵호자)의 경우는 불교의 전래경로와 초전 법륜지가 분명하나 백제불교의 전래는 전해진 경로와 최초도래지가 불확실하였으나 인도의 명승 “마라난타 존자”가 영광의 법성포로 들어와 불법을 전하고 불갑사를 개창하여 백제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구전되어 왔다.

 

1998년 영광군의 학술고증(동국대학교)을 통하여 영광땅이 백제불교의 최초 도래지라는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다. 법성포 좌우두는 인도승 마라난타가 A.D 384년에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하면서 최초로 발을 디딘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관광명소로 개발하고 있다.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가리킨다.

 

출처: http://korean.visitkorea.or.kr/kor/inut/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9218

 

 

 

- 백수해안도로와의 연육교가 건설되고 있어 보다 더 접근이 쉬워질 것 같다 -

 

- 보리수 아래서 해탈하기 직전, 뼈만 앙상한 고행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처상 -

 

- 인도식 불가의 조각은 우리의 양식과는 조금 특이해 보인 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

 

- 언덕에 조성된 사면부처상 -

 

-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 보살상 -

 

- 탑원에는 그야말로 인도 간다라 양식의 조각들이 전시되고 있어서 애써 찾은 보람을 느꼈다 -

 

- 화순 쌍봉사에 있는 미완의 원형탑을 복원한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모습-

 

 

 

 

 

망설임

 

 

 

저 다리 지나면

숲으로 들어 가는데

하릴없이 찾아온 마음

다리 앞에서 망설인다

 

이 길이 만약

영원으로 통하는

길이라면

나는 들어 갈까

안 들어 갈까

 

망설이는 사이

토끼 들어 가고

박새도 들어 간다

 

무엇때문에

머뭇거리는 거니?

 

삶이 어차피

너만의 그림 그리기라면

다리 건넌들

다른 그림 있을까 보냐?

 

 

 

- 小鄕 權大雄

 

 

 

 

- 최초불교도래지를 참배하고 다시 숲쟁이를 돌아 나왔다 -

 

- 나의 도반이신 모나리자님 -

 

- 석양이 깔리는 고창을 돌아 휴양림을 찾아 나섰다 -

 

 

 

 

노을지는데

 

 

 

노을지는데

마음만 바쁘다

 

할 일 다 못해

조바심

더 해 지는데

 

속절 없이 해는

서산에 기운다

 

함께 나왔다가

먼저 가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그대는 내일

다시 찾아 오겠지만

우린 가면 그만이란다

 

걱정하는 사이

노을빛 커지고

기러기떼 지나 가는데

 

황혼에 가득 차 오르는

저 빛나는 사랑의 빛!

 

맞아,

저 빛만 기억하리라

회한은 이제 보내리라

 

 

 

- 小鄕 權大雄

 

 

 

- 방장산자연휴양림은 국립이라 그런지 몰라도 시설이 매우 개끗해 보였다 -

 

- 좌측 이층 소나무실이 우리가 묵었던 방 -

 

- 실내는 모두 원목으로 마감하여 목향이 은은하게 베어 있다 -

 

- 아침에는 숲길을 힐링하며 산책하였다 -

 

- 다음에 오면 묵고 싶은 방갈로의 시설들이 매우 좋아 보였다 -

 

 

 

 

노령산맥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방장산의 위치는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방장로 353번지이다.


주변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신비한 구름속에 가리워져 있다하여 예부터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이라 불리웠으며, 험준한 산세로 도적떼들이 숨어 살았는데 이들에게 잡혀간 한 여인이 남편이 구해주러 오지않자 기다림에 지쳐 부른 「방등산가」(방장산의 옛명)가 있다. 그리고 정상에서 고창평야와 멀리 서해바다를 볼 수 있어 해마다 패러글라이딩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방장산자연휴양림에는 다양한 활엽수종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수종으로 고로쇠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등으로 참나무류가 주종을 이룬다. 또한 다양한 야생화가 자생하고 있어 교육 및 정서함양에 적합하다. 자연친화적인 통나무 집 및 황토로 지어진 객실이 준비되어 있어 웰빙문화가 보편화 되고 있는 현시대에 적합하다. 물놀이장, 잔디광장, 세미나실 등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다양한 연령층의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다

 

방장산휴양림의 숲 탐방로는 다른 지역의 휴양림과 달리 오솔길로 이루어져 있어 숲 해설프로그램 진행시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어 교육효과가 높다. 인근지역에 방장산보다 높은 산이 없어 방장산 정상에 오를 시 광활한 지역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어 등산의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등산로가 완만하여 남녀노소 어려움 없이 등산을 즐길 수 있다


 출처: http://www.huyang.go.kr/user/forest/User_contentIntro.action?rcode=35&mcode=55&hcode=0181

 

 

 

 

- 담쟁이가 그린 가지화 -

 

 

 

 

담쟁이

 

 

 

담쟁이는

허리가 약해

홀로 설 수 없어요

 

누가 도와 주어야

푸르름 펼치니

실로 딱하지요

 

그래도 곁에서

많은 이들

도와 준답니다

 

바위던 나무던

또는 풀밭이던 간에

함께 살자 합니다

 

그래 담쟁이는

외롭지 않게

어우러져 산답니다

 

바람에게

인사도 건네고

꽃도 피우며 산답니다

 

 

- 小鄕 權大雄

 

 

 

 

- 설국에 쌓인 방장산휴양림에서의 힐링은 매우 감미로웠다 -

 

 

 

 

이번 서해바다의 여행은 경건한 마음이 우러나오는 신과의 대화가 함께 했으며, 대자연의 바다가 주는 장엄미사곡에 한껏 마음을 힐링할 수 있었던 보람찬 길이었다. 우리나라만이 겪어야 했던 이념 대립의 희생역사에 대해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함께 한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에 의해서 수난을 당해야 했던 기독교의 역사는 유교와의 대립으로 수난을 당해야 했던 천주교의 역사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우리가 세운 진리의 토대가 아닌 타성의 물리력에 의해 순식간에 받아들여야 했던 숙명이 있었기에 과도기의 희생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당시 비록 많은 피를 흘렸을지라도 이를 통해 여과된 순수종교를 보존할 수 있었다 생각하니 이를 다행으로 삼아야 하겠다.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제물로 내어 놓았던 선조들의 기개는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에도 널리 계승발전시켜야만 하는 까닭이 된다. 진리의 수호신은 대한민국을 기억할 것이며, 이념대립의 지장학적 위치가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인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나라의 부가 세계 8위의 수출국으로까지 상승하였으므로 이를 기회 삼아 반석처럼 굳건한 기틀을 쌓아 나가야 할 것이다.

 

단시일에 받아 들였던 한국의 종교들은 그런 의미에서 이제 진리만을 수호신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축복의 기운이 우리에게 넘치는 오늘날은 선조들의 피가 희생된 결과물임을 잊지말고서 항상 자숙하며 세계사 주역의 손색없는 자질을 크게 발휘할 때가 된 것이다. 요즘은 나라 안팎으로 국위를 선양하는 한류나 IT 발전, 수출대국으로의 부상들에 관한 기쁜 소식들이 넘쳐나고 있으니, 이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고서 또한 진리를 큰 토대로 삼으면서 우러러 보이는 대한민국을 확립할 때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성지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발이 닿게 찾아 다니는 필자의 정성 또한 우리를 향한 경건한 기도였음을 생각해 본다. 동기動氣라는 테제는 정성의 움직임이 아닐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조국의 하늘과 산천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열심히 껴안는데 그 자연이 어찌 동기감응을 주지 않을까? 그런 아름다운 마음으로 우리 모두 합심해서 자연을 지키고 슬기롭게 보존해 나아간다면, 자연이 주는 동기감응 또한 널리 후손들을 이롭게 해 줄 것이다. 황폐된 조국에서 번영된 후손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동기감응同氣感應은 이런 것이다.

방송국에서 아나운서가 말을 하면 송신탑이 전파를 발사한다. 그 전파를 수신하는 라디오가 그에 감응하여(동기화한다고 말한다) 성우의 목소리를 그대로 소리로 표현해 준다. 송신탑과 수신안테나의 코일이 같은 사이클로 공명하여 얻어지는 결과물인 것이다. 즉, 같은 기氣 끼리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감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성이 후일에 후손들에게 감응되면 좋은 결과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주물리학에서는 이곳의 내가 왼쪽으로 돌면 수만광년 떨어진 곳의 또다른 나도 왼쪽으로 동시에 돈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이것이 동기감응인 것이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으면서 "맞아! 맞는 말이야" 하신다면 필자의 생각이 여러분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실로 간단한 원리이다.

 

그러므로 이를 신성神性의 귀착지로 삼는다면 우리 모두 편안함을 얻을 것이다.

 

그외 무얼 더 바랄까? 

 

 

 

 

 

- 2013년 3월 3일 완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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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鄕 權大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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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돋움체-필자 글(녹색), 궁서체-인용 글(검은 회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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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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